쿠르드는 누구인가 - 인구, 국가별 거주 현황
쿠르드는 중동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이란계 민족집단이다. 주로 튀르키예 남동부, 이란 북서부, 이라크 북부, 시리아 북동부에 걸쳐 거주하고 있으며 쿠르드 인구가 많은 이들 지역을 통틀어 ‘쿠르디스탄(Kurdistan)’이라 부르기도 한다. 미국 워싱턴쿠르드연구소는 전체 쿠르드 인구를 4,000만~4,500만 명으로 추정한다. 쿠르드 인구는 대부분 쿠르디스탄에 집중돼 있지만 유럽과 중앙아시아 등에도 상당한 규모의 쿠르드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존재한다.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이 붕괴된 후 오스만 영토는 유럽 열강들과 현대 튀르키예 공화국, 이라크와 시리아 등 역내 신생 국가들, 그리고 이란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로 나뉘었다. 그 결과 쿠르드족은 중동에서 아랍, 튀르키예, 이란(파르시)에 이어 4번째로 큰 민족집단임에도 불구하고 독립국가가 없는 상태가 됐다.
언어, 종교, 문화
(1) 언어
쿠르드의 언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쿠르드어이며 10세기 이래로 아랍 학자들에 의해 독특한 언어를 가진 민족으로 인정받아왔다. 현대 쿠르드어는 주로 튀르키예·시리아 쿠르드가 사용하는 쿠르만지(Kurmanji)와 이라크·이란 쿠르드가 많이 쓰는 소라니(Sorani) 방언으로 나뉜다. 문자 표기에서 튀르키예와 시리아 쿠르드는 현지 관행대로 주로 라틴 알파벳을 사용하는 반면, 이란과 이라크 쿠르드는 아랍어 문자를 쓴다.
오늘날 대부분의 쿠르드인들은 다언어 사용자로, 모국어인 쿠르드어 방언과 함께 거주하는 국가의 언어를 함께 사용한다. 이라크에서는 아랍어와 쿠르드어가 국가 공식 언어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란에서는 지역 언어, 아르메니아에서는 소수 언어로 공식적인 지위를 갖고 있다.
쿠르드어를 쓰지 않는 하위 집단인 자자(Zaza)와 고라니(Gorani)는 민족적으로는 쿠르드로 분류되지만 자자-고라니어는 쿠르드어로 분류되지 않는다.
(2) 종교
대다수가 수니파 무슬림이지만, 이란과 이라크에는 시아파 무슬림도 상당수에 이른다. 쿠르드 내 지역 집단인 샤피이는 나크슈반디와 카디리야라는 수피 교단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다. 튀르키예에는 이슬람 소수 종파인 알레비가 있고, 시리아-이라크 국경지대에는 조로아스터에서 유래한 야지디 교도가 있다. 조로아스터, 기독교도 일부 존재한다. 고라니의 경우 야르산교도가 많다.
(3) 문화
쿠르디스탄은 대부분 산악지대이며 국경과 산맥으로 서로 분리된 쿠르드의 문화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쿠르드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핵심 문화유산은 춤이다. 남녀가 전통 음악에 맞춰 정교한 발놀림을 선보이는 특징적 원형 춤이 유명하다.
쿠르드인들에게 종교의 영향력은 주변 아랍계에 비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라크 지역에서는 아르빌과 술라이마니야 같은 중심지에서 영화 산업이 급성장하고 있으며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의 주요 쿠르드 정치 정당들도 일반적으로 세속주의와 성평등을 수용한다.
쿠르드인들은 각국에서 정치적, 문화적 탄압을 겪었다. 일례로 튀르키예는 오랫동안 쿠르드 정체성과 언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해 왔으며, 쿠르드 마을 파괴와 정당 활동 금지 등 극도의 탄압을 가해왔다. 이로 인해 쿠르드인들은 전통 문화를 지키고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왔지만 쿠르드어 교육 금지나 경제적인 이유에 따른 현지 주류 민족로의 동화 때문에 고유 언어와 문화를 보전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역사
(1) 전근대 시기
기원전 3000년 무렵의 수메르 점토판에 카르다카(Kar-da-ka)라는 나라가 언급된다. 기원전 5세기 말 그리스 역사가 크세노폰(Xenophon)은 카르두초이(Karduchoi)라는 나라를 언급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메디아(Media)와 페르시아(Persia)에 살던 시르티안(Cyrtians)을 쿠르드인의 선조로 보는 시각이 우세해졌다. 쿠르드인들은 스스로를 고대 이란계 메디아인(Medes)의 후손이라 여기지만, 쿠르드의 민족적 기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사산(Sassanid, 3~7세기) 시대 아르다쉬르 1세(Ardashir I, 180–242 AD)가 쿠르드로 알려진 집단을 복속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초기 시리아어 자료에서 쿠르드를 후르다나예(Hurdanaye), 쿠르다나예(Kurdanaye), 쿠르다예(Kurdaye)라 불렀으며 쿠르드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7세기 아랍 자료에서다. 이슬람 초기 페르시아 서사시 샤나메(Shahnameh) 등에 이 명칭이 보인다. 10세기 이후 알 마수디(al-Masudi) 등은 쿠르드를 독립적 언어 집단으로 언급했고 11세기부터 ‘쿠르드’는 명확히 민족명으로 쓰이게 된다.
이슬람 창시 뒤 639년 쿠르드는 사산 군대와 함께 아랍 이슬람군에 맞섰지만 패배했고 이슬람 지배 하에 들어갔다. 이후 아랍인들이 다수 쿠르드를 이슬람으로 개종시켰으며 군사적으로 쿠르드를 적극 포섭했다. 10~12세기에는 아르메니아 일부를 통치한 샤다드(Shaddadids, 951–1174), 아랍계였으나 쿠르드화해 아제르바이잔을 통치한 라와드(Rawadid, 955–1221), 동아나톨리아를 지배한 마르완(Marwanids, 990–1096), 이집트와 시리아를 비롯해 드넓은 지역을 지배한 아유브(Ayyubids, 1171–1341) 등 쿠르드계 왕조들이 들어섰다. 그러나 셀주크 튀르크의 침공을 받은 데 이어 아랍 칼리프 시대에는 이슬람 제국의 주축 가운데 하나로 편입됐다. 아유브 왕조를 창건하고 십자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 살라흐 앗딘 유수프(Salah ad-Din Yusuf ibn Ayyub, Saladin)는 지금까지도 쿠르드를 대표하는 황제로 칭송을 받는다.
1501년 사파비 왕조 수립 이래 쿠르드는 아랍 지배를 받았으며 16세기부터는 오스만 치하로 들어갔다.
(2) 쿠르드 민족주의와 좌절
오스만이 약해진 19세기 말부터 쿠르드는 자치·독립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다(1880년 셰이크 우베이드울라의 봉기). 이 시기 쿠르드 민족주의는 발칸의 분리주의, 아라비아 반도의 와하비 운동과 마찬가지로 서구 열강의 압력과 맞물린 오스만 제국 내 민족주의와 맥을 같이 하는 현상이었다.
쿠르드의 독립국가 수립 시도
|
쿠르드 민족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력한 흐름이 됐다. 오스만은 러시아와 싸우는 과정에서 쿠르드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고 인종청소에 가까운 학살과 추방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쿠르드 사이에선 자결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그러나 유럽연합국과 오스만 간의 세브르 조약(1920년)은 쿠르드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고 튀르키예, 시리아, 이란, 이라크의 국경이 굳어지면서 쿠르드는 네 국가로 분할됐다.
국가별 쿠르드 상황과 정치적 투쟁
20세기 4개국으로 분할된 쿠르드는 각기 거주지역에서 정치적 자유와 자결권을 보장받기 위한 싸움을 벌였고 모두 해당 국가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그 양상과 탄압의 강도, 자결권 획득 정도는 나라 별로 다르다.
1. 튀르키예
(1) 쿠르드 억압과 PKK의 무장 투쟁
20세기 후반부까지 국제사회에서 ‘쿠르드 문제’의 대부분은 튀르키예 공화국의 억압과 인권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특히 쿠르디스탄노동자당(PKK)과 그 지도자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 1948~)에 대한 탄압은 쿠르드 문제를 상징하는 이슈였다.
무스타파 케말은 쿠르드를 민족으로 인정했고 쿠르드 자치권을 약속했으나 1924년 새 헌법은 쿠르드의 자치권을 부정했고 공공장소에서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했으며 쿠르드 토지를 몰수하는 법안이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1920년대부터 쿠르드의 반란이 산발적으로 이어졌으며, 1934년 쿠르드를 주요 거주지역에서 전국으로 분산시키는 재정착법이 시행되면서 강제 추방과 집단학살이 반복됐다.
1950년대에 이르자 ‘터키화’의 강한 압박 속에 쿠르드 사이에서 독립보다는 정치적 자유를 얻고 체제 내에서 위상을 공고히하려는 흐름이 점차 커졌다. 그러나 통합 움직임은 1960년 터키 쿠데타로 중단됐다. 군부는 쿠르드 분리주의와 지역 낙후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국가기획기구(Devlet Planlama Teşkilatı, DPT)를 설립하고 민족 혼합을 장려했으나 이 또한 강제 이주와 쿠르드 문화의 말살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탄압 속에 1970년대에는 쿠르드 민족주의가 진화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정치 사상이 전통적으로 권위에 반대해 온 지역 봉건 권력에 맞선 쿠르드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78년 PKK 결성도 그 흐름 속에 있었다.
쿠르드 분리주의가 거세지자 정부는 1990년대까지 군대를 동원해 PKK를 무력 진압했으며, PKK는 국경 너머 이라크 쿠르드 지역에 피신해 튀르키예 내 투쟁을 이끌게 된다. 정부는 PKK와 사실상 전쟁을 벌이면서 지역 민병대를 만들어 대리전에 동원했고, 쿠르디스탄 지역은 잔혹행위가 일상화되고 빈곤화됐다. 1990년대 중반까지 쿠르드 마을 3000개 이상이 지도에서 사라졌고 40만 명 가까운 이들이 강제이주를 당했다. 투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된 PKK가 정부와 협상에 나서면서 휴전이 여러 차례 선언됐다.
그러나 쿠르드라는 민족적 실체를 인정하기보다는 강압을 통해 민족주의 세력을 무력화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으며, 1998년 시리아와의 협정 등 쿠르드의 해외 기반을 없애는 외교적 노력이 병행됐다. 1991년 터구트 외잘 대통령이 쿠르드 언어 표현 일부를 허용하는 개혁 조치를 발표했으나 이후 정부 내 강경파와 군부가 개혁 흐름을 저지하거나 오히려 퇴행시켰다. 1999년 체포된 외잘란은 결국 2002년 민주적 연방제 모델 채택을 촉구하며 독립 목표를 공식적으로 철회했다.
(2) 무장 투쟁 포기 선언과 불안한 화해
2002년 집권한 정의개발당(AKP)은 초기에는 유럽연합(EU) 가입을 목표로 ‘민주화’와 인권 개선을 추진하면서 쿠르드 문제의 제도적 해결을 모색했으며 이를 위해 2009년에는 쿠르드어 방송 허용, 표현 자유 확대와 지방자치 강화, 일부 수감자 사면 등을 포함한 ‘쿠르드 이니셔티브 (Kurdish Initiative)’라는 정책 구상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군부 및 보수세력의 반발, 반쿠르드 정서의 확산 등으로 인해 매우 제한적이었고 그마저도 무산됐다. 그 해 말 헌법재판소는 쿠르드계 정당 민주사회당(DTP)을 해산시켰다.
2013년, 감옥에 있는 외잘란이 ‘신뢰 구축 및 평화 노력’ 선언을 발표했다. 이후 정부와 쿠르드 정당, 무장 조직 간 비공식·공식 대화가 이어졌고 무력 충돌 억제, 정부군 철수, 일부 사면, 지방 참여 확대 같은 제안들이 논의됐다. 2015년 2월에는 돌마바흐체(Dolmabahçe) 합의가 발표돼 정부와 쿠르드 정당 대표들이 향후 논의를 위한 10개 항목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과 극단조직 이슬람국가(ISIS)와의 전쟁으로 역내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쿠르드의 공격과 무력 진압이 격화돼 화해 과정은 중단됐다.
충돌과 탄압이 반복되면서 쿠르드의 반격은 최근 몇년 새 소강국면에 접어들었고, 2025년 5월 12일 PKK는 공식적으로 무장 해제를 선언했다. 이로써 수십 년간의 무력투쟁이 끝나는 전기가 만들어졌으나 정부가 동화 중심의 패러다임을 강요하면서 쿠르드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쪽으로 전환하지 않는다면 불안정이 재연될 수 있다.
2. 이라크
유럽 열강의 힘을 빌리려던 쿠르드의 독립 기대는 1920년 세브르 조약으로 무력화됐으며 이라크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1922년 영국-이라크 조약 역시 쿠르드 자치에 대한 어떠한 보장도 포함하지 않았다. 이라크 쿠르드는 1940년대부터 자치권을 추진했으나 이라크가 군부 쿠데타와 바트당 독재 체제로 들어가자 무력 투쟁으로 노선을 바꿨다. 이후 이라크 쿠르드는 국제사회의 우호적 정서 속에 북부에서 자치 지역을 형성했으며, 1991년 걸프전과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 등 국제정세와 맞물려 정치적 권리를 인정받았고 ‘국가 속의 국가’를 구축했다.
(1)사담 후세인 정권의 혹독한 탄압
1946년 무스타파 바르자니가 쿠르드 민주당(KDP)을 창당해 자치를 추진했다. 1958년 압둘 카림 카심의 쿠데타로 이라크공화국이 수립된 뒤 쿠르드는 다시 한번 자치의 꿈을 키웠으나 정치적 환경은 기대와 달리 유리하지 않았고, KDP는 1961년 반란을 시작했다. 1966년 바자즈 선언을 통해 쿠르드 조직들이 일부 권리를 보장받았으며 1970년 평화 협정으로 쿠르드 자치 원칙이 합의됐다. 이 협정은 15개 조항에 걸쳐 쿠르드인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당시 쿠르드 정치진영은 이란으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975년 3월 이라크와 이란이 협정을 체결하면서 KDP는 당국의 탄압을 받는 처지가 됐고, 지도부는 결국 반란 종식을 선언하고 해외로 망명했다.
1975년 쿠르디스탄에서 잘랄 탈라바니가 이끄는 쿠르디스탄 애국연합(PUK)이 결성됐다. PUK는 창당 직후부터 강경 분리주의로 KDP와 충돌을 빚었으며, 바트당 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1987~1989년 사담 후세인 정권이 화학무기를 동원해 쿠르드 지역을 초토화한 ‘안팔 작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2)전쟁 기간 쿠르드 자치지역 수립과 확대
안팔 작전의 일환으로 전개된 1988년의 ‘할라브자 학살’에 세계의 시선이 쏠리고 1991년 걸프전을 계기로 사담 정권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쿠르드 정치상황은 전기를 맞았다. 미국 주도 하에 이라크 북부 쿠르디스탄에는 비행금지구역(no-fly zone)이 설정됐으며, 이 지역은 KDP와 PUK의 통치 하에서 사실상의 국가로 기능하기 시작했다. 바르자니의 KDP와 탈라바니의 PUK가 무력 충돌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쿠르디스탄은 바트당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상태에서 사회경제적 기반을 구축했고, 이라크 정부의 통제를 받는 지역들보다 훨씬 민주적인 정치체제를 만들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틈타 쿠르드 자치정부는 경계선을 상당히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사담 정권이 전복된 것은 쿠르드 자치정부에는 또 다른 기회였다. 2005년 제정된 이라크 새 헌법은 중앙정부와 쿠르드 간 분쟁이 있었던 쿠르디스탄 남부를 자치정부 관할권에 두는 것으로 못박았으며, 쿠르드를 압박했던 사담 정권의 ‘아랍화’ 정책은 철회됐다. 3년의 미군정이 끝난 뒤 2006년 출범한 이라크 새 정부는 시아-수니-쿠르드의 3대 집단 간 균형과 견제를 원칙으로 삼았고, ‘쿠르드 대통령-시아파 총리-수니파 국회의장’ 구도에 합의가 이뤄졌다.
이라크가 2006~2009년 수니-시아 종파 간 유혈 충돌로 수렁에 빠진 동안 쿠르드 자치지역은 석유 자원을 이용해 경제적 기반을 더 탄탄히 했다. 시리아에서 2010년대 내전이 이슬람 극단세력 이슬람국가(ISIS)와의 전쟁으로 변질되고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 모두 혼란을 거듭하던 시기에, 쿠르드 자치정부는 이라크의 주요 유전지대인 키르쿠크까지 관할 하에 넣었다가 이라크 중앙정부의 항의로 다시 내준 일도 있었다.
2017년 9월 쿠르드지역에서 독립 주민투표가 실시됐고 73% 투표율에 92% 독립 지지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라크 대법원은 이 투표를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국제사회의 우려 속에 독립 움직임은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2025년까지, 쿠르드 정부에는 중앙정부가 약속한 예산을 지급하지 않는 등 권력 분점의 약속을 어기고 있다는 반발이 계속 커져왔으나 분리독립을 향한 가시적인 움직임은 두드러지지 않고 있다.
3. 시리아
1923년 유럽 열강과 오스만 간 로잔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 쿠르드 영토의 대부분은 튀르키예에 귀속됐고 나머지는 영국 위임 통치령 이라크에 편입됐다. 튀르키예 국경 지대의 일부 쿠르드 지역은 시리아 알레포에 편입됐다. 시리아 쿠르드 중에는 1차 대전 직후부터 튀르키예의 탄압을 피해 이동해온 이들도 있었다. 이 같은 이주는 1940년대까지 계속됐다.
프랑스 위임통치 당국은 분할통치 전략의 일환으로 소수민족을 군대 활동에 포섭했고, 새로 이주해온 쿠르드족들에게도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쿠르드의 자치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1931년 말 시리아 새 헌법 하에서 치러진 첫 선거에서 쿠르드의 의회 진출이 이뤄졌으며 새로운 자치운동이 일어났다.
시리아 독립 뒤 쿠르드 주요 정치인들은 1957년 시리아 쿠르디스탄 민주당(KDPS)을 창당했다. 이들의 목표는 분리주의가 아니라 문화적 권리 보장과 경제적 발전, 민주주의 강화에 맞춰져 있었으나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1962년 시리아 정부는 쿠르드의 주된 거주지역에서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12만 명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이들은 교육, 취업, 재산 소유조차 불가능한 무국적자 신세가 됐으며 쿠르드족을 겨냥한 아랍민족주의 캠페인이 벌어졌다.
1973년 바트당 정부는 튀르키예 접경 쿠르드 지역에 아랍계를 이주시키는 ‘아랍벨트(Hizam Arabi) 계획’을 추진했다. 계획은 3년 만에 중단됐지만 인구 구성은 이미 변화한 뒤였다.
1986년 3월 노루즈(전통 명절) 때에는 다마스쿠스에서 전통 복장을 입고 축제를 하던 쿠르드족에게 경찰이 발포해 1명이 사망했고 이것이 쿠르드 시위로 이어졌다. 2004년에는 카미실리의 축구 경기장에서 팬들 간 충돌이 쿠르드 시위와 실탄 진압, 수백명의 체포로 이어졌다. 2006년 시리아 쿠르디스탄 국민의회(KNAS)는 미국과 유럽 의회에서 시리아 쿠르드를 대표해 연방국가 전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시리아 쿠르드의 결집력이나 정치 운동은 튀르키예에서처럼 강력하지는 않았으며, 2011년 ‘아랍의 봄’ 시위가 내전으로 이어지고 쿠르드 자치가 형태를 갖추기 전까지는 본격화되지 않았다.
4. 이란
이란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나 그에 따른 소수민족의 분리주의 요구가 강하지 않은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이란 내 쿠르드 일각의 분리주의 운동은 이웃한 이라크 쿠르드의 움직임과 연계돼 있는 경우가 많았다. 1940년대 이래로 이라크 쿠르드 지도자들은 이란 쿠르드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란의 쿠르드 분리주의자들은 이라크 동료들과 연대하거나 탄압을 받을 때 이라크로 피신하곤 했다. 1944년 쿠르디스탄부흥협회(JK)라는 이름 하에 이란과 이라크, 튀르키예 쿠르드 대표들이 이란 국경 지대 달란파르에서 협정을 체결한 것은 국경을 넘는 쿠르드 연대의식의 상징으로 평가됐다.
1970년대 이란 쿠르디스탄 민주당(KDPI)이 이라크 KDP와 협력하며 이란 북부에서 정부군과 전투를 하기도 했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로는 이란 쿠르드족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심해졌고, 쿠르드 민족주의 정당들은 자치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얻는 데에 실패했다.
이란에서 쿠르드 문제는 두드러진 이슈는 아니다. 테헤란 시장을 지낸 보수파 유력인사 갈리바프(Mohammad-Bagher Ghalibaf) 같은 쿠르드 정치인도 있고, 아제르계인 현 대통령 페제슈키안(Masoud Pezeshkian)은 쿠르드어를 할 뿐 아니라 소수민족 권리 보장을 약속하고 있다. 이라크 쿠르드자치정부의 네치르반 바르자니 대통령이 2024년 5월 이란을 방문하는 등 쿠르드 측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다. 그 해 3월 총선 때 이란 북서부의 다민족 도시 우르미아에서는 쿠르드 후보들이 승리했다.
2022년 ‘히잡 시위’를 촉발시킨, 구금 중 사망한 여성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가 쿠르드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분노를 샀듯이 민족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란 내 쿠르드의 주된 요구는 대다수 이란인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적 통치와 시민 권리이며, 그에 기반한 쿠르드어 교육권과 같은 포용적 조치들인 것으로 보인다.
중동 정치 역학과 쿠르드
쿠르디스탄을 끼고 있는 중동 국가들은 21세기에 격변을 겪었다. 이라크에서는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혼란이 이어졌지만 쿠르드는 자치지역을 넓히고 법적인 권리를 보장받았다. 시리아에서는 장기간의 내전이 벌어졌으며 국제 전쟁 양상 속에서 쿠르드의 무장력이 이슬람 극단조직과의 전쟁에서 주력군이 되면서 역할을 확대했다. 이는 쿠르드의 위상을 높이는 효과를 낳았다.
1. ISIS와의 전쟁과 쿠르드
(1) 쿠르드 군사조직의 부상
2014년 극단세력 IS(ISIS)가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에서 국가 수립을 선언하면서 세계에 충격을 줬다. 미국은 정보 실패를 자인해야 했고, 안정돼가던 이라크는 국경 너머에서 온 위협으로 다시 혼란에 빠지는 듯했다. 당시 혼란 속에 IS와의 전쟁에서 주력 부대로 떠오른 것은 쿠르드 자치지역군 ‘페슈메르가(Peshmerga)’였다. “죽음을 마주하는 자들”이라는 뜻의 페슈메르가는 20세기 중반 무스타파 바르자니의 무장 투쟁 시절 결성됐으나 정부군의 압도적인 군사력에 대적하지 못하다가 걸프전 이후 비행금지구역이 설정되면서 쿠르디스탄 안보를 책임지게 됐다.
이라크전 때 페슈메르가는 미군 주도 연합군에 협력하면서 사담 후세인 체포에 일조했고, 취약한 새 정부 뒤에서 병력을 키웠다. IS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이라크 정부군이 후퇴를 거듭하는 동안 페슈메르가는 키르쿠크를 재빨리 장악하고 IS의 공격에 맞서 영토를 방어했다. 이를 통해 페슈메르가는 쿠르드의 저력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떠올랐으며, 특히 강력한 여군의 존재가 보수적인 아랍국들과 대비됐다. IS를 물리친 뒤 2017년부터 쿠르드 자치정부는 페슈메르가 통합과 현대화에 초점을 맞춘 개혁을 시작했으며 현재 약 14만명 규모인 병력을 최대 20만 명으로 확대할 계획을 갖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내전 기간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정권의 정부군과 반정부 진영, IS 등 극단조직, 반아사드-반쿠르드 노선의 튀르키예군과 친아사드 러시아군의 개입이 얽힌 복잡한 전선이 형성됐다. 여기에서도 IS, 아사드 정권 양자에 맞선 전투의 주력은 쿠르드 부대인 인민방위대(YPG)였다. 2011년 내전 발발과 함께 창설된 YPG는 범민주화 진영인 시리아민주군(SDF)의 전투를 이끌었고 2016~2017년 IS 근거지인 락까 함락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2019년 IS와의 전쟁을 끝내면서 쿠르드 지역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가 쿠르드족을 튀르키예의 학살 위험에 노출시켰다는 비판을 받았고, 튀르키예는 YPG를 테러조직으로 규정해 공격했다. 내전이 사실상 아사드 정권의 승리로 귀결됐지만 아사드 정권은 2025년 붕괴했고 시리아에는 새 정부가 출범했다. 그러나 중동을 혼란으로 몰아넣은 극단세력과의 전쟁에서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군보다 우세한 역량을 보여준 쿠르드 무장력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쿠르드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2) ‘로자바 혁명’과 아랍세계에 던진 충격
2011년 내전이 시작되자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족이 결집했고 이듬해 아프린, 자지라, 라카, 데이르에조르 등지를 포괄하는 자치지역을 형성했다. 통칭 ‘로자바(Rojaba)’라 불리는 이 자치지역은 한때 면적이 5만㎢에 이르렀으며 쿠르드족 여성지도자 일함 에흐메드와 아랍계 지역 정치인 만수르 셀룸이 자치정부의 공동수반을 맡았고 ‘시리아민주협의회’라는 나름의 의회도 갖췄다.
로자바 지역에서는 쿠르드, 앗시리아계, 투르크멘 등 소수민족들이 자치를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다. YPG가 정부군을 철수시키고 도시들을 함락한 뒤 쿠르드는 공동지도평의회를 구성했으며 2014년 지역 자치를 공식 선포했다. 2016년에는 소수민족들이 참여한 ‘시리아 북동부 민주 자치 행정부’ 즉 로자바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 움직임은 ‘로자바 혁명’으로 불렸는데, 주축인 쿠르드가 자치와 함께 사회혁명을 내세우면서 여성들의 역할을 제고하고 성평등과 분권화, 직접민주주의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압둘라 외잘란의 ‘자유사회주의’ 정치사상에 영감을 받은 로자바 정부는 민간 기업, 자치정부, 노동자 협동조합이 혼합된 형태의 경제를 추구하면서 노동자 및 생산자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자급자족 경제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튀르키예의 금수조치와 내전 상황 때문에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으나 공공 서비스 확충이나 교육 지원, ‘공동체 경제’와 남녀 동수의 의회 구성 등이 중동 역내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독일 등 유럽에서는 로자바 혁명을 지지하며 쿠르드 보호를 촉구하는 캠페인이 벌어졌다.
로자바는 독립이나 분리주의를 표방하기보다는 연방적 분권을 지향해왔고 2023년에는 이를 반영한 헌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으며, 긴장과 갈등이 반복됐다.
아사드 정부가 붕괴된 뒤 2025년 3월 시리아 과도정부가 출범하면서 로자바 쿠르드 정부와의 관계도 전환기를 맞았다. 새 정부는 범민주 세력인 SDF와 합의하면서 ‘행정 및 군사기관의 통합’을 명시했는데 이는 북동부 지역의 행정, 치안, 군사조직을 중앙정부 산하로 흡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경 통제, 공항 운영, 석유·가스 시설, 관세·무역 통제 권한도 중앙정부에 점차 이양하기로 했다.
“Syrian Kurds Attempt to Maneuver Amid New Realities,” Arab Center Washington D.C.
다만 쿠르드 공동체가 ‘시리아 정체성의 일부’로 공식 인정받고 정치 과정과 헌법 개정에 참여할 권리도 보장하기로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없지 않으며, 자치를 포기하게 하는 대신 점진적 통합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로자바 측에서는 자치 후퇴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적지 않고 갈등 소지가 남아 있다. 시리아 측은 YPG 조직을 경계하는 튀르키예가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위상이 불안정하긴 하지만 로자바 실험, 그리고 페슈메르가와 YPG의 ‘여성 전사들’은 중동 역내에 충격을 안겨줬으며, 이라크 중앙정부보다 더 경쟁력있고 효율적인 쿠르드 자치정부의 존재와 함께 ‘아랍과는 다른’ 중동의 실험으로 평가받았다.
2. 이스라엘과 쿠르드 관계
(1) 이스라엘–쿠르드 관계
이스라엘은 1950–70년대 아랍권에 포위된 상황에서 비(非)아랍 세력과 연대를 모색했고, 그 축 중 하나가 이라크의 쿠르드족이었다. 1960–70년대에 이란의 사바크(SAVAK)를 통해 무기·훈련·자금을 제공했고, 바르자니 측과 접촉했다.
2003년 이후로 공식 외교관계는 없지만 2014년부터 튀르키예를 경유해 이라크 북부의 원유가 이스라엘로 향하는 등 경제적 연결이 더욱 뚜렷해졌다. 2017년 이라크 쿠르드 독립 주민투표 때 이스라엘은 ‘독립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하지만 2023년 10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 전쟁을 시작한 뒤 쿠르드 자치정부는 신중한 중립 메시지를 내거나 공식 입장 표명을 자제했고, 이는 바그다드 중앙정부와 아랍국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쿠르드 내의 시선은 전쟁 초기 하마스의 민간인 공격과 이스라엘의 과잉 대응을 모두 비판하고 인도주의를 강조하는 등 아랍권의 기조와 차이를 보였다.
(2)역내 시각
2024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는 이라크 쿠르드 자치지역의 중심도시인 에르빌을 미사일로 공격하면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거점을 타격했다고 주장했다. 이라크 정부는 주권침해라며 반발했지만, ‘쿠르드와 이스라엘의 내통’이라는 프레임이 역내 긴장을 키운 것은 분명했다.
튀르키예는 이스라엘이 이라크 쿠르디스탄 독립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줄곧 반발해왔으며 2025년에는 시리아 쿠르드 자치지역과 중앙정부의 통합이 미뤄지는 것에 대해 경고하면서 이스라엘의 시리아 내 공습을 연관지었다.
가자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스라엘–쿠르드 채널은 물 밑으로 내려앉았지만, 이란이나 튀르키예의 반응에서 보이듯 이스라엘과의 관계는 중동에서 자칫 쿠르드의 발언권을 약화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또한 이라크 정부는 2022년 ‘이스라엘과의 관계정상화 금지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이스라엘의 관계는 쿠르드 자치정부의 행동을 제약하고 싶어하는 이라크 중앙정부나 친이란 진영의 주된 공격 명분이기도 하다. 역내 다른 행위자들은 이스라엘–쿠르드 연계를 지역 질서에 대한 잠재적 균열 요인으로 보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3. 쿠르디스탄 독립국가 수립 가능성
독립국가 수립은 쿠르드의 오랜 숙원이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20세기 이래로 모든 노력은 일부 지역에서 짧은 시간만 존속된 국가 실험으로 끝나거나 실패로 돌아갔다. 현 상태에서 각국의 ‘영토적 통일성’을 깨뜨리는 국경 변경 시도는 물리적으로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며, 국가 내에서 자치지역을 공식화하거나 연방을 제도화하는 것이 최대치라고 볼 수 있다.
첫째, 쿠르드 인구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의 반대 입장이 확고하다. 현재 쿠르드족 주요 거주국 가운데 이라크만이 헌법에서 쿠르드 자치정부를 ‘연방 구성 주체’로 명시하고 있다. 시리아 북동부의 자치체제는 공식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튀르키예는 어떠한 종류의 독립 시도도 용인하지 않고 있다.
둘째, 쿠르드 내부에서도 의견이 통일돼 있지 않다. 시리아 북동부의 쿠르드는 튀르키예의 봉쇄나 지역 내 적잖은 아랍계 주민 분포 등 복잡한 요인으로 독립 기반이 약하다. 이라크 쿠르드가 주축으로 나서지 않는 한 국경을 흔드는 쿠르디스탄 수립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라크 쿠르드 자치정부는 튀르키예 쿠르드 분리진영에게 피신처를 제공해왔지만 튀르키예 군대의 무력 진압도 용인하는 식으로 거리를 둬왔다. 시리아 내전 때에 시리아 쿠르드 피란민들을 받아들이면서 범쿠르드 보호자 역할을 했으나 이웃나라 동족들까지 끌어안는 쿠르디스탄 수립을 목표로 내세운 적은 없다. 유전을 갖고 있고 자체 행정 조직과 페슈메르가라는 군사조직까지 보유해 ‘준(準)국가’에 가장 근접했지만, 재정문제나 내부 분열, 중앙정부와의 갈등 등 자체적인 취약 요인을 안고 있다. 이 때문에 자체 기반을 강화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다.
셋째, 미국이나 유럽연합 또한 쿠르드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 일례로 2017년 이라크 쿠르드 독립투표 때 미국과 유럽 모두 ‘단일 이라크 원칙’을 표방했다. 쿠르드의 물리적 한계에 더해 광범위한 외교적 승인을 얻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로선 이라크와 시리아의 쿠르드 모두 현 체제를 유지하면서 중앙정부와의 협상을 통해 높은 수준의 자치를 유지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장기적으로 국가화를 추진하더라도 내부 통합과 안보의 안정, 에너지 수익 확보와 같은 조건들이 충족돼야 하므로 전망이 밝다고는 할 수 없다.
“War’s Spiral, Peace’s Ascent: Kurdish Politics at the Crossroads of History”
20세기 민족주의가 부상한 이래 쿠르드는 민족국가 건설을 꿈꿨으나 4개국으로 분할됐고, 분리주의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21세기에 옛 권력질서가 깨지는 과정 속에 중동의 쿠르드는 자치 측면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4개국에 흩어진 쿠르드족이 자신들의 독립국가를 가질 전망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쿠르드족이 중동에서 떠오르는 정치적 세력임은 부인할 수 없다. IS에 맞선 싸움에서 쿠르드의 군사력이 부상했고, 보수적이고 낙후된 아랍 정치문화와는 다른 가치로 주목을 받았다. 종파주의와 반인권적 억압 체제, 여성 차별과 인권침해가 여전히 만연한 중동에서 쿠르드의 가치가 반향을 일으킬 수 있지만 갈등 소지는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딸기가 보는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운드업] OCED, 브릭스, 나토, EU, 상하이협력기구 회원국 (0) | 2025.04.21 |
---|---|
[강연 안내] 우크라이나와 국제 정세 (0) | 2022.04.18 |
[라운드업] 아프간 카불 공항 테러 상황 정리 (0) | 2021.08.27 |
시베리아 무더위에 산불, 세계가 기후재앙 (0) | 2021.08.05 |
[출판문화] 전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0) | 2021.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