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이후.
G. 존 아이켄베리. 강승훈 옮김. 한울. 4/13
존경하는 교수님께서 아이켄베리를 여러번 언급하셔서 사서 읽었다. 재미있었다!
이 책에서는 세 가지의 주요한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첫째는,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힘을 억제하는 국가의 능력과 메커니즘은 변화해왔다. 그 결과 주요한 전쟁 이후에 출현한 질서의 성격 역시 변화해왔다"라는 주장이다. 이를테면 '전략적 억제'를 실행하는 승전국의 능력은 과거 몇 세기를 걸쳐 진보해왔다는 것이다. 국가의 힘에 관해 자의적이고 무차별적인 행사를 억제하고 승전국에 바람직한 영속적인 전후질서를 고정화시키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제도전략에 의존하게 된 것은 1815년의 전후구축이 최초의 예였다.
둘째는, 정치적 관리 메커니즘으로 제도를 활용하려는 주도국의 인센티브와 능력은 두 가지 '변수', 전후기 '힘의 불균형'의 정도와 전후 구축의 당사자인 국가의 유형에 의해 형성된다는 주장이다. 민주주의국가들이 구속적인 제도에 참여할 가능성은 비민주주의국가들에 비해 훨씬 크다. 바꿔 말하면, 제도를 고정화시키기 위한 '점착성(Stickiness)'은 비민주주의국가들보다 민주주의국가들 사이에서 더욱 높다.
셋째는, 제도이론을 통한 해석이 1945년 이후의 질서 내에서 민주주의 공업국가들 간의 안정적인 관계를 설명하는 데 공헌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이 제도이론을 적용한다면 1945년 이후의 질서가 냉전종결 후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25-26
힘에 대한 억제전략의 가장 기본은 국가주권을 강화하는 것이다. 베스트팔렌 전후구축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바로 영토국가에 궁극적인 주권적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영토국가는 보편적 군주제로 대표되는 어떠한 권위에도 종속되지 않게 되었고, 모든 국가의 권리와 주권적 권위는 특정의 종교와 분리되었으며, 공화국과 군주국은 평등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고, 국제법은 확충되었다.
종교주권과 영토주권의 역할에 관해 각 국가가 상호기대를 갖게 된 배경에는 각국이 '정치질서로서의 유럽'이라는 이해를 갖게 되었던 사실에 있었다. 즉, 유럽의 정치질서에는 조직화된 정치지역으로서의 통일성과 통합성이 존재했으며, 이 질서 속에서 지배자들은 일정한 공동의 정책방침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힘을 억제하는 제2의 방법으로 사용되었던 것은 영토구성 단위의 해체 또는 분산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와 같이, 광대한 영토를 지닌 대국이 민족자결정책의 명목으로 영토가 세분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1945년 이후에 주권 국민국가의 수가 증가한 사실 역시 국가의 자율성을 강화하여 힘을 억제하려는 주요 국가들의 노력의 결과였다. 힘을 억제하는 제3의 전략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세력균형'이다. 1713년 위트레흐트 전후구축은 힘을 억제하는 원천으로서의 균형 개념을 최고의 이념으로 했다는 점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였다.
-73-75
제4의 전략은 제도적 구속이다. 통상적으로 국가는 스스로의 선택지를 남겨두려고 한다. 즉, 타국과의 협력을 염두에 두는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관계단절의 가능성을 남겨두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도적 구속을 받으면 국가는 전혀 반대의 행동을 취하게 된다. 즉, 장기적인 안전보장을 확보하기 위해 철회하기 곤란한 정치적•경제적 사안의 이행을 약속하는 것이다. 국가는 주권국가로서 실시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의 약속이행과 국가관계를 고정화시킨다. 이 메커니즘은 '퇴출비용’이 동반되며 '의사표명의 기회'를 창출시킨다. 이처럼 제도는 분쟁을 완화시키거나 해결하는 메커니즘을 제공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5의 전략은 공식적인 '초국가적 통합'이다.
-76-78
'제도형 질서'는 주도국 에게 바람직한 결정을 고정화시키며, 그 결정은 주도국의 힘이 절정기를 지난 이후에도 지속될 수 있다. 상황에 적합한 형태의 모든 규칙과 제도가 정착될 때 그 규칙과 제도는 설령 주도국의 물리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저하될지라도 주도국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형태로 기능할 것이다.
-97
입헌형 질서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질적 합의(Substantive agreements)'와 '제도적 합의(institutional agreements)'를 구별하는 것이 유익하다. 교섭거래는 일반적으로 '분배'를 둘러싸고 행해지는 행위를 말한다. 첫째 형태의 합의는 국가 간의 물질적인 이익을 분배하는 실질적 합의이고, 둘째 형태의 합의는 원칙이나 규칙, 제 조건, 그리고 그 밖의 요인을 규정하는 제도적 합의로서, 그러한 틀 속에서 성과에 관한 개별적인 교섭이 행해진다.
입헌형 합의는 게임의 규칙, 즉 관계국이 서로 발전을 다투며 개별적인 문제를 둘러싼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제 조건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입헌형 전후구축을 실현하려고 할 때 주도국은 새롭게 설립된 제도라는 틀 속에서 공식적이거나 제도적인 전후구축에 관해 양보를 하게 되지만, 자국의 우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그것 이 실현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101
제도가 탄생함으로써 주도국과 약소국 쌍방이 각각의 정책방침을 정할 때 정책을 급격히 변경시키는 것은 훨씬 어려워진다. 제도는 힘이 어떻게 행사되며 분쟁이 어떻게 해결되는지에 관한 규칙을 규정한다. 바로 여기에서 질서에 대한 기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장기적인 제도적 합의가 실현된다면 장래에 걸쳐 합의를 고정화시키고 주도국의 ‘힘의 입장'이 쇠퇴한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큰 이익을 불러올 수 있다. 각국의 약속이행 준수와 자국에 바람직한 이익의 확보를 위해 '힘의 자산'을 끊임없이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필요성 역시 감소한다. 약소국에게도 제도는 매력적이다. 제도형 질서에 기초한 타협은 강대국의 '지배'나 '포기’와 같이 약소국이 우려하는 사태에 대한 위험을 없애거나 적어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102
제도에 '점착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제도적 합의는 정식적이고 법적이며 조직에 관한 순서와 이해를 구체화시킬 수 있다. 그 결과 관계국가들이 장래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강화되는 과정이다.
둘째, '제도적 합의' 역시 다국 간 연계와 일상적 연락, 국가연합이라는 관계가 빈번히 탄생되고, 이렇게 탄생된 관계가 각각의 국가정책과 약속이행에 일정한 탄력과 연속성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국가 지도자가 신속히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과는 달리, 정부관료 조직은 지도자와 같이 신속하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제도적 합의'가 세밀하게 조직된 관료 네트워크에 편입될 때 거기에서 국가정책에 대한 억제가 작용한다.
또한 합동으로 의사결정을 행하기 위해 전문적 실기능력과 계획입안 능력이 요구되는 동시에 일종의 '분업'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다국 간 연계관계를 단절하는 비용은 점점 증가하게 되고, 더욱이 '제도적 합의'가 형성하는 정치적 과정 덕분에 어떤 국가의 관료는 타국 관료의 사고방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정치적 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함으 로써 관계국은 타국의 정책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다음으로, 이러한 다국적 집합체가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에 의해 기능할 때 각국의 입장과 정책의 일관성은 강화된다. 이러한 집합화는 '브레인 공동체'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셋째, '제도적 합의'는 결국 강제력을 지닌 일련의 정치적인 활동과 제도를 위한 '조직구성체'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일종의 제도 적 유출(spillover)’ 과정이다. '제도적 합의'는 또한 정책입안에 관한 국내제도의 성격을 변경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 기능이 강화됨에 따라 국가정책의 연속성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제도적 합의'는 국내 행정제도의 변화를 촉진함으로써 국가의 정책방침과 약속이행을 간접적으로 '고정화'시킨다.
-114-115
루스벨트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평화노력이 허사로 끝나게 된 것에 대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영토적 또는 경제적인 제국주의의 목적을 위해 전쟁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계약을 영국에게서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대서양 헌장'을 이용하려고 했다. 즉, 미국이 모르는 곳에서 동맹국들의 음모와 비밀스러운 이해가 진행되어 윌슨의 ‘14개조' 구상을 소멸시켰던 사실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대서양 헌장'의 제정으로 루스벨트가 추구했던 목적은 개방적으로 관리된 전후질서 속에 유럽의 민주주의국가들을 고정시키는 과정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272
루스벨트 구상의 성공 여부는 열강들 간의 노력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었고, 결국 그 구상은 전쟁종료 시 최초의 희생이 되고 말았다. 세계가 냉전으로 돌입하면서 두 종류의 전후구축이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과의 협력의 전 망이 그 모습을 감추고 나서도 안정된 개방경제체제를 촉진한다는-'대서양 헌장' 속에서 소중히 다루어진 - 미국의 정책목표는 전후질서 구축의 중심을 이루었다. 1947년 이후 이 과제는 서구 민주주의국가 내부에 한정된 정책목표가 되었으며, 당초의 구상보다 훨씬 직접적인 미국의 관여와 제도적 전략의 조직이 전개되었다.
구상에 대한 채용 여부는 미국 내에서의 반대, 유럽의 취약성과 저항, 소련과의 급속한 긴장관계라는 요소가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어떤 정책구상이 부상되다가도 금방 사라지고 대신 또 다른 정책구상이 등장하는 일종의 '전회현상(rolling process)'이 발생했다. 더욱이 정책 입안자와 관료로 구성된 다양한 그룹이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결국 미국이 채택한 전후정책의 기본방침은 서구의 주요 국가와 일본을 대상으로 우선 경제와 안전보장관계의 제 분야에서 국제적이고 지역적인 제도를 설립한 후에 개방경제체제 와 다중심적 민주주의를 확립해 이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274-275
다양한 그룹들로부터 여섯 가지의 전후구상이 제창되었는데, 제1의 구상은 말하자면 글로벌 거버넌스를 목표로 하는 야심적인 사고와 계획이었다. 아인슈타인, 메이어(Cord Meyer), 커진스(Norman Cousins), 리브즈(Emery Reeves)와 같이 저명한 '세계는 하나(one worlders)' 논자들은 자신들의 구상을 발표해 세계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비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구상들은 주로 미국정부가 아닌 외부에서 제창되었으며, 실제의 정치활동이나 정책입안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국제연합의 창설에는 부분적으로 공헌했다고 여겨진다.
제2의 전후구상은 개방적인 무역 시스템의 창설에 관심을 보인 것이었다. 이 입장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곳은 (Cordell Hull) 장관을 필두로 하는 미 국무성이었다. 혈과 국무성 고관들은 개방적인 국제무역 시스템이 경제와 안전보장 면에서 미국의 국익에 중심적인 중요성을 지니며 평화유지에도 근간이 되는 의의를 지닌다는 신념을 일관되게 지니고 있었다.
-276
제3의 전후구상은 북대서양 지역의 민주주의국가들 간의 정치질서 구축을 주요한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대서양동맹이라는 구상의 자취는 2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영미 정치가들과 지식인들이 제창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월터 리프먼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대서양은 유럽과 미국 사이에 존재하는 국경이 아니라, 지세와 역사, 그 밖의 필요성으로 인해 상호연결된 국가공동체 속에 존재하는 내해(inland sea)0|다.”
제4의 입장은 다른 입장들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미국이나 유라시아 주변부의 지정학적 이해를 중시했다. 미국에게 서반구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과 미국은 아시아와 유럽 양 지역에서 시장과 원료에 관한 안전보장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아시아와 유럽의 시장과 자원에 대한 접근용이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 따라서 미국은 장래에 국력을 신장시킬 만한 적성국가에 유라시아 대륙의 지배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은 국방계획 담당자들에게도 지지를 받았다.
-278-279
제5의 입장은 '제3의 세력'을 육성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전시 중에 실현된 소련과의 협력관계가 와해되기 시작하면서 전략적 선택으로 부상했다. 구체적인 구상으로는 전후 시스템을 다극화하도록 추진하고, 유럽을 독립적인 힘의 중심지로 육성하며, 독일을 광범한 통일유럽의 일부로 통합하는 것이었다.
유럽 내에 힘의 중심지를 구축하는 것의 중요성은 케넌이 오랫동안 주장해왔다. 1947년 10월 케넌은 "우리가 짊어진 '양극체제(bi-polarity)'라는 무거운 짐의 일부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독립된 힘의 요소를 유라시아 대륙에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것을 미 정책의 기본방침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케넌의 스태프들은 1947년 5월 23일, 마셜(George Marshal) 국무장관에게 이 문제에 관한 최초의 제안문서를 제출했다. 케넌은 후일 다음과 같이 논했다. “우리는 통합적인 접근방법을 고집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유럽인들이 내셔널리스트로서가 아니라 유럽인으로서 유럽 대륙의 경제문제를 다루기 원하기 때문이다."
-281
만일 독일이 유럽에 구속된다면 유럽 자체의 충분한 통일과 통합이 필요해지며 독일은 일종의 닻(anchor)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럽을 부흥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경제적으로 통합된 강력한 유럽을 목표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유럽 지도자 들이 좌경화나 우경화를 하지 않고 서구 본래의 사고방식을 증대시키 도록 노력하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제부흥뿐 아니라 전후의 이데올로기와 도덕적인 면에서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정치적 목표를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 1947년 5월에 제출된 문서에서 그와 같은 계획에 어울리는 이데올로기적인 내용은 유럽통합 이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통일유럽 구상은 바꿔 말하면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건설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성벽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제6의 입장은 소련과의 양극체제 균형을 노린 전면적인 서구동맹의 실현이었다. 1948년 6월, 베를린 위기가 발생하자 미 당국자들은 처음으로 일종의 온화한 서구방위 관계의 확립에 찬성하게 되었다. 1948년 10월, '서구동맹'은 '북대서양조약의 체결을 위해 교섭할 것’을 미국에 정식 요청했다.
-283-284
첫째, 양극체제와 '봉쇄'가 본격화되기 이전의 단계에서 다면적인 질서구축 구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둘째, 대소관계가 와해되기까지 추진되어 검토되었던 제 구상은 주로 서구 내부의 관계, 그중에서도 대서양국가들 간의 관계재건에 그 초점이 맞추어졌다. 미국이 상정하고 있던 전후구상 중에는 자유무역이나 글로벌 거버넌스에 관한 구상과 같이 더 보편적인 것도 있었지만 그러한 보편적인 구상들 역시 서구 민주주의국가 간에 확실히 뿌리 내리고 있는 국가관계나 제도를 기반으로 해서 처음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상정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NATO와 봉쇄를 최종적으로 지지한 대다수의 당국자들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도권이 결국은 서구가 전통으로 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질서에 피드백될 것이라는 이유로 행동했던 것이다.
셋째, '봉쇄정책'과 '유럽의 균형유지'를 옹호한 다수의 당국자들 중에는 서구의 자유주의적인 민주주의 제도들의 보호와 강화에까지 관심을 가진 이들도 있었다.
-285-286
통화질서에 관해 영미가 결정한 '파묻힌 자유주의(embedded liberal)' 구상은 공업국가들 간의 전후관계라는 점에서 기존에 생각해 왔던 것 이상으로 폭넓은 합의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전후 경제질서 속에서 다국 간의 경합적인 정치목적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다고 이해하고 이를 염두에 두면서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브레턴우즈 회담은 중요했다. 그 이유는 이 합의가 비교적 열린 관리적 질서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종래에 비해 광범한 협력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기반으로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 합의는 보수적인 자유무역주의 세력과 새롭게 등장한 경제계획 중시세력 모두에게 지지를 받는 중도적인 합의였으며… 더욱이 지도적인 입장에 있는 공업국가들은 적극적으로 제도를 감독하고 운영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제도와 규칙, 그리고 각국 정부의 적극적인 관여가 필요했다. 전후구축 자체에는 복지국가로서의 새로운 책무를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각국 정부에 부여하는 기능이 있었다. 그 결과 각국 정부는 확대기조의 매크로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사회복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293-294
1949년 시점에서 미 당국자들은 NATO 조약이 안전보장 면에서의 자동적이고 항상적인 보증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유럽 국가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조치에 대해 미국이 지원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NATO 조약은 마셜플랜 전략의 연장이었다. 또한 다수의 당국자들은 통일유럽이 등장할 경우 대서양동맹의 중요성이 감소해 경우에 따라서는 소멸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NATO 조약의 교섭과정 중에는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참가해 구성된 대규모적인 NATO 행정기구나 미국의 장군을 최고사령관으로 하는 통합군사기구를 설립한다는 의도에 대해 한번도 검토하지 않았다.
안전보장 면에서의 구속적인 결속에 관해 중요한 조치가 내려진 것은 1950년 이후였다. 냉전이 악화되어가고 -가장 극적인 사건은 한국 전쟁의 발발과 소련의 원자폭탄개발이었다 - 서구진영의 재군비가 필요해짐에 따라 … 이 시점에서 검토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독일의 재군비를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독일의 정치적 주권을 회복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서독의 국력강화에 대한 서구국가들의 인정 여부는 미국이 유럽 안전보장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의지가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302
실제로 등장한 것은 국제협조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정책과 제도를 기초로 구축된 구미 전후질서였다. 이 질서는 미국이 그 중심에 위치해 미국식의 정치 메커니즘과 조직구성 원칙을 반영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패권적이었고, 정통성을 지니고 호혜적인 상호교류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질서였다.
… 미국이 동맹국가들을 안심시켰던 두 번째 이유는 구조적인 면에 있었다. 미국의 정치시스템이 갖추고 있는 개방성과 비중앙집권성으로 타 국가들은 미국이 행하는 패권형 질서의 운용에 대해 스스로의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미국의 전후질서는 열린 패권(open hegemony), 또는 '침투가능한 패권이었다.
미국의 열린 패권은 제도화된 정치질서의 운용에 대한 미국의 책무 이행의 신뢰성을 높이는 데 공헌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의 요인이 있었다. 첫째 요인은 이 시스템이 갖추고 있는 투명성 그 자체였다. 이 시스템 내에서는 대규모적이고 비중앙집권적인 민주주의국가에서의 정책입안에 많은 행위자가 관여하게 된다. 그 정치과정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치고 비교적 가시적이다. 투명성은 여기에서 창출되었다. 둘째 요인은, 이 질서가 외부의 참가를 인정하고 타협과 합의를 촉진하는 대서양정책입안 과정을 구축한 것이었다. 구미 간에는 명확한 힘의 불균형이 존재했음에도 정치적 영향이라는 점에서는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쌍방향의 흐름이 존재하고 있었다.
-311-312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제도는 안전보장동맹이었다. NATO 동맹을 통해 서독의 부흥과 재통합의 메커니즘이 창출되었는데, 이는 이를테면 '이중봉쇄(dual con-tainment)' 장치였다. NATO 동맹은 미국이 마지못해 행했던 유럽 안전보장에 대한 책무이행을 고정화시키고 유럽 국가들을 하나로 결집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지역통합을 목표로 하는 유럽의 움직임은 더욱 강화되었다. NATO 동맹은 다른 전후제도들과 더불어 '이중봉쇄'라는 다면적인 역할을 지닌 장치로 기능했다.
-315
1945년 이후의 미 당국자들은 국가주의적•제국주의적 경향을 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수의 관계자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최선의 방법은 통합을 장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역통합은 유럽에서 독일을 안전한 존재로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럽을 안전한 존재로 만들 수 있었다. 미 의회가 마셜플랜을 지지한 것 역시 적어도 단순히 미국의 달러를 유럽 에 지원한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거기에서는 유럽통합을 위한 정치 제도와 정치관행의 탄생을 고무한다는 조건이 전제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1948년, 미국은 마셜플랜을 통해 유럽지원을 개시했다. 이때 미국정부는 유럽 국가들이 자금의 배분방식을 정하도록 촉구했고, 이를 계기로 OEEC가 발족했다. 최종적으로 이 기관은 전 유럽을 대상으로 경제부흥을 감독하는 책임을 지니게 되었으며, 유럽 각국이 경제의 공동관리라는 문제에 관해 논의를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경제협력을 담당하는 각국의 부처들은 다른 가맹국의 관료들과 높은 능력을 지닌 국제스태프들로 구성된 그룹에게 엄격한 감사를 받았다. 이 감사를 통해 세계대전 이전의 시대에서는 도저히 인정될 수 없던 중대하고 내정간섭으로 간주될 만한 문제들이 논의되었다.
-318-319
대서양동맹의 중요한 의의는 "단순히 무엇과 대항하기 위한 협력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목표로 하는 협력"이라는 것이었다. 미국의 정치체제가 지니고 있는 투명성과 침투가능성은 확 대경향을 갖는 정치질서를 구축했다. 그 결과 이 정치질서는 다른 공업민주주의국가들로 확대되었는데, 경제와 정치, 안전보장의 각 분 야의 제도로 구성된 중층구조는 서구국가들의 행동을 제약하고 일체 화시켰다. 동시에 이들 제 제도가 갖는 상호적 책무이행의 신뢰성을 높였다. 전후 가장 극적인 변화였던 '힘의 비대칭'은 결과적으로 훨씬 수용하기 쉬운 형태로 바뀌었던 것이다.
-320
(독일이 통일됐을 때에도) 서방국가들은 소련을 안심시키는 데 성공 했다. 서독은 단기간에 통일을 이룬다는 목표를 타국으로 하여금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서방국가들의 제도는 냉전 이후에 생긴 유럽에서의 '힘의 비대칭'의 변동이 일으킬 수 있는 불안정 상태를 극복하기 위한 장치가 되었던 것이다.
둘째, 냉전 후의 미 외교정책의 유형 역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질서구축의 '제도력의 논리'와 합치되어 있었다. 1990년대를 통해 미국은 재차 자국의 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경제와 안전보장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미국은 제도구축을 확대한다는 정책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NATO의 확대와 NAFTA, APEC, WTO의 신설이었다.
마지막으로, 냉전의 종언이라는 새로운 조건이 창출됨으로써 서구 강대국과 일본에서 1945년 이후 전후구축의 내구성에 관한 평가가 가능해졌다. 1945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국제적인 '힘의 분포'에 는 몇 번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서구세계의 질서는 비교적 안정적인 추이였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형성된 전후구축이 지닌 '제도력의 논리' 때문이었다. 주요 국가들은 미국의 힘에 거리를 두거나 또는 그것에 대항해 균형을 도모하려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공업민주주의국가의 정부들 사이에서 관계는 더 규모가 커졌으며 더 강력해졌다.
-332-333
베이커는 고르바초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어느 쪽의 통일 독일을 선택할 것인가? 하나는 NATO에 속하지 않고 완전히 자주적이며 미군이 그 영토에 주둔하지 않는 독일이며, 또 하나는 NATO와의 결합을 유지하지만 현 상황에서 정해진 경계선의 동측에는 NATO의 관할권이 미치지 않아 부대도 주둔하지 않는 독일이다.” 베이커가 모스크바에서 주장했던 내용의 요점은 독일의 군사력을 서구제도에 정착시킨다면 독일의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는 데 바람직하며 더불어 소련의 이익도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겐셔 서독외상은 1990년 1월 연설에서 구동독 영토 내의 NATO군 배치제한 구상을 제기해 서구국가들의 당국자들을 놀라게 했다. 콜 총리는 그 다음 달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부시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을 때 NATO군 이 구동독 영내에 주둔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349
베이커는 9항목 보증(nine assurances) 제안을 준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보증조치에는 통상병기와 핵무기에 관한 새로운 삭감협정의 체결과 핵•화학•생물학병기의 생산과 소유금지에 대한 독일 의 계약, NATO군의 구동독 영내 배치금지에 관한 합의, 그리고 유럽 의 새로운 정세에 따라 NATO의 전략과 대응의 개정에 관한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항목을 다시 패키지화하는 작업은 소련 측의 생각이 변해가는 과정의 일부가 되었다.
1990년 5월, 고르바초프의 워싱턴 방문은 전환점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회담의 서두에서 통일독일은 NATO와 바르샤바조약기구에 가맹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워싱턴에 체재하는 중에 이러한 입장에서 양보해 "모든 국가는 어느 동맹에 가맹할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라고 언명했다. 사실상 고르바초프는 독일이 NATO에 잔류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동의했다. 4대국은 독일이 어느 동맹에 가맹할지에 관해 아무런 지시를 할 수 없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독일이 스스로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당국자들은 소련에게 NATO를 -따라서 NATO에서의 독일의 역할을 - 소련의 불안을 증대시키는 기구가 아니라 반대로 불안을 감소시키는 안전보장체제로 바라보도록 요구했던 것이다.
‘2+4' 교섭 과정은 소련에 '의사표명의 기회'를 부여했다. 이로 인해 소련은 서방국가 정부들에 NATO의 변혁과정을 가속시키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서방국가들은 소련이 안고 있는 난문제를 악용할 의도가 없다는 점, 서구의 안전보장 경제체제하에서의 독일통일이 독일의 재흥을 막는 효과적인 방어책이 된다는 점을 소련 지도부에 전달해 안심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 1989년 12월의 말타 수뇌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미군부대의 계속적인 유럽 주둔이야말로 안정의 원천이라고 발언해 미국 측의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다.
-351-352
10년에 걸친 현저한 경제성장과 냉전의 약화, 외향적 경제정책에 대한 각국의 의견일치, 그리고 유럽과 북미에서의 지역경제협력의 진전 등의 기여로 말미암아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은 지역경제협력 공동체 창설에 흥미를 보였고… 각국은 최종적으로 범태평양공동체의 설립을 목표로 합의에 도달했다. 그 동기 가운데 하나는 미국을 지역적 제도로 편입시킴으로써 미국의 경제정책을 더 예측 가능하도록 만들고 다면적인 지역안전보장으로 이용하려는 것 이었다. 미국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나라는 일본이었다. ASEAN 가맹국들은 지역조직을 확대해 비아시아 국가를 가맹시키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일본의 설득을 받아 들였다. 미국으로부터 강력한 무역자유화 압력을 받고 있던 일본은 무역에 관한 논의의 틀을 확대시켜 미국의 단독주의적인 경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APEC이 유용한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에는 동유럽의 새로운 시장개방으로 인해 미국과 일본의 자본의 흐름이 변할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다. 북미와 유럽 지역에서의 지역주의 고조에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불안을 감출 수 없었으 며, 이 불안감은 각국으로 하여금 미국의 관여를 고정화시키고 안정된 지역체제를 설립하도록 만들었다.
-366-367
지금까지 전개해온 논의를 통해 '힘에 대한 대가‘가 적고 '제도에 대한 대가'가 많은 형태에 속하는 정치질서가 안정적인 질서가 되는 경향을 띤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근대사회의 발전의 결과로 생긴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불평등의 제도화'이다. 즉, ‘포함과 배제’, ‘권리와 대가'라는 카테고리의 탄생이다. 이는 특정한 영역에서 불평등을 영속화시키는 한편 불평등에 한도를 설정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국제관계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세계경제가 본질적으로 진화해 세계 각국이 부와 테크놀로지, 그리고 경제성장을 순환시켜 그 분배를 획득할 때, 더욱이 그 과정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질 때 어느 한 국가가 어느 순간에 이익과 우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해도 타국에 있어 받아들이기 쉬워진다. 패전국은 언젠가 자신들에게도 순번이 돌아올 것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각국은 모두 몇 가지의 영역에서는 승자가 되고 또 다른 몇 가지의 영역에서는 패자가 된다.
-404-405
‘제도로부터의 대가'는 질서 내에 구축된 제 제도의 성격과 그 제 제도가 운용되는 정치적 환경에 따라 크게 다르다. 국제협조적인 민주주의국가들 간에서 구축된 다국 간 제도는… 상호의존성이 창출되어 관계 확대로 이어지기 때문에 제도적 전환은 훨씬 어려워진다. 여기에서는 자율적인 피드백 회로가 확립되어 있다. 사람들이나 조직은 신설된 조직이 앞으로도 장기적으로 존속되리라 확신하고 이러한 제 제도와 협조해야만 한다고 생각해 스스로의 생활과 활동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제도의 복잡성과 적합성, 그리고 자율성이 높아지면 제도의 내구성은 더욱 증대해 '힘에 대한 대가'를 감소시키려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제도가 복잡해지면 제도의 각 부분과 각 층은 다면화되고, 제도에 부여된 과제와 기능적 관계는 확대되는 동시에 이 제도 내에서 활동하는 개인과 그룹은 분극화되며 다양화된다. 제도가 보여주는 자율성은 그 제도가 제도의 운용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계급이나 이익집단의 명령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이다.
-406-407
제도들의 배후에서 힘이 그 모습을 드러낼수록 힘은 더 강한 반응과 저항을 받게 된다는 결론이 도출될 것이다. 미국의 지도자들은 자국을 억제와 책무이행으로 제한 하는 동시에 분규 발생에 대해서는 양면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면, 미 의회가 1988년에 가결한 '슈퍼 301조 (Super 301)'로 미 정부는 불공정무역을 행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외국정부에 대해 일방적으로 제재조치를 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96년, 클린턴 미 대통령은 이른바 ‘헬름스 버튼법'에 서명했다. 이 법률로 미 정부는 쿠바정부가 접수한 쿠바 국내의 공장들 을 사용해 생산을 하거나 아니면 무역을 행하고 있는 외국기업을 처벌할 수 있었다. 유럽과 캐나다, 그리고 멕시코의 당국자들은 이 법률이 무역에 관한 국제법에 위반된다고 비난했다.
-411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틴 울프,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 (5) | 2024.09.30 |
---|---|
에릭 울프,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1) | 2024.05.04 |
박건영, <국제관계사> (0) | 2024.04.08 |
E H 카, < 20년의 위기> (0) | 2024.04.07 |
차태서, <30년의 위기> (0) | 2024.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