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의 위기>
E H 카, 김태현 편역. 녹문당. 3/16
E H 카가 전간기에 쓴 글과, 2차 대전 직후에 쓴 글을 함께 묶었다. 이상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의 국제정치학을 현실주의로 견인해온 학자라고 하지만, 카가 말하는 것은 ‘두 날개가 모두 필요하다’ 쪽에 가깝다.
아주 재미있었다. 명료하고, 날카롭고.
전쟁은 여전히 군인들의 문제였고 국제정치는 외교관들의 문제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와 같은 경향은 끝이 났다. 전쟁은 더 이상 직업군인들의 일만이 아니게 되었고 국제정치가 직업외교관들의 손에 의해 안전하게 관리될 수 있다는 생각도 사라졌다.
(뚜렷한 물증 없이) 밀실외교가 전쟁의 원인이라고 생각한, 주로 영미의 대중은 국제정치를 대중화하려는 운동을 선도했다. 그러나 밀실외교가 성행했던 이유는 정부가 굳이 국민들 몰래 모종의 일을 하려는 나쁜 의도를 가져서가 아니라 시민들이 무관심했기 때문이었다고 해야 옳다.
-20
인간의 행태에 대해 연구하는 정치학에서 그와 같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연구자는 대개 정치현실의 어떠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다. 그는 문제를 야기하는 요인들 중 하나로 인간이란 모종의 조건에서는 통상 모종의 방식으로 대응한다는 '사실'을 찾아낸다. 그러나 정치학에서 찾는 '사실'은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의지에 의해 변경될 수 있다. 자연과학과 달리 사회과학에서 목적은 연구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연구의 목적이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사실인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사실을 찾는 연구자와 행동절차를 찾는 현실 정치인의 역할은 별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두 역할은 서로 맞물려 돌아간다. 목적과 분석은 동일한 과정의 서로 다른 부분일 뿐이다.
따라서 분석과 목적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러나 정치적 사실 혹은 정치현실을 구성하는 것은 직업정치인이나 정치학자들의 생각만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 정치학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리는 판단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그리고 특히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정치적 판단은 그 대 상이 되는 사실을 변경할 수 있다. 정치적 생각은 그 자체로서 정치행위이다. 정치학은 정치적 ‘현실'(what is)에 대한 학문인 동시에 정치적 ‘당위'(what ought to be)에 관한 학문이다. 곧 정치학은 '과학’인 동시에 ‘철학'이다.
-22-23
정치적 유토피아는 정치적 현실을 무시하고는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단 이 사실을 깨닫고 나면 과학의 특징인 현실에 대한 어렵고 무모한 분석을 시작한다. 그리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사실의 하나는 바로 "세계정부"나 "집단안전보장"을 원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스스로 그것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그 의미는 서로 다르고 또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학문을 낳은 목적 그 자체가 바로 분석의 핵심대상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과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29
사회도덕이론은 곧 지배집단의 작품이다. 국제 도덕이론도 마찬가지로 지배국 혹은 지배국들의 산물이다.
지배집단의 이익에 대한 도전은 곧 사회 전체의 이익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결과적으로는 도전자 자신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 된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특권 집단의 전체 사회 내에서의 지위가 압도적이어서 이들의 몰락이 사회 전체의 몰락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이 되는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익의 조화라는 자연법칙이 일말의 현실적 타당성을 가지는 한 특권집단은 압도적인 힘으로 이 원칙을 창출하고, 결과적으로 도덕이 곧 힘의 산물이라는 마키아벨리적인 격언의 탁월한 사례로 나타나는 것이다.
-112-113
국내정치에서 "민족단결"이라는 구호는 항상 지배집단이 사회에 대한 그들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창한다. 16세기에 영국은 교황청과 신성로마제국의 국제주의 주장에 대해 막 발아하기 시작한 민족주의로 맞섰다.
국제주의에 대한 독일의 반감은 영국과 프랑스가 그들의 우위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하고자 한 1919년 이래 더욱 높아졌다.
… 수사의 변화는 마음이 변해서가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가 국제주의를 주창할 만큼 충분히 강해졌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음을 반영하는 증거였다. “국제 질서”와 “국제단결"은 앞으로도 늘 강자들의 슬로건일 것이다.
현실주의에 항변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현실주의적 비판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현실주의는 사람들이 원칙에 충실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원칙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시점에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한 국가이익에 기초한 국가정책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추상적 원칙들을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에 적용하는 순간 그것이 이기적인 기득권의 위장에 불과함이 드러나고 마는 것이다. 이상주의가 붕괴한 것은 그 원칙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문제에 대한 절대적이고 불편부당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119-121
모든 건전한 정치사상은 이상과 현실 모두에 기반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상주의가 공허하고 특권층의 기득권을 대변하는, 참을 수 없는 겉치레가 되면 현실주의는 그 가면을 벗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순수한 현실주의는 적나라한 권력투쟁 외에는 대안적인 모습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제사회란 불가능해진다. 현실주의라는 무기로 오늘날 유행하는 유토피아를 파괴하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우리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않을 수 없다.
목표와 제도, 즉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 럼 정치적 사고에 장애가 되는 것은 없다. 이상과 현실 간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 어떠한 이상도 제도화되면 더 이상 이상이 아니라 이기적인 이해관계의 한 표현으로 전락하여 새로운 이상에 의해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양립할 수 없는 세력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바로 정치이다.
-128-129
모종의 국제정부를 설립하려는 모든 시도는 권력이 정치의 핵심부분임을 이해하지 못한 데 기인한 것으로, 문제의 논의에 많은 혼란이 초래되었다. 권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통치수단이다. 통치를 국제화하는 것은 결국 권력을 국제화하는 것과 같다.
국제적 통치와 권력의 문제는 주로 위임통치나 일부 혹은 모든 식민 영토가 "국제화"되어야 한다는 제안에서 보다 첨예하게 드러난다. 문제는 장기적 정책을 수립하는 항구적 정부가 아닌, 전쟁 중 혹은 공동조약을 실 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합국간에 시행된 한시적 국제협력의 경우이다. 팔레스타인 정책에서 핵심 사안은 군사력이 얼마나 필요한가였고 따라서 이를 결정하는 것은 군사력이 없는 위임통치위원회가 아니라 군사력을 제공하는 영국이었다.
-146-147
민족주의는 일단 민족의 단합과 독립이라는 최초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거의 자동적으로 제국주의로 전개된다.
안보를 목표로 한 전쟁은 곧 침략과 팽창을 위한 전쟁으로 바뀐다. 1898년 미국의 매킨리 대통령이 스페인에 대항하여 쿠바에 개입하기로 한 것은 "스페인 정부와 쿠바 인민들 사이의 적대관계를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종식시키고 쿠바에 안정된 정부를 설립"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 필리핀의 합병이라는 팽창에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거의 모든 나라는 처음에는 이를 자위를 위한 전쟁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연합국 쪽에 강했다. 그러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모든 연합국 정부는 전쟁의 목적에 적국으로부터 영토를 획득하는 것이 포함된다고 선언했다. 오늘날 제한된 목적을 위한 전쟁은 제한된 책임을 지는 전쟁처럼 거의 불가능하다. 집단안보이론의 오류 중 하나가 바로 전쟁이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는 구체적이고 제한된 목적으로 수행될 수 있다고 믿은 데 있다.
-152
오늘날 시장과 이에 부수적으로 따르는 정치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결국 물물교환의 또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상호무역협정이다. 영국이 아르헨티나에서 육류와 시리얼을 구매하고 덴마크를 비롯한 발트해 지역국가로부터 베이컨과 버터를 구매한 것은 이 들 국가에 영국의 석탄과 공산품 시장을 확보하고자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렇다 할 시장이 못되는 중유럽과 발칸반도에서 독일이 (주로 시리얼과 담배로 구성된) 그 지방의 생산품을 굳이 구매한 것은 독일산 물품에 대한 시장확보 이상으로 정치적 영향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당시 이 지역에서의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력이 인위적이었다는 증거의 하나는 이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교역이 보잘것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구매력은 국제적 자산의 하나가 되었다. 가격이 더 이상 핵심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생산자가 아니라 구매자가 곧 주인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구매력이라는 새로운 권력요소는 생활수준이 높고 인구가 많은 나라가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169-170
국제통상과 금융 분야에서 미국의 힘이 증대한 것이 바로 미국이 전통적으로 취해 왔던 정책, 즉 중남미의 여러 나라의 영토에 해병대를 보내는 대신에 소위 ‘선린’ 정책을 취하게 되었던 이유의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다.
요는 이와 같은 논리를 소위 "침략"과 영토적 합병의 문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19세기 동안 누려왔던 해군력과 경제력의 우세로 인해 영국은 중국에서 최소한의 군사력과 경제적 차별만으로도 압도적인 지위를 구축할 수 있었다. 러시아와 같이 상대적으로 약한 나라들은 노골적인 취락과 합병을 통해서만 비슷한 결과를 바랄 수 있었다. 일본도 후일 이와 같은 교훈을 깨달아 시행했다.
영국은 이집트의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면서도 군사적 및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약한 강대국은 합병의 형식을 통하고도 그 효과는 오히려 작은 경우가 있었다. 영국은 이라크에서 공식적 식민지배의 형식을 포기하고서도 그 나라에서 자국의 이익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같은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따라서 경제적 무기는 압도적으로 강한 나라의 무기이다.
간접적인 경제통제가 직접적인 정치적 지배보다 낫고 따라서 비교적 덜 비도덕적이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것은 설사 미국이 경제적으로 독일과 같은 입장에 있었더라면 마찬가지 행동을 취했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더라도 변함이 없다. 요는 도덕 그 자체도 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172-173
인간 세상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 정치사상은 대개 보편적 원칙에 기반하게 마련이고 따라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국제적 성격을 띤다. 프랑스 대 혁명의 사상, 자유무역이론, 1848년에 태어나고 1917년에 부활한 공산주의, 유태주의, 국제연맹주의 등은 모두 처음에는 권력에서 분리되고 국제적 프로파간다에 의해 지지된 국제여론의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따지고 보면 그러한 첫인상과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사상이 국가적 색채를 띠고 또 국가권력에 의해 지지되지 않았을 때 정치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일까?
1789년의 혁명정신을 유럽전역에 전파시킨 것은 나폴레옹의 군사력이었다. 자유무역이론이 정치적 힘을 얻게 된 것은 영국이 정책으로 채택한 이후의 일이다. 1848년의 혁명가들은 정치적 세력을 모으는 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혁명사상 자체가 사라졌다.
-18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다른 무엇이 있다. 국가는 다른 집단과 다른 정서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그 활동영역이 보다 넓고 개인으로부터 보다 큰 충성심과 희생을 요구한다. 국가에 좋은 것은 그 도덕성을 주장하기에 큰 어려움이 없다. 만일 우리가 국가를 위해 기꺼이 죽을 용의가 있다면 이는 곧 국가가 세상의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가는 도덕적 의무를 넘는 자기보존의 권리를 가진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국가에 적용되는 도덕기준이 다른 집단인격체에 적용되는 도덕기준과 다른 핵심적인 이유가 있다. 곧 국가는 정치권력의 정점에 있어 국가에게 도덕적 행위를 강요할 상위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반면, 다른 집단의 경우 최소한 국가로부터 도덕적 행위를 강요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두 가지 논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국가는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자구책을 취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 모든 국가가 같은 기준을 따르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결국 국가의 도덕성에 큰 기대를 걸 수 없는 이유는 국가가 자주 비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현실이고 그렇다고 해서 도덕적 행위를 강제할 수 있는 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205-206
법이란 정치사회의 한 기능이고, 따라서 그 발전도 사회의 발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법의 역할은 결 국 그 사회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정치적 전제에 의해 결정된다. 요컨대 국제법을 강화함으로써 사법적으로 해결이 가능한 국제분쟁의 범위를 확장하는 것은 법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이다. 특정한 문제가 법적 해결의 대상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법적 원칙’은 없다.
많은 국가사회에서 인정되고 있는 법에 의한 지배라 는 원칙과 여러 법적 제도가 국제법에 도입될 수 있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법적 원칙은 없다. 유일한 기준은 현재 국제사회의 정치적 발전 단계가 법의 지배 혹은 법률제도를 도입할 정도에 이르렀는가를 따져 보는 것일지 모른다.
-252
현상의 유지는 결코 항구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정책이 아니다. 마치 경직된 보수주의가 혁명을 낳듯이 전쟁을 초래할 뿐이다. "침략에 대한 저항"은 일시적 정책도구로서 필요할 지 몰라도 해결책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평화적 변경의 방법을 수립하는 일은 국제도덕과 국제정치의 근본문제인 것이다. 평화적 변경을 권력관계의 변화에 대한 조정으로 보는 현실주의적 견해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입장에 따르면 가장 큰 힘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들이 통상 평화적 변경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힘을 키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에 있어서는 평화적 변경이란 정의에 대한 공통된 인식이라는 이상주의적 관념과 변화한 세력균형에 대한 기계적 적응이라는 현실주의적 관념의 타협점 위에서만 가능하다.
-279
1919~39년간 위기의 특징은 첫 10년간에는 온갖 희망에 차 있다가 그 다음 10년간에는 엄청난 절망으로 급전직하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현실을 무시한 이상에서 이상을 잃은 현실로 급작스럽게 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283
전체주의의 등장은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전체주의는 질병이 아니라 그 증상일 뿐이었다. 위기가 치닫는 곳 어디에나 이와 같은 증상을 남겼다.
유토피아의 붕괴의 두 번째 비극은 좀더 미묘한 것으로 첫 번째 비극보다 먼저 일어나 그 비극을 더욱 강화시켰다. 19세기 후반부에 이미 강화되고 있던 갈등에 의해 이익의 조화가 위협받고 있었지만, 세계의 합리성은 <진화론>(Darwinism)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해 유지되었다. 1919년 이후에 국제관계를 합리화하고 정당화시키기 위해 이와 같은 구식의 논리를 고집한 것은 파시스트와 나치밖에 없었지만, 논리적으로 애매모호하고 그 결과에서 치명적인 편의주의에 안존하기는 서방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익의 조화가 붕괴함에 놀라고 그 진화론적 변종에 충격받은 서방국가들은 강자의 정의가 아닌 부자의 정의라는 바탕 위에 새로운 국제 도덕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제도화된 모든 유토피아가 그렇듯이 이 유토피아도 기득권층의 도구가 되어 현상유지를 위한 보루로 악용되었다.
개별 국가의 선을 세계사회의 선과 조화시킬 수 있는 해결책을 새로이 찾아야만 한다. 국제도덕은 이제 용광로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284-285
국제정치가 오늘과 같은 형태를 띤 것은 그 단위가 민족국가이기 때문이다. 미래 국제질서의 형태는 이 집단단위체의 미래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지금 막 막을 내리고 있는 역사의 한 시기는 프랑스 대혁명에서 비롯되었다. 이 혁명의 핵심은 인간의 권리였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개인간의 평등에 대한 요구였다. 19세기에 들어와 이 요구는 사회집단간의 평등에 대한 요구로 바뀌었다.
1914년 이전에 이미 서유럽에서는 계급 간의 평등이란 문제가 민족간의 평등문제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평등을 위한 투쟁은 정치권력의 통상적 법칙에 따라 지배를 위한 투쟁과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919년 이후 국제정치가 압도적 중요성을 띠게 된 기본 이유이다. 19세기에는 서유럽 국가들 내부에서 있었던, 누리는 자와 못 누리는 자, 기존질서의 옹호자와 혁명가들 간의 갈등이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국제사회로 전이되었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가 계급이 그렇다고 잘못 믿었듯이 민족을 인간사회의 궁극적 집단단위라고 잘못 믿어서는 안 된다. 또한 이것이 정치권력의 핵심으로서 기능하기에 최선인가, 최악인가를 굳이 따질 필요도 없다. 우리가 스스로 물어야 하는 것은 다른 어떤 집단단위가 민족을 대신할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무엇이 그 대안이 될 것인가이다.
-286-287
국제적 조정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궁극적인 길은 경제회복의 길에 있는 것 같다. … 노동자들은 실업문제가 경제적으로 실속이 없는 군비지출로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용이 이윤보다, 사회의 안정이 소비수준의 증가보다, 그리고 공평한 분배가 최대한의 생산보다 중요해진 것이다.
권력이 국제관계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한 다른 모든 이득을 군사적 필요에 종속시키는 것은 위기를 악화시키고 전쟁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강화시킬 것이다. 국가경제에서 이윤 동기를 점차 제거하는 것은 외교정책으로부터도 이윤동기를 제거하는 것에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산업을 보조하면 할수록, 또 고용의 창출이 최대한의 이윤보다 중요한 경제정책의 목표가 될수록, 그러한 사회적 목적이 한 국가 내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나라 지방의 복지도 고려하는 일이 쉬워질 것이다. 국가정책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은 결국 국제정책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297-298
<민족주의와 그 이후>
1914년의 세계대전은 사회화된 민족간의 최초의 전쟁이었고, 최초의 '총력전'(total war)이었다. 전쟁이 정부와 군대만이 수행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조용히 그러나 결정적으로 사라졌다.
-323
역설적이지만 전쟁 그 자체에서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무조건적 민족주의가 어느 정도 완화되는 징후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 독일을 포함한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민족주의적 열망이나 광분이 없었다는 것이 그 하나다. 이 점은 1914년에 팽배했던 애국주의적 열정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또 민족간의 증오도 전처럼 노골적이지 않고 이데올로기의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히틀러의 민족주의도 시간이 흐르면서 "독일"이라는 색채를 잃고 "아리안" 혹은 노르딕 민족주의로 이름지어졌다.
1940~41년 히틀러가 승승장구하던 시절, 정치적 전쟁은 곧 민족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징표이자 그 원인이었다. “히틀러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그의 극단적 민족주의 때문이 아니라 그 주변국에서 민족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 게 꿰뚫어 본 때문이다."
보다 광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또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승리의 주역이 된 나라 중 과거 의미에서 민족주의적인 나라는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세계정치에 새로이 등장한 두 거인, 미국과 소련이 국가명에 민족의 이름이 포함되지 않은 다민족 국가라는 점이다.
-330-331
자유와 마찬가지로 평등도 개인의 권리이지 민족의 권리가 아니다. 민족간의 평등은 결코 달성할 수도 없거니와 정당한 것도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개인간의 평등이라고 해서 전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끊임없는 목표의 하 나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하나의 이상일 뿐이다.
미래의 국제 질서는 헌법에 따른 상호권리와 의무를 지는 자유롭고 평등한 민족으로 구성되는 사회일 수가 없다. 미래의 평화수립자들이 추구해야 할 자유와 평등은 민족의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개인들의 일상생활에서의 자유와 평등이어야 한다.
미래의 국제질서를 이끄는 힘은 민족과 상관없이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그들의 복지를 증진하기 위한 공동의, 또 상호적인 의무에 대한 신념에 기초해야 한다. 인류의 일체성에 대한 정서는 모종의 보편적 원칙과 목적에 대한 공동주장을 지지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세계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기구를 지지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
-337-338
전간기에 약소국들은 대체로 두 가지 대안이 있었다.
하나는 과거와 같은 무조건적 중립정책으로 복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단안전보장"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택하는 것이었다. 집단안전보장 혹은 집단안보란 공격국가에 대항하여 모든 국가가 피공격국가를 원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둘은 모두 비현실적이다. 무조건적 중립이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네덜란드, 벨기에, 노르웨이, 덴마크, 그리스 등은 모두 전쟁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였지만 침략이나 점령을 받는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또한 집단안보도 마찬가지로 실현불가능하다.
-346
군사적, 경제적 조직을 가진 다민족 단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민족단위의 행정 및 문화공동체의 유지 및 확장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하여 생성된 중첩되고 서로 맞물린 복합적 충성의 체계야말로 전체주의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다.
세계안보기구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3대 강국[당시 미국, 소련, 영국]이 승인하고 지원하기로 합의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이 기구가 강대국들간의 전쟁을 막을 수 없는 것도 명백하다. 그러나 이러한 기구 또한 권력을 남용할 위험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권력이 남용될까봐 정치적 권위를 무능의 수준까지 끌어내리면 결국 무정부상태 외에는 대안이 없는 것이다.
-350
민족이나 언어를 기준으로 배타성을 유지한 정치단위가 아니라 이상을 공유하고 그것이 세계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소망에 따라 조직된 정치단위는 과거에 비해 커다란 진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들이 서로를 미워하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고 앞으로도 어떠한 형태로든 나타날 수 있지만, 대규모의 다민족단위가 등장하고 그 힘과 영향력을 늘려나가면서 민족을 근거로 한 증오는 점차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355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켄베리, <승리 이후> (0) | 2024.04.14 |
---|---|
박건영, <국제관계사> (0) | 2024.04.08 |
차태서, <30년의 위기> (0) | 2024.03.16 |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 (0) | 2024.03.16 |
케네스 월츠 ‘인간 국가 전쟁’ (0) | 2024.03.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