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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소련사

딸기21 2023. 9. 17.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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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짧은 소련사
실라 피츠패트릭. 안종희 옮김. 롤러코스터



간략하지만 균형잡힌 평가와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들어있는 책. 정치적 변화를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보았고 사회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사회적 맥락을 설명한 부분들도 흥미롭다. 넘나 훈늉한 책.



새로운 연방의 헌법은 각 공화국에 연방 탈퇴의 자유를 부여했지만 약 70년 동안 어느 국가도 이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러시아제국 몰락 후 잠시 독립했던 중앙아시아 5개국(우즈베키스탄,투 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이 1920 년대와 30년대에 소련에 추가로 병합되었다. 트랜스코카서스 소비에트연방 공화국은 다시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되었다. 1939년 발트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과 몰다비아가 1939년 독일-소련 조약에 포함된 비밀 조항에 따라 소련에 병합되어 이 연방에 속한 국가는 총 15개국이 되었다.
소련은 분명히 러시아제국을 계승한 국가였다. 소련 역시 제국이 되려고 의도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볼셰비키당 지도부 중 다수는 러시아인이 아니라 옛 러시아제국 치하에서 억압받던 소수민족인 라트비아인, 폴란드인,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과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아시아 지역의 식민지 주민을 해방하는 일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졌다. '러시아의 광신적 민족주의가 '가장 큰 위협이라는 1920년대의 슬로건은 소련의 모든 민족주의 가운데 가장 치명적인 것이 러시아 민족주의라는 뜻이었다. 볼셰비키의 전략은 비러시아인의 민족주의를 권장하는 것이었다. 소련의 행정 체계가 각 민족의 정체성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 소련 통치의 역설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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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지역에서는 독일과 이후 폴란드의 군사적 침략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볼셰비키, 무정부주의자, 백군이 불안정한 정권을 수립했다(수도는 키이우였고 1년도 안 되는 기 간에 집권 세력이 다섯 차례 바뀌었다). 1918년 중반 멘셰비키가 조지아에서 집권하고 오스만튀르크• 아르메니아와 싸웠다. 볼셰비키는 영국에 의해 지도자들이 처형된 바쿠에 코뮌을 설치했다. 볼가공화국이 열차 몇 대 분의 무장한 체코인 전쟁포로들(사회주의자들이었지만 볼셰비키에 반대했다) 덕분에 사마라에 설립되었지만 단명했다. 체코인 전쟁포로들은 세계를 일 주하여 서부전선에 있는 연합군에 합류하기 위해 태평양에 면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던 길이었다. 일본은 러시아 연해주와 시베리아로 수만 명을 파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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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열강은 중대한 순간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철수한 러시아를 용서하지 않았다. 독일과 동부 유럽에는 러시아를 장악한 거친 남자들이 한 무리의 유대인이라는 이야 기가 은밀히 유포되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볼셰비키는 이런 소문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유럽 서부 지역의 젊은 유대인들은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로 몰려들어 많은 수가 공산당에 가입했다. 유대인은 라트비아인 다음으로 공산당에서 대표자 비중이 지나치게 큰 민족이었다. 1921년 의결권을 가진 정치국원 5명 가운데서는 유대인이 3명(트로츠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조지아인이 1병(스탈린)이고 러시아인은 1명(레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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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러시아계 공화국 및 지역들에서는 역사적으로 이슬람교가 지배한 중앙아시아의 통합이 주요 과제였다. 전통적인 관습과 소비에트 관습이 대립했는데, 중요한 쟁점은 여성의 베일을 없애는 문제였다. 소비에트의 민족 정책은 '후진적인' 민족 집단(가령 우즈벡인과 바시키르인)과 문화적 차원에서 러시아인과 비슷하거나 우위에 있는 민족(가령 우크라이나인, 조지아인, 유대인)을 구별했다. 하지만 어디서나 '현지화 정책'- 현지 언어의 사용, 현지 출신 간부 교육과 승진 -이 표어로 제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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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숭배와 함께 또 다른 해로운 숭배가 강하게 자리잡았다. 당과 당 '노선'의 무오류성에 대한 숭배였다. ‘당은 항상 옳다'는 말이 주문처럼 되었다. 존경받는 노장 볼셰비키들은 전당대회에서 야유하고 휘파람을 부는 지역당 대표들 앞에서 자신이 내놓은 반대 의견에 대해 비굴하게 용서를 구해야 했다. 1925년 지노비예프 반대파에 합류한 크룹스카야는 아주 예외적으로 지역 대표들로부터 야유를 받지 않았고, 사과를 거부했으며, 당이 잘못을 범할 수 없다는 사상을 조롱했다. 오직 레닌의 아내만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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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세비키들은 프랑스혁명 때처럼 '혁명이 자신의 아이들을 잡아먹는 것'(이를테면 당내 반대파들을 무기로 테러를 자행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에는 강하게 반대했다. 레닌 통치기에는 정책 갈등에서 패한 사람들이 당에서 강제로 축출되지 않았고, 체카와 그 후신인 GPU는 당의 지도자들을 모두 그대로 두었다. 이런 방침이 바뀐 것은 1927년 말이었다.
트로츠키의 유배지는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였다.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모든 책과 문서를 소지하는 일(나중에 하버드대 와이드너 도서관에 소장되었다)이 허용되었고,다른 지역으로 추방당한 동료들과 폭넓게 서신을 교환했다. 2년 뒤 (1929년 2월), 당의 전통과는 매우 이례적으로 그는 혁명 반역자로서 고국인 소련에서 강제 추방되었다. 11년 뒤, 그는 스탈린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멕시코에서 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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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에게는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지도한다거나 내전 당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적군을 만드는 것과 같은 탁월한 업적이 없었다. 레닌의 '유언장‘에 기록된 질책은 스탈린에게 상당한 정치적 난관이 됐다. 트로츠키가 나중에 주장했듯이 스탈린은 '관료제가 만든 인물'이었고, 레닌이 병에 걸렸을 당시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무례함을 사과할 때 스스로 인정했듯 '상스러운 사람'이었다.
1990년 소련 역사 기록물이 공개되기 전까지 역사가들에 의해 널리 언급됐던 트로츠키의 경멸은 심각할 정도로 빗나갔다. 스탈린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우둔하지도 않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1920년대 정책 논쟁에서 더 빛나는 역할을 했다면, 성공적인 미래를 위한 단순명료한 결론을 내린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레닌은 10월의 정치혁명에서 당을 지도했지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경제혁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 았다. 스탈린은 경제혁명을 지도할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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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사후 소련 정치인들은 비난의 대상은 집단화 자체가 아니고 그것의 '과도함'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과도함이야말로 집단화 정책의 일부였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대기근이 우크라이나인을 죽이려던 스탈린의 의도적 계획으로 인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러시아 남부지역과 카자흐스탄에서도 똑같이 파괴적인 결과가 발생했다.
스탈린은 농민을 죽이려 했다기보다, 농민들이 봄 파종까지 생존할 수 있는 양만 남기고 최대한 많은 곡식을 확보하려 했다. 문제는 누구도 그 양이 얼마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농민들이 속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죽어간다는 것을 스탈린이 알았을 때는 너무 늦었다. 기아 사망자(수십 년 후까지 소련은 인정하지 않았다)는 500만 명 이상이었다. 기근은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반세기 동안 공식 적으로 언급되지 않다가,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우크라이나 당서기 볼로디미르 셰르비츠키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 국 건설 70주년 기념식에서 침묵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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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적인 배반자 제거, 외국 스파이 체포, 정부 내 죽은 나무 제거, 1930년대 초에 훈련받은 새로운 집단의 승진 기회 보장 등 그 이유가 무엇이든 군 사령관, 당 중앙위원회, 정부 내각, 산업계 고위 지도자들을 대거 처형할 이유로는 부족한 것 같다. 아마도 볼셰비키가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혁명 내부에는 혁명이 끝날 때 자기 자녀를 잡아먹게 만드는 취약한 내적 논리가 분명히 존재하는 듯하다.
러시아혁명과 그 이후의 접단화 과정에서 보듯이 공포가 더 많은 공포를 낳는다는 논리도 존재한다. 확실히 당과 일반 국민 중에는 불만을 감춘 사람들이 많았다. 대숙청이라는 무차별적인 방식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적들을 제거하는 수단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70만 명의 반혁명 분자'를 처형하고 100만 명 이상을 굴라그로 보낸 것은 너무 큰 대 가였다.
대숙청 이후 당, 정부, 군, 보안대 등 모든 기관의 고위 지도부는 대부분 초보자로 채워졌다. 전체적으로 그들은 더 젊고 더 잘 배운 탓에 전임자들보다 업무를 더 잘 수행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수년간의 거짓 경고에 이어 마침내 전쟁이 실제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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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침공 이후 일주일 만에 스탈린은 혼자 모스크바 외곽 별장으로 피신했고,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전화도 받지 않았다. 레닌이 1925년 '유언장'에서 스탈린을 거칠게 비난한 뒤 정치적 곤경을 맞은 상황에서 보였던 모습과 똑같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시 미코얀에 따르면, 정치국 대표단이 별장에 도착하자 스탈린은 그들이 자신을 체포하러 온 줄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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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전쟁은 남자들의 게임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내전 시기와 는 대조적으로 여성들이 국내 전선의 중심축으로서 크게 기여했으며, 공산당 내 여성 대표 비중도 약간 증가했다(1945년에 18퍼센트에 이르렀다).
'손위 형' 같은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비슬라브 민족들의 공헌은 전쟁 시작 몇 개월 뒤 정당하게 인정받았다. 물론 독일군 점령 지역은 사정이 달랐다. 독일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 남부지역에서 많은 협력자를 찾았다. 스테판 반데라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에 속한 기동 부대는 점령 지역인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했고, 독일인들과 함께 이주했던 카자크인 타타르인•칼미크인 등은 전쟁 막바지에 독일군 신병 모집에 많이 참여했다. 소련군이 코카서스와 크림반도를 재탈환했을 때 체첸족과 크림 타타르족을 비롯한 몇몇 소수민족들은 '반역한 민족'으로 선포되었고, 베리야의 무자비하고 효율적인 작전을 통해 중앙아시아로 추방되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 중 하나는 카자흐스탄과 같은 다민족 지역이 이전보다 더 다양화되어, 반항적인 체첸족과 (전쟁 초기에 불가 지역에서 추방된) 근면한 독일인이 지역 내 카자흐족 그리고 오래전에 정착한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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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 이후에 들어온 '1938년 입당 동기‘에는 젊은 관리자와 전문가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전에 입당한 당원들보다 교육 수준이 높았다. 전시 징집으로 형성된 그들의 동지애 정신은 당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전후 몇 년 동안 국가 예산이 확대되면서 사회복지, 교육, 공공보건 분야 지출도 늘어났다. 인구당 의사 수가 1940년대에 2배로 증가했고, 1950~60년에 또 3분의 1이 늘어나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다.
스탈린 통치기 말년에 모스크바 국립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운이 좋았던 사람들- 고르바초프와 그의 아내 라이사-은 자신들이 전쟁 승리 후 소련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완수하여 전쟁 이전의 결핍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특권 집단이라고 여겼다. 고르바초프 집단은 항상 그들의 청소년기를 희망과 지적 발견과 이상주의의 시기로 회상했다. 미국학은 모스크바의 여러 대학에서 특별히 매력적인 학과였고, 스탈린의 딸인 스베틀라나와 다른 정치국원들의 딸과 같은 신세대들은 이 학과에 들어가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푹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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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하는 척하고 그들은 우리에게 임금을 주는 척 한다"라는 농담은 소련이 아니라 서구 언론인들에게서 더 유행했다. 소련이 붕괴했을 때 소련 시민들이 깨달았듯이 소련의 직장은 낮은 생산성에 관대한 것 이상의 여러 장점이 있었다. 경제학자들이 노동 생산성 대신 직장에서 느끼는 행복 수준을 측정했다면 더 나은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브레즈네프 시대는 평범한 소련 시민들에게 좋은 시기였다. 물론 불평등이 있었고, 소련은 불평등이 없는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비교할 때 불평등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확대되는 추세도 아니었다. 소련의 중산층은 특권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너무 적었다. 전후에 전반적으로 개선되었던 생활수준이 1970년대와 1980년대 에 침체하자, 이전 수십 년 동안 기대감이 극적으로 상승했던 사람들 사이에 은연중에 불만이 쌓이는 충분한 근거가 형성되었다.
-213

그는 자신을 지식계급으로 생각한 최초의 소련 지도자였으며, 지식인이라는 정체성은 그의 아내이자 사회학자였던 라이사에게도 똑같이 중요했다.
페레스트로이카(재건)와 글라스노스트(개혁과 개방) 중 고르바초프가 우선시한 것은 글라스노스트였지만 재건을 우선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는 거의 같은 시기에 (여전히 소련과 관계가 소원했던) 중국의 덩샤오핑이 선택한 것과 반대였다. 덩샤오핑의 아들이 말하길, 경제개혁을 정치개혁보다 앞세우지 않은 고르바초프를 덩샤오핑은 '바보'라고 생각했다. 소련과 중국의 개혁 결과를 비교할 때 이 말은 타당한 판단인 것 같다. 하지만 고르바초프의 판단 역시 당시로서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그는 경제 재건을 반대하는 고착 세력들이 매우 강력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개혁 성향의 지식계급이 주도하는 여론의 도움으로 그들을 극복하고 싶어 했다.
-229

우크라이나는 시작은 느렸지만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여론이 급증했다.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는 투표율이 84퍼센트였고 유권자의 90퍼센트가 독립을 찬성했다(이것은 우크라이나인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도 찬성했다는 뜻이다).
8월 초 미국 대통령 조지 H.W. 부시는 우크라이나 수도에서 행한 연설에서 고르바초프와 소련 존속을 지지하며 '자멸적 민족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하지만 11월, 부시는 의회의 강력한 압력과 우크라이나의 로비로 인해 뒤로 물러났다. 우크라이나의 임박한 연방 탈퇴와 그에 대한 미국의 묵인 가능성이 소련 해체의 결정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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