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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원·명>

딸기21 2023. 7. 9.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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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중국사 원·명 - 곤경에 빠진 제국 
티머시 브룩. 조용헌 옮김 너머북스. 7/3

 

전체 시리즈의 책임편집자인 티머시 브룩이 원-명 시대를 저술했다. 머리말에서부터 조너선 스펜스를 얘기하더니, 글에서 스펜스의 향기가 물씬 난다. '용이 나타났다'는 기록을 가지고 글을 시작해서 소빙하기에 해당되는 당시 기후 재앙과 왕조의 성쇠를 엮는다든가, 서울의 골동품상을 거쳐 캐나다 터론토로 옮겨간 명대 인물의 비문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든가. <왕여인의 죽음> 스타일의 이야기들이 많아 재미있는데, 원에 대한 설명이 적은 것은 조금 아쉽다.

 

중국인에게 1368년은 13세기 중엽부터 17 세기 중엽 사이 4세기에 걸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해당한다. 주원장이 주도하는 토착 반란 정권이 몽골을 몰아내고 '조국’을 재건한 해였기 때문이다.
중국 외부의 역사학자들은 1368년이야말로 후기 중화제국의 출발점이자 근대 세계를 향한 긴 여정이 시작되는 기점이라며 그 중요성을 부여한다. 이 책에서도 1368년은 중요한 해이지만 의미는 다르다. 즉 1368년은 중국 역사의 방향을 트는 전환기가 아니라 반대로 두 왕조를 연결하는 고리의 시기라고 본다. 원-명은 중국의 전제 체제를 구축했고, 중국 사회를 확대가족 집단으로 재편했으며, 상업적 부가 집중되기 쉽도록 중국의 가치를 재조정한 왕조였다.
나는 1271년부터 1368년까지 몽골의 지배를 받던 중국을 독자적인 시기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과거 지속된 중국의 모습은 몽골에 의해 단절되었고, 명의 이질적인 모습이 중국의 것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뒤 오늘날까지 중국의 모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본다. 타민족의 것이 토착화되었고, 몽골인이 중국인이 되었다.
기근, 홍수, 가뭄, 태풍, 메뚜기떼, 전염병 같은 각종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용의 공격 같은 특이사항도 주목했다. 이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시간에 따라 배열하면서 이 두 시대가 단일한 시대임을 발견했는데, 원-명 시대는 기후학자들이 ‘소빙하기'라 부르는 시기와 일치했다. 
나는 3~7년 주기로 발생 했던 심각한 기후 재앙과 이 때문에 발생한 대규모 참사를 ‘9차례의 늪'의 시기로 확인하고, 그 사건의 패턴을 찾아낼 것이다. 원-명 사람들은 안으로는 이상 기후에 시달리고, 해안에는 외국 상인이 끈질기게 출현하는 통에 더욱 가중된 혼란을 겪었다. 원-명 시대가 대단히 혼돈스럽고 불화의 사회였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15-17

 

용을 날씨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해석은 용을 목격할 때의 감정적 혹은 심리적(혹은 정치적) 효과를 간과할 위험이 있다. 원-명의 사람들은 용을 볼 때 나쁜 날씨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우주적 혼란이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공룡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유를 "거대하고, 난폭하고, 그리고 멸종"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원- 명의 사람들에게 용은 살아있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용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것은 마지막 제국인 청이 붕괴되기 겨우 몇 해 전인 1905년 11월 연안 해역에서였다.
백성들에게 용이란 예측할 수 없는 하늘의 뜻과 때로는 무관심한 국가 때문에 상처 입기 쉬운 자기 자신을 상기시켜주는 존재였다. 용을 보았다는 것은 백성들을 돌보지 못한 황제의 실정을 말해주는 물증이었다. 황제들은 대부분 용의 주인이 되지 못했을뿐더러 용을 보지도 못했다. 원-명에서 용은 오직 백성에게만 나타났다. 따라서 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정하는 권한은 백성에게 있었다.
-51-53

 

그렇쥐, 용은 중요하지. 모름지기 중드에는 용이 나와야지! <우룡>은 그야말로 용이 주인공인 드라마. 퀄리티는 별로였지만 왕허디와 주쉬단이 주인공이니 봐주자. <삼생>의 '현녀' 주쉬단은 이쁘긴 한데 역시 주연을 하기엔 좀... 서브 커플인 덩웨이와 판메이예가 뜻밖에 엄청 마음에 들었다.

 

원을 체험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유럽인에게 아시아를 알리는 단초가 되었고 이후 수백 년간 중국에 대한 이미지를 지배했다. 폴로의 책에 영웅이 있다면, 그는 바로 쿠빌라이다. "내가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하는 바는, 그 (쿠빌라이)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쿠빌라이와 관련된 모든 표현은 최상급이었다. 쿠빌라이의 궁전은 "세상에서 가장 크고”, 궁전 인근의 도시 인구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거기서 파는 물건은 "세상 어느 도시"보다 풍부하다는 식이었다.
-60

 

그렇지, 폴로와 쿠빌라이도 나와야지. 내 인생의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 그것을 인용한 스펜스의 <칸의 제국>이 겹쳐질 수밖에.

 

주원장은 몽골 지배의 잔재를 없애고 송의 모델을 회복하는 것이 자기 임무라고 천명했지만, 새 정권에서 자신에게 익숙했던 원의 관행을 종종 재생산하곤 했다. 그 결과 20세기의 저명한 역사가 프레더릭 모트가 '전제 정치'라고 부른 것, 즉 몽골의 칸과 송의 황제 전통을 혼합한 새로운 형태의 지배가 탄생했다.
모트는 중국의 전제 정치가 송과 원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가설을 가지고 1950~1960년대 풍미했던 카를 비트포겔(1896~1988) 등의 냉전 시대 중국학에 맞섰다. 비트포겔은 아시아가 아주 오랜 고대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전제 정치라는 상황에 속박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개념은 17세기 유럽의 지식인들이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정치 체제를 규정하면서 고안해냈다. 18세기가 되자 중국이 전제 정치의 개념에 포함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가장 극단적인 전제 정치로 지목되기에 이르렀다. 
명사 연구자로 그다음 세대에 해당하는 에드워드 파머(1924~1993)는 명에 관한 논의를 기존의 '전제 정치 despotism'에서 '독재 정치 autocracy'로 전환하며, 독재 정치를 "제국의 제도 가운데 강화된 권력의 집중"이라고 정의했다. 파머는 명의 독재 정치를 제도로서 구현된 정치 조직의 체계라고 보았다. 이는 쿠빌라이 칸이 보여준 몽골의 습속이나 주원장의 사나운 성격에서 기인한 결과가 아닐뿐더러 중국 사회의 권위적인 본질과도 관련이 없으며, 다만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려고 고안해낸 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74

 

버나드 루이스가 이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국'이라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 시리즈 마지막권인 '청'도 그렇고, 중국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각이 어떤 식으로 달라져왔는지를 설명하는 부분들이 재미있다.

 

'명'이라는 이름에는 주원장이 세력을 확장해가던 초기, 그가 몸담았던 반란 집단의 종교적 이데올로기 의 하나인 마니교의 우주론(어둠에 맞선 빛의 싸움)이 반영되기도 했다. (173쪽)

 

주원장이 나오면 <의천도룡기>가 등장해줘야. '중국의 해리 포터' 쩡순시는 딱히 여기서 나쁘지는 않지만 <종극필기> 쪽이 더 맞는 듯. 197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워낙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무협물이다 보니 옛날 버전과 비교해서 아재들이 품평을 많이 해놨더라는. 역대 의천도룡기 가운데 '최강 미모 버전'이라고 하는데, 천위치(진옥기)가 겁나 이뿌긴 하지만 극중에 녹아들기보다는 얼굴빨이 더 나는 배우인지라(그 점에서 디리러바와 비슷). 그러고 보니 여기도 축서단이 나오네? 아무튼 나는 2019 버전만 봤는데 확실히 재미는 있었다.

 

<의천도룡기>(2019)

 

과부의 재가는 정절보다 훨씬 보편적이었고, 많은 여성이 한 번 이상 결혼했다. 여아 살해가 많은 상황에서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다. 물론 전통적인 도덕관념으로는 배치되는 일이었다. 실제 과부가 재혼하지 않고 남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사망한 남편의 가족들은 가임기의 과부에게 정절을 지키기보다는 재혼할 것을 권유했는데, 그녀를 부양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이 너무 과중했고, 혹시라도 과부가 가난 때문에 정숙하지 못한 길을 택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275

 

에구 불쌍해라. 먹여살리기 힘들다고 재혼하라고들 했다네 ㅠㅠ

 

송의 유교는 도학(道學)이라는 이름으로 그 가치가 한층 향상되었고, 오늘날에는 주로 신유학이라 불린다. 그렇지만 유교는 일반 백성의 삶을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는 못했다. 백성들에게는 유교-도교-불교의 세 가르침이 모두 필요했다.
몽골은 삼교(유-불-도)보다 티베트 불교(라마교)에 더 관심을 가졌지만, 어떤 종교적 주장에도 존중을 표할 만큼 신에 대한 경외심이 풍부했다. 어쨌거나 삼교는 하나의 범주 안에 있었다. 열렬한 신도가 아닌 이상, 삼교의 모든 전통을 절충적으로, 심지어는 변덕스러울 정도로 자유롭게 취사선택했다.
중국의 세 가지 믿음은 전통적으로 하나이며 표현만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삼교 합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원-명에 형성된 두 가지 큰 관념 체계 중 하나였다. 명 중기의 정치가였던 왕양명, 즉 왕수인(1472~1529)과 관련된 유학이 그 두 번째 관념 체계였다.
왕양명은 광서성 경계에서 발생한 토착민들의 반란을 진압했던 사령관으로, 가정제가 생부와 생모를 전임 황제(홍치제)보다 높이 추존하려 했던 일을 비판한 최고 엘리트 집단과는 반대 입장을 취한 인물이기도 하다. 왕양명은 도덕적 지식은 사람에게 내재된 것이지 배움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놓았다. 
이러한 신개념이 나오자 유자들의 믿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성인들의 글을 공부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미 직관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믿음이 생긴 것이다. 좀 더 급진적으로 해석하면, 도덕적 지식을 얻는 데는 경전 공부보다는 묵상과 도덕적 성찰이 훨씬 유용하다는 이야기도 되었다. 공부가 직관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못 배우면 무지하다고 간주하는 전통적인 교육관으로 볼 때 크나큰 도전이었다.
-317-318


명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중 <금옥량연>도 있지만 너무 정신사나우니 넘어가고. 형편 없는 황제를 그린 드라마로는 <여의명비전(여의 담윤현)>을 빼놓을 수 없다.

 

곽건화가 아직은 전성기가 끝나지 않았던 시절에 찍은 건데, 에센 휘하에 재규합된 몽골을 치겠다고 나섰다가 인질이 되는 스토리. 주인공은 한창 이쁘던 류시시. 뭐 저런 한심한 상황 & 한심한 황제가 다 있나 싶었는데. ㅎㅎ 곽건화가 못난이 주기진(정통제) 역할을 맡았고 황현이 착한 줄 알았더니 찌질하고 비열한 주기옥(경태제)였는데, 걍 시종일관 류스스가 끌고가는 드라마였다...

 


이제 도자기 이야기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면서도 흔한 명의 물품은 도자기다. 당시 유럽인은 도자기를  '차이나china’라 불렀다. 현재 도자기의 전형으로 인식되는 것은 원에 등장했던 양식이다. 얇고 하얀 자기 위에 유약을 바른 뒤 암청색 문양을 넣고 그 위에 다시 유약을 바른 다음 고온에서 구워내면 유리처럼 투명하고 단단한 도자기가 탄생한다.
도자기는 중국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흰 바탕 위에 새겨 넣은 암청색 문양은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형성된 다문화의 산물에 해당한다. 하얀 바탕에 파란색 무늬를 넣는 기술은 원래 페르시아 문화에서 기원했다. 페르시아 사람들의 취향을 파악한 중국의 도공들은 월등히 뛰어난 유약 기술을 사용하여 훨씬 정교한 자기를 만들어냈고, 이 제품들이 14세기부터 페르시아 시장에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페르시아에서 중국의 도자기 수요가 높았던 데는 종교적 제약과도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었다. 금은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는 것을 사치로 규정하여 금지한 코란의 율법 때문에 고급스러운 식기로 청화 백자를 사용한 것이 그 시초였다.
원 시대에 강서성 경덕진이 도자기 중심지로 발달하게 된 것은 인근에 도자기의 원료인 백돈자(白墩子)가 대량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경덕진은 양자강 하류의 주요 상업 도시들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배로 삼각주 지역까지 도자기를 운송하면 충분히 이익이 났다.
…1325년은 청화 백자의 생산에서 전환점으로 손꼽히는 해이기도 하다. 고려의 해안에 난파되었던 중국 선박에서 발견된 도자기 덕분이다. 화물에는 청화 백자 말고도 다양한 유약이 칠해진 5천여 점의 경덕진 도자기가 있었다. 그후 10년 동안 경덕진의 도자기 화물이나 보관소에는 청화 백자가 빠지지 않았다. 경덕진 도공에 대한 국가 관리가 소홀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을 것이다. 거의 하룻밤 사이에 청화 백자가 전 중국 및 국제 시장을 휩쓸었다. 15세기 티무르의 궁전에서부터 16세기의 멕시코, 17세기 네덜란드의 델프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자기 생산의 중심지에서 중국 청화 백자의 외양과 느낌을 모방하려는 작업이 중단된 적이 없었지만, 성공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398-400

 

청화백자를 영어로는 그냥 Blue and white pottery라고 하니 영 맛이 안 살자나?

 

암튼 이참에 청화백자 구경.

 

9세기 이라크의 청화백자. 아랍어로 '행복'을 쓴 것이라고. WIKIPEDIA
인도네시아 근해에서 난파 당나라 배에서 발견된 825–850년 무렵 당대의 청화백자. WIKIPEDIA
1271-1368년 원나라 때의 경덕진 자기. 자기 중에는 역시나 청화백자가 최고이지 말입니다. WIKIPEDIA
영국박물관 소장, 원나라 때인 1351년의 데이비드 꽃병(David Vases). WIKIPEDIA
15세기 중반 명나라 때의 자기. WIKIPEDIA
명나라 정덕제 때인 1506-1521년의 작품인데 이슬람 서체의 하나인 툴루스체로 'Taharat(청결)'이라 쓰여 있다. WIKIPEDIA
포르투갈 리스본 박물관 소장, 16세기 명 자기. WIKIPEDIA
17세기에 수출하려고 집중적으로 만든 중국 자기들을 네덜란드에서 Kraakporselein(Kraak ware)라고들 불렀다 함. WIKIPEDIA
중국산 청화백자에 겨우 과일을 담아 놓다니. Jan Davidsz de Heem의 17세기 유화. 로테르담 Museum Boymans-van Beuningen 소장. WIKIPEDIA
18세기 중국의 수출용 자기세트. 갖고 시포라... WIKIPEDIA
18세기 네덜란드 델프트의 '튤립 화병'. Delfts blauw(델프트 블루)라고도 하는 델프트 청화백자는 17세기 초반으로 거슬러올라가는데, 네덜란드 아니랄까봐 튤립 화병이라는 '장르'가 있다. 나중에는 중국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이 장르를 역수입해 생산하기도 했다고. WIKIPEDIA
델프트에는 높이 12미터 튤립 화병 피라미드도 있다! WIKIPEDIA


명나라 드라마 중에 <성화14년>은 은근 잘 만들었는데, '한복 공정'이라는 혐의를 받고 혐중 정서에 걸려 국내에선 지탄의 대상이 됐지. 게다가 스티브 유를 왜 출연시켜? (사실 유승준이 어디 나왔는지도 잘 모르겠다. 워낙 단역이라;;) 

나름 BL을 탑재하려 했으나, 설정과 장치가 엉성해서 두 남주 케미가 영 안느껴졌다. 오히려 소소한 디테일과 인물 캐릭터들과 스토리 전개가 꽤나 괜찮았던, 수준 높은 작품이었다.

 

중드에 한복과 갓이 나온다고 해서 '한복까지 빼앗아가려는 한복공정이냐' 국내 네티즌들이 난리였는데, 내가 보기엔 걍 한국 드라마가 강세니까 멋져보이려고 흉내낸 것 같았다. <명비전>에는 류시시가 조선 상인들 만나 '오빠'라는 단어를 배우고 연인 간에 '자기야'라고 부른다는 걸 배우는(조선 시대에!) 장면까지 나오는데 말이지 ㅋㅋ

 

홍광제는 남경에서 등극한 지 1년 만에 만주족에게 넘겨졌고, 구금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홍광제의 사촌 3명은 명의 잔당들을 이끌고 먼 남쪽으로 도망갔다. 그중 한 명은 교황에게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요청했지만, 그 서신이 바티칸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명이 무너진 지 오래였다.
-468

1644년 4월 24일 이자성의 군대에 북경이 함락되었고, 빠져나갈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숭정제는 딸을 죽인 뒤 자금성 뒤편의 매산에서 나무에 목을 매고 자살했다.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했다는 소식은 산해관에서 만주군을 막고 있던 장군 오삼계(1612~1678)에게 전해졌다. 이에 그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는데, 산해관 반대편에서 대치 중이던 만주군 장군 도르곤에게 협상안을 가지고 접근한 것이다. 도르곤은 더 큰 명예와 보답을 조건으로, 오삼계를 도와 북경의 반군을 물리치기 위한 대대적인 전투에 가담하기로 했다. 도르곤으로서는 명을 관에 넣고 마지막 못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명의 몰락에는 많은 역사가 담겨있다. 동북 변경에서 만주 제국이 팽창한 역사, 14세기 이래 중국을 가장 크게 위협한 반란의 역사, 조정이 붕괴한 역사, 그리고 중대한 기후변화의 역사까지. 각 역사에 담긴 내용은 다르지만, 그 내용이 서로 겹치면서 결국 하나의 역사를 구성했다. 1641년 이자성의 군대가 황하 유역을 장악했지만, 그 직전 전염병이 이 지역 인구의 70퍼센트를 휩쓸어버리지 않았다면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 무엇이 명을 몰락시켰을까? 재정 파탄 때문일까? 반란 때문일까? 만주군의 힘 때문일까? 날씨 때문일까? 명이 붕괴한 원인은 이러한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495

… 새로운 청 조정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숭정제를, 마치 불명예보다는 자살을 선택한 과부처럼 존중해주었고 정통성 있는 황제로 추존해주었다. 숭정제의 만주인 ‘계승자' 순치제(재위 1644~1661)는 숭정제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우고 칭송했다. 숭정제의 자살로 청은 천명을 지닌 황제를 살해할 필요가 없어졌을 뿐 아니라, 새 황제의 천명 또한 무리 없이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청은 숭정제를 선대 황제들의 무덤 옆에 안치하고 황제에 대한 모든 예를 갖춘 다음 그의 왕조가 끝났음을 선포했다.
-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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