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중국사 송 - 유교 원칙의 시대
디터 쿤. 육정임 옮김. 너머북스. 7/2
아름답고, 화려하고, 유약하고, 말 많고.
한국 사극에서도 삼국시대 고려시대까지는 박진감이 넘치다가 조선으로 가면 나가서 말 달리며 싸우지는 않고 조정에서 이것이 도리가 아니네 예가 아니네 하면서 말싸움만 한다. 송나라가 그렇다. 당나라는 화려하고 국제적이면서 번창한 느낌이 강한 반면에, 송나라는 정교하고 룰 많고 예법 가지고 지지고볶고 ...
1126~1127년에 금의 침략을 당해 송 조정은 멀리 남쪽으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으며, 거기서 1279년까지 다시 152년간 권력을 유지했다. 금의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점을 고려해볼 때, 북송과 남송이 그렇게 오랫동안 존속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송 제국의 약점은 많았다. 유학자들은 원칙적인 차원에서 전쟁을 비난했다. 평화의 방법을 왕도로 보았고, 전쟁은 패도라고 규탄했다. 심지어 전쟁이 불가피했던 때에도 송의 공격적 전략은 뒷전으로 밀렸으며 그렇다고 해서 수비 전략이 크게 나은 것도 아니었다. 송은 멸망할 때까지 모두 네 번에 걸쳐 북쪽 정권의 신하 지위를 인정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했다.
송은 호전적인 이웃과의 평화적 합의와 현실 정치를 선택했다. 군대의 역량, 전략적 혁신, 국가의 패권으로 평가한다면 송은 허약한 왕조였고 마침내 짓밟히고 말았다. 그러나 전성기의 송은 중국 역사,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인도적이고 세련되며 지성적인 사회로 꼽을 수 있다.
-27-28
서방 역사학자들은 송대의 개봉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창한 곳이었다 하고, 세계체제를 중심으로 보는 학자들도 서양의 시대 이전 '아시아의 시대'를 상징하는 번영과 세계화의 상징으로 송대를 꼽는다. 맨 처음 그런 책들을 읽었을 때 좀 낯설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 '송나라는 너무 약해서 남쪽으로 피난 갔다'는 것 정도만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는 게 중요하지, 평화와 번영이 자주 국방 없이 되겠는가! 아마도 내가 어릴 적 학교에서 가르치던 국가의 윤리가 군사정권의 시각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그런데 이 책에서는 한술 더떠, 송 제국이 "세계 역사상 가장 인도적이고 세련되며 지성적인 사회"라고 평가한다.
절도사들은 희종과 소종을 마치 신하인 것처럼 대했다. 주전충(852~912, 본명은 주온사)은 그중에서도 가장 고집 세고 호전적이며 잔혹한 인물이었다. 903년에 그는 환관들을 황제의 거처로 몰아넣고 살해했다. 904년 2월 15일, 그는 도성의 건물을 모두 무너뜨려 그 건축 자재를 낙양으로 옮기라고 지시한 데 이어서 소종을 죽이라고 명령했으며, 907년에는 당의 마지막 황제인 경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후량의 초대 황제라고 선포했다.
장안이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1000년 이상 중국을 대표했던 수도를 물리적으로 상실했다는 것 이상의 중대한 역사적 충격을 의미했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정신적 외상을 초래했으며, 귀족 가문들이 지배하던 왕조들의 시대, 이제 구식이 되어버린 그들의 가치관, 시대에 뒤떨어진 국정 이념 등에도 종말을 가져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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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전충 이후 오대십국 시대. 그리고 조광윤.
태조 조광윤과 동생인 태종 조광의는 송 황제 중에서 가장 정력적이며 정치적으로 빈틈없는 군주의 모범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3대 황제 진종은 국가 통합을 완성하고 강력한 북쪽 이웃들과의 평화를 지속시킬 혁신적인 외교 전략을 개발했다. 학문을 좋아한 이 세 황제 치하에서 송대 중국은 어느 왕조보다 유교에서 상정한 이상적인 통치에 근접했다.
‘유교 국가’라는 용어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것 또는 유토피아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상고시대에서 차용해온 유교적 통치의 이상적인 구조와 혼동하면 안 된다. 오히려 이것은 “지성의 전통을 이끌어온 사상과 지배적인 행정 체제인 관료정치가 역사의 무대에서 긴밀히 결합하게 되었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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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황실은 도교에서 뿌리를 찾았다면, 혼란 속에 집권한 송 황실은 유교에 몰두. 아으으 유교 참 싫은데 말이다. 하지만 유학을 정치적, 사회적 지배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분석한 부분들은 나름 재미있었다.
주희(1130~1200)가 공자보다 더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것이 많은 역사가들의 견해이다. 그는 공자와 맹자를 제외하고, 중국 역사상 공식 전기문에서 스승이라는 의미의 '자'로 지칭된 유일한 인물이다. 주희는 복건성 중부에서 태어났는데… 유교의 새로운 형이상학을 논리 정연한 체계로 응축시키고 그 과정에서 유교 근본주의에 더 이론적이며 이성적인 기반을 부여했다. 그 결과물로 1176년에 완성된 「근사록」은 중국의 철학 지식을 정리한 서적으로는 처음이며 가장 체계적인 저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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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저술과는 별도로 주희의 「가례」는 중화 세계에서뿐 아니라 이웃한 한국과 일본에서까지 공통적으로 수용되어 주희의 명성을 높였다. 그 인기는 공자의 「논어」에 버금갔다. 주희가 고안하여 명 문화한 가족 의례는 사회 지배층과 그 지배층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 요람에서 무덤까지 일생 동안의 가정생활의 표준이 되었다.
「사서집주」는 주희가 송대 유교 철학에 공헌한 가장 중대한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공자부터 11세기의 다섯 선구자들까지 망라하여 고전 학문에 통달한 그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사서집주」는 도의 전승, 즉 도통에 대한 권위 있는 역사서로 알려지게 되었다. 1313년 원 왕조 하에서 「사서집주」가 유교 주석의 표준이자 과거 시험을 위한 교육의 기본으로 인정된 이후, 그 지위는 20세기에 과거제가 폐지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202-203
'문약'이라는 말로도 표현되는 송나라. <대송궁사>는 병약한 남편을 보필하며 사실상 군주노릇을 한 인종의 어머니 황후를 둘러싼 이야기인데 당장 외적이 코앞에 들이닥칠 판이건만 이렇게 하는 게 맞네 틀리네를 가지고 조정에서 말싸움하는 것이 절반을 차지한다. 류타오가 나오면 일단 드라마의 퀄리티는 보장되는 느낌인 걸 보면 작품 고르는 눈이 참 좋은 배우인 듯. <탕평악>은 인종 본인과 후궁 이야기인데 왕카이가 주연을 맡았지만 재미없어서 보다 말았다. <장군재상>도 인종 시기를 그렸는데, 이 세 드라마 가운데 이걸 맨 먼저 봤기 때문에 인종과 태후의 관계가 참 신기하다 생각했던 기억이.
하북성 정정현의 융흥사에는 독창적인 회전식 장경고가 안치된 전륜장각이 있는데, 형태가 매우 비범하다. 이 전륜장은 팔각 구조물의 기단 위에서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구조이다.
-224
오옷. 예천의 절에서 윤장대를 보며 엄청 신기해했는데 그게 나오네?
당 왕조하의 상류층 가정은 며느리를 선택할 때 명망을 가졌던 가문을 선호했다. 송대에는 돈 많은 집의 딸이 첫 번째로 올랐다. 1147년의 기록에 따르면, 중매쟁이들은 양가에서 실수나 속임수 당 하는 일이 없도록 복잡한 협상과 기술을 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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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과부의 경제적 독립을 결정하는 요소는 지참금에 대한 법적 자격이었다. 여성은 결혼할 때 '장렴'이라고 부른 지참금의 형태로 자기 상속분을 받았고, 이것은 '처재'라 하여 남편 가족의 다른 재산과 구별되며 시가의 공동자산에 흡수되지 않았다. 여성이 소유한 토지 자산은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간주되었는데, 남자 형제들이 조상에게서 내려온 토지를 보유하더라도 개인의 것이 아니라 가족 이익을 위한 공동재산으로 간주된 것과는 달랐다. 처재에 대한 권리는 영구적으로 그녀에게 있었고 이혼하거나 과부가 되어 새로 결혼할 때에는 가지고 갈 수 있었다.
유목적인 관습을 보전하고자 했던 몽골은 1260년을 시작으로 여성의 법적 재정적 자율권을 박탈했고, "모든 권위와 경제권은 가장에게 있다"는 송대 가부장권 주장자들이 바라던 생각은 그들의 왕조가 무너진 후에야 현실이 되었다. 수절 숭배가 번성하기 시작하고 재혼에 대한 비난이 심해졌으며 여성의 재산권과 재정적 독립성이 증발해버렸다.
-280-281
아뉘... 남북조 시대 선비족 등 북쪽 유목민 사회에선 여성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셌는데 몽골은 왜 저모양이야.
<랑야방>은 가상의 양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의상은 가장 화려하고 멋진 송대의 것을 차용했다는 설명을 읽은 적 있다. 송나라 배경 드라마들은 의상이나 실내 장식, 옥외 세트 등이 모두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녹비홍수>가 딱 그런 '송나라 드라마'다. 황실 정치에서건 혼례와 육아와 가정 살림에서건 예법이 복잡하고 법적 제도적 관행적인 룰들이 무쟈게 많고. 결혼을 둘러싼 계산과 힘겨루기, 개인 재산으로 분리돼 시댁에 흡수되지 않는 여성의 지참금에 대한 얘기가 드라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엄청 재미있었다.
도성 동부의 새로운 방 중에서도 변하 주변의 청명방은 최고로 꼽혔다. 변하는 운하로 조성되어 개봉성을 남쪽으로는 회하와 대운하에 연결시키고, 또 북쪽으로는 황하와 연결시켜주었다. 이는 개봉에서 가장 중요한 물길이었다. 이 물길로 수도에 도착한 여행객들은 근교에 다다르면 배에서 내린 다음 작은 배를 빌어 타고 도심으로 가야 했다. 낮 시간이면 수문 중 하나를 통해 들어가고, 입구가 닫히는 저녁 시간에는 강의 양편, 수문 가까이 있는 대문 중 하나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
변하는 수도의 생명줄이며 일종의 순환 체계였다. 엄청난 쓰레기와 폐물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고 수만 척의 대형 바지선이나 소형 배로 생필품을 대량으로 실어 나를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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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문은 너비가 150미터도 넘는 데다 성벽 위에 누대를 세워서 웅대하고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각종 음식 가판대와 식당들이 주교에까지 계속 이어져 있었다. 개봉의 중요한 지형지물이었던 주교는 길이 17미터, 최대 30미터의 폭을 가진 석축 교량으로 천한교라고도 불렸으며, 그 아래로 변하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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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드에 늘 나오는 시내 중심가의 운하가 바로 저기였나보네 ㅎㅎ
항주의 어떤 곳들은 대단히 정교한 요리로 유명했다. 예를 들면 잡화 시장에 있는 달콤한 콩탕, 과가네 꿀대추, 광가네 걸쭉한 국(갱)집, 전당문 바깥쪽에 있는 송오수 물고기탕집, 직가네 양고기 식사, 장가네 경단, 묘아교에 있는 위대도 고기요리집, 오간루 앞에 있는 주오랑네 꿀전병 집 등이 있었다. 주간 시장이 폐장할 때가 되는 저녁 식사 시간이면, 아직도 성이 안 찬 사람들은 시끌벅적한 야시장으로 지칠 줄도 모르고 모여들었다.
북송 말까지 항주는 대운하의 종점이었지만, 남송대에는 운하의 남쪽 기점이 되었다. 광범위한 수로를 따라 농산품이나 상품들이 내륙 지역으로부터 수입되었으며, 이 수로는 각 지역 조선소에서 완성된 매우 효율적인 선박과 바지선의 운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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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에는 상업 조합이 활성화되었다. 송대 조합 제도의 기원은 당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동종업의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특별히 설계된 사업 장소에 모인 것이 그 시작이었다. 조합의 우두머리는 가격 협상을 통해 집단의 이익을 확보하고 국가와 조합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조합들의 이름은 국가의 과세 분류와 일치했다. 남쪽 수도에서 올리브 상인의 조합인 청과단은 니로에, 오렌지 거래상의 조합 감자단은 후시가에 있었으며, 건어물 상인 조합 상단 은 혼수압에 있었다. 심지어 점쟁이, 일반 노동자, 넝마주이도 조합에 들어 있었다.
칠보, 즉 금, 은, 에메랄드, 수정, 루비, 호박(또는 산호나 다이아몬드), 마노의 상인들은 이른바 '골동행'에 가입했다. 진주를 꿰는 보석상은 자신들을 산아행이라 불렀고, 제화공들은 스스로 겹줄 조합 즉 쌍선행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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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이페이와 첸샤오가 나온 <몽화록>은 수진이가 쿠폰까지 주며 적극 추천해서 봤는데, 정말 공들여 만든 작품이었다. 중간에 살짝 지루한 부분도 있었지만, 세트 의상 배우 줄거리 화면 전부 끝내줬다. 당시의 상인들과 상업조합 등등을 상세하게 묘사한 것도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여성들의 적극적인 역할과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젠더에 대한 관념만 놓고 보면, 중드가 한드보다 훨 씬 낫다. 중드 보다가 한국 드라마를 보면 디폴트로 깔린 여혐 코드에 진저리가 날 정도다. 문제는 시진핑 3기를 앞둔 2~3년 전부터 중드가 퇴행x퇴행을 했다는 것이겠지만.
13세기 말에 양자강 하류에만 1만 5000척이나 되는 선박이 운행했다. 연안 해역의 배들은 보통 배수량이 180톤 이상이었다. 길이 24.2미터에 너비 9.15미터인, 300톤 용적의 송 선박이 복건성 지역에서 발굴되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기함 '니나'호의 최대 적재 배수량은 약 110톤이었다. 중남부 지역 사람들은 배 없이 살 수가 없었다. 배는 일상 생활의 필수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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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과 비교할 때 요, 금, 서하 왕조의 경제사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혼란스럽다. 송이 200년 이상 이들 이민족 정부들에 자금을 댔다는 사실이 이들의 국가 경제를 올바로 평가하기 어렵게 한다." (459쪽)
여러 나라를 먹여살린 송. 전쟁을 피하기 위해 '오랑캐'들에게 그렇게 갖다 바치고도 송나라가 저렇게 번성한 게 놀라울 따름. 이 책의 시각으로 보면, 바로 그렇게 갖다 바치면서 전쟁을 피하는 현명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기에 저렇게 번성했다는 얘기가 되겠다.
<장군재상>은 위에서 얘기했던 대로 인종 때의 일을 그렸는데, 진지하게 볼 건 아니고 웃자고 만든 드라마다. 남녀 성역할을 바꾼 일종의 '젠더 뒤집기' 드라마인데 그 설정 자체가 코믹하면서도 참신하고 재미있었다. 코미디라고 보기엔 잔혹하고 현실적인 장면이 많이 나오지만.
드라마는 오랑캐와 싸워 승승장구한 엽소 대장군이 수도로 돌아와 '시집을 가야 하는' 처지를 맞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실제 송나라의 역사는 승승장구와는 거리가 멀었으니... 그뿐 아니라 여성들의 삶에서도 망할 '전족'이 퍼진 시기였다. 이 책에서는 사회 모든 영역에 스며든 상품경제와 여성의 상품화, 전족을 연결시켜 해석한다.
11세기가 끝날 때까지는 드문 일이었으나 13세기가 되면 전족이 사대부와 상류 지주 계급 여성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 전족은 메스 없이 하는 일종의 수술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여성의 몸, 기동성, 민첩성을 영구적으로 바꾸고 결국은 주체성마저 변질시켜버렸다. '금련'을 한 여성은 좁은 보폭으로 걸을 수밖에 없었고 거의 대부분 앉아 있기를 좋아 했다. 삼베로 바닥을 댄 얇은 비단신을 신고 규방 밖으로 발을 내딛어 절룩거리면서 먼 거리를 걸어간다는 것은 고통 자체였다. 13세기 상류층 여성은 외출하려 할 때 자신의 두 다리가 아닌, 무언가의 이동 수단에 의지해야만 했다.
몇 세기에 걸쳐 전족은 여성 노동력의 상실을 감당해야 할 만한 평민들을 포함한 대부분 가정의 처와 딸들에게 보편화되었다. 당과 북송 시대에 존 재했던 여성의 개인적인 자유는 자연히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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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았던 천을 푼 발은 성기와 다르지 않을 만큼 여자의 은밀한 신체 부분으로 여겨졌고, 관능적이며 마치 의식처럼 행해지는 전족 풀기는 남성의 성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전족을 시행하고 대중화시킨 여성들의 선택은 송대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에 대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가정 내 첩의 존재와 성장하는 유흥 시장이 소녀와 여인들을 상품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이다.
당 시대의 남성들은 보통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할 때에 첩을 들였고, 가족망의 연줄을 통해 첩을 선택했다. 화폐경제가 모든 부문으로 스며들게 된 송대에 이르자 부유층 남성들은 첩으로 봉사할 여성을 사서 집에 들였다. 매우 경쟁적인 시장경제 안에서 축첩이 성업하게 되자, 여성의 매력은 어느 때보다 더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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