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바람과 물] 쓰고 버리는 문화가 남겨 놓은 것들

딸기21 2021. 9. 1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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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동쪽, 인도양에 닿아 있는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외곽에 코레(Kore)라는 마을이 있다. 현지 부족 언어인 암하라 말로 ‘더럽다’는 뜻이라고 한다. 


마을이 그런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도에 사는 수백만 주민들이 내다 버린 쓰레기를 모아 이 마을에 쌓아두기 시작한 것이다. 갈 곳 없고 달리 먹고 살 길도 마땅치 않았던 이들이 이곳에 모여, 쓰레기를 뒤져서 쓸만한 것을 주워 팔기 시작했다. 2014년에 정부가 쓰레기 산을 없애려고 했지만 무산됐다. 다른 곳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적치장을 새로 찾기도 힘들었거니와, 코레 마을에 사는 500여명에게는 쓰레기 더미가 곧 일터이고 자원이고 삶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017년에 쓰레기산이 무너져 113명이나 숨졌지만 여전히 거기서 누군가는 생계를 이어간다.


중미 온두라스의 산페드로술라. 치안이 좋지 않은 이 나라에서도 유독 갱들이 설쳐대고 살인율이 높은 곳이다. 이곳 풍경을 구성하는 것도 쓰레기들이다. 쓰레기산이 솟아 있고 여기저기서 폐기물 태우는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덤프트럭이 쓰레기를 싣고 와 쏟아부을 때마다 새들과 개들, 소들, 그리고 아이들이 모여들어 먹을 것을 찾아 뒤진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매년 세상에서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은 20억 톤이 넘는다. 강과 바다에 흘려보내거나 대기 중으로 내뿜는 것들 말고 ‘고형 폐기물’, 즉 우리 눈에 보이는 쓰레기만 따진 양이다. 어떤 것들은 땅에 묻혀 천천히 썩거나 태워진다. 하지만 쓰레기의 상당수는 어딘가에 쌓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버리고, 달리 살 길이 없는 또 다른 누군가는 버려진 것들을 모아 먹고 산다. 필리핀에도 이집트에도 이런 쓰레기 마을들이 있다. '인터내셔널 사마리탄(International Samaritan)'이라는 단체의 통계에 따르면 쓰레기 더미에 터를 잡고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세계에서 1500만 명이나 된다. 사회가 외면한 이들이 사회가 폐기한 것들을 뒤지며 힘겹게 삶을 이어간다. 이번 도쿄 올림픽 복싱 종목에서 남자 플라이급 은메달을 딴 필리핀 선수 카를로스 팔람도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그런 넝마주이(scavenger) 출신이다. 하지만 쓰레기 마을의 인생역전은 예외적인 사건일 뿐이다.


요즘 화제라는 영화 <모가디슈>를 봤다. 총탄이 빗발치는 내전의 현장에서 탈출하기 위한 남북 외교관들의 사투, 정치적 대립을 넘어선 인간애. 영화는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너무나도 아프리카적인’ 풍경을 재현해낸 제작진의 감각이다.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들을 다녀본 내 눈에 영화 속 풍경들은 정말이지 리얼했다. 그 거대한 대륙에 50개가 넘는 나라들이 있으니 뭉뚱그려 ‘아프리카답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예의가 아닐뿐더러, 지나친 단순화로 한 지역에 하나의 표상을 가져다붙이는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그럼에도 영화에 비치는 풍경들을 보면서 ‘정말 아프리카로구나’라고 느꼈던 것은 쓰레기들 때문이었다. 영화는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세트에서 찍었다는데, 그럼에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여러 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너저분한 도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스크린을 메웠다.

 

가난과 쓰레기. 그것이 오랫동안 기자로 일하면서 내가 만난 세계의 두 얼굴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몇몇 곳들, 한국보다 덜 개발되고 소득이 적은 지역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난의 역사나 가난의 본질 같은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가난하다는 것은 돈이 없는 것이고, 물건을 원하는대로 사서 쓰지 못하는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적어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은? 세계화는 가난한 지역이라고 해서 피해가지 않는다. 상품들은 어디로든 쏟아져 들어간다. 값싸고 질 낮은 상품이 넘쳐나고, 그것들이 고스란히 쓰레기가 된다. 그러니까 지금의 세계에서 가난은, 물건이 없는 것이 아니라 ‘쓰고 버린 물건을 처리할 인프라가 없는 것’ 쪽에 더 가깝다.

 


쓰레기를 처리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가? 누군가는 그걸 분류해서 정해진 장소에 버려야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모아서 가져가야 한다. 누군가는 태우거나 묻거나 재활용을 할 수 있게 처리해야 한다. 누군가는 리사이클을 해서 자원으로 순환시켜야 한다. 법이 있고 장비가 있고 사람들이 있고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버리는 것’에도 그토록 대단한 행정력과 돈이 필요한 것이다. 쓰레기를 처리할 그런 인프라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역에서, 도시의 풍경은 모가디슈가 되고 코레가 되고 산페드로술라가 된다. 유엔 해비타트에 따르면 세계에서 30억명 이상이 폐기물 처리 시스템이 없거나 부족한 처지에서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 학자 세르주 라투슈가 ‘계획된 진부화의 수렁’이라 불렀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이클이 빚어낸 쓰레기들이야말로 세계화의 맨 얼굴이다.


저개발국의 대도시 외곽에 펼쳐진 쓰레기 마을 역시 세계화라는 사슬의 한 고리다. 상품이 교역망을 타고 흘러흘러 그리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쓰레기조차도 지구적으로 움직인다. 미국 외교협회 자료를 보면 세계에서 매년 버려지는 쓰레기의 10분의 1인 2억톤 정도가 국경을 넘나들며 이동한다. 한국은 수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외국으로 ‘수출’하는 나라다. 2018년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불법으로 떠넘긴 한국 쓰레기가 문제가 됐듯이, 재활용 물품인 양 속여서 폐기물을 보냈다가 들킨 사례도 있다. 점령하고 빼앗는 것만이 아니라 버리고 떠넘기는 것도 권력이다. 그래서 요즘엔 ‘쓰레기 식민주의(Waste colonialism)라는 말까지 쓰인다. 특히 도시가 급격히 커지고 인구가 많은 만큼 쓰레기도 많은 아시아는 쓰레기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위계화돼버렸다. 한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은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국가들로 쓰레기를 보냈고 그 나라들에는 쓰레기 마을들이 생겨났다. 요 몇 년 사이에 그들이 법규를 강화하고 쓰레기 수입량을 줄이니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난다. 


값싸게 사서 쓰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는 시스템. 물건도 쓰다 버리고, 탈것도 쓰다 버리고, 도시도 쓰다 버린다. 산도, 강도, 바다도 쓰다 버린다. 대량소비에 흠뻑 젖은 의식의 종착점은 ‘쓰고 버리는 사람들’이다. 프레카리아트,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실업자, 난민, 때로는 노예라고까지 불리는 사람들이 지구상에 너무나 많다. 뿌리 뽑힌 채 옮겨다녀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떤 이는 지금의 자본주의 자체가 ‘축출’을 발판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이 경제시스템에서 ‘불필요해진 사람들’의 숫자가 지구의 관리 능력을 넘어설 지경이 됐다고 말한다. 어떤 표현을 쓰든, 세상 모든 상품들마냥 사람들의 값은 점점 낮아지고 버려지는 사람들은 많아진다.


1960년대에 독일로 밀려들어오는 이주노동자들을 보며 스위스 극작가 막스 프리쉬는 “노동자(Arbeitskräfte)를 불렀는데 사람이 왔다”라는 말을 했다. 독일어의 노동(Arbeit)이라는 저 단어는 여러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나치 독일이 만든 아우슈비츠 수용소 문에는 ‘노동이 당신을 자유롭게 한다(Arbeit macht frei)’라는 글이 쓰여 있다고 한다.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절멸’됐는데 저 문구는 아직까지 남아 있다. 아르바이트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유독 독창적인 의미를 얻었다. 한국의 서비스업을 떠받치는 ‘알바’는 지금 이 사회가 가장 편하게 쓰다가 내치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소비문화와 노동자들 이야기를 하다가 아우슈비츠까지 갔으니, 생각이 너무 많이 나갔다. 그러나 노동력으로, 숫자로 표시되는 그들이 모두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조차 우리에겐 세심한 통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을 ‘손실’ ‘코스트(비용)’로 받아들이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시대이니 말이다.


코로나19가 퍼진 뒤 사람들의 이동이 짧은 기간이나마 줄어들었고, 경제활동은 축소됐다. 팬데믹 와중에 세계 곳곳에서 ‘해변에 거북이가 돌아왔다’ ‘도심에 사슴이 나타났다’는 뉴스들이 전해졌다. 하지만 역병 속의 반가움은 찰나에 그쳤다. 나이지리아와 캐나다와 호주의 학자들이 올 봄에 공동 논문을 냈다. 코로나19 시대에 쓰레기가 얼마나 늘어났는지 계산해보니, 이 전염병이 덮친 뒤 1년 남짓한 기간에 세계에서 날마다 플라스틱 폐기물 160만톤이 버려졌다고 한다. 1회용 마스크만 매일 34억 장이 버려진다는 것이 이 학자들의 추산이다.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가 예측한 방역용품 소비량을 훨씬 웃돈다. 감염성 쓰레기, 의약품과 화학폐기물들은 논외로 하고, 마스크만 따져도 그렇다.


코로나 쓰레기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코로나 자살률이다. 이 전염병이 퍼진 뒤 한 해 동안 한국에서 20대 여성의 자살률이 33%가 늘었다고 한다. 일본을 비롯해 다른 나라들에서도 코로나 우울증, 코로나 자살 이야기가 나온다. 곳곳에서 내몰리고 버려지는 사람들. 위기가 닥치면 희생되는 취약한 사람들. 그런가 하면 전염병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깨달은 게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에센셜임플로이, 영국에서는 키워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두가 생존하는데 기본이 되는 필수노동을 한다는 점요. 의료진, 음식 파는 가게 직원, 배달 노동자, 양로원에서 일하는 사람들…… 지금까지 저임금으로 일해온 노동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저널리스트 안희경과의 대담(안희경, <오늘부터의 세계>)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일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그동안 대접해주지 않던 사람들이야말로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임을 알고 그들에 대한 대우를 바꿔야 한다고. 코로나로 되돌아온 야생동물들의 소식을 들으며 해방감을 느꼈던 것은 잠시뿐, 일회용품과 마스크 쓰레기와 좌절한 이들의 죽음이 우울함에 무게를 더한다. 쓰고 버리는 문화가 만들어낸 것들, 버려지는 마스크와 취약한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 무게에 짓눌리고 말 것이다.


이번 여름 나는 낯모를 누구의 노동력에 기대어 더위를 넘겼고,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썼고, 얼마나 많은 폐기물을 내보냈을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남은 플라스틱 일회용 컵에 염화칼슘을 담아 제습용기를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 ‘자가제작 물먹는 하마’ 수준이지만, 세상의 버려지는 물건들과 사람들을 곰곰히 생각하다 보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나아질 방도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 생태전환 매거진 <바람과물>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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