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의 책을 선물받으면 '읽고 나서 반드시 후기를 올려줘야 한다'는 압박감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받는 순간에 감이 왔다. 아주 재미있을 게 분명하다는. 어머, 이건 내가 꼭 읽어야 해! ㅎㅎ 그런데도 오랫동안 꽂아놓고만 있다가 얼마 전 '화교 이야기'를 읽고 책장에서 꺼내들었다.
강희정 선생의 <아편과 깡통의 궁전>(푸른역사)은 굳이 <화교 이야기>와 비교하자면 조금 더 전문적이고, 조금 더 학술적이다.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라는 세 흐름을 아편, 깡통, 고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가지고 분석해 동남아시아 화교의 역사를 그려낸다. 주된 무대는 말레이시아의 페낭이라는 작은 지역이지만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라는 넓은 지역이 페낭을 중심으로 한 화교 역사의 지리적 배경이 된다. 영국의 식민주의,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쟁, 화교 상인권의 형성과 위축, 독립국가들의 탄생과 그 이후까지 시기적으로도 꽤 넓은 범위를 포괄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괜찮은 책을 찾을 수가 없어서 늘 마음이 아팠는데(^^;;) 이런 책들이 나와주니 넘나 좋은 것. 더군다나 화인 거상이나 쿨리들뿐 아니라 화교 여성들의 삶도 중요한 테마의 하나로 삼아 조망한 것은 여성 학자가 쓴 책이기에 가능했을 것.
커다 해안은 인도에서 출발하는 범선의 첫 기착지였고, 수마트라 북동안과 버마 남부, 태국 남서부 해안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들 말라카해협 북부 지역의 사람들은 바다와 무역풍의 영향으로 생활방식이나 경제적으로 긴밀했다. 18세기 후반 인도의 식민지배를 굳힌 영국은 인도의 아편과 중국의 차를 교역하는 영국 무역선이 배를 보수하고 보급품도 조달받을 항구가 절실해졌다. 인도-중국 항로의 범선들은 인도 동부 코로만델 해안에서 남서풍을 타고 북상해 커다 해안 일대에서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면 중국으로 향했다.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이 벌어지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페낭 확보 구상은 1784년부터 본격화됐다. 우선 영국이 다급했다. 말라카해협에서 배제됐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1760년대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점 무역에 반발해 독자 노선을 걷던 부기스왕국과 손잡고 리아우(오늘날 빈탄)에 후추 무역의 근거를 마련했는데, 네덜란드가 부기스와 2년간 전쟁 끝에 1884년 리아우를 점령하고 말았다. 영국으로서는 말라카해협에 거점을 마련하는 일이 절실했던 것이다. 커다도 다급했다. 전통적으로 태국이 커다를 비롯한 말레이반도 북부의 술탄국에 종주권을 행사해왔는데, 1782년 방콕에 새롭게 들어선 차크리왕조는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33쪽)
동남아 화인사회와 관련해 디아스포라 개념이 주목받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꼽힌다. 첫째는 고대로부터 서양 식민지시기까지 이어져 온 아시아의 해상교역과 관련된 것이고, 1990년대 이래 세계화의 확산 속에서 국경 너머에 존재하는 종족 집단에 관심이 쏠린 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해상교역과 관련된 디아스포라 개념은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 서사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과 닿아 있다. 15세기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한 대항해 시대라고 하는 것이 역사적 사건이기는 해도, 유럽중심주의 관점은 서양의 도래 이전부터 세계의 대양에서 교역망을 갖추고 활발하게 교역하며 살았던 디아스포라의 서사를 자율적 주체로서 다루지 못했다(Clark, 2006:386~7).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서양의 진출 이전과 이후 인도양 동쪽 해양교역이 누구에 의해,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뤄졌는가를 설명하는 틀로서 “외국인 사회에서 연계 네트워크를 갖추고 살아가는 상인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교역하는 디아스포라trading diaspora'란 개념이 도출됐다. 이 개념은 종족 집단의 이주현상에서 드러난 연관성에 주목한 후속 연구를 통해 “동일한 종족의 기원을 지닌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해외의 도시나 이방의 문화에 형성한 공동체’(Clark, 2006: 391)로 정의되었다.
20세기 후반 디아스포라 개념이 다시금 부상했는데, 이는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서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문제의식과 연관된다. 세계화의 진전으로 ‘국경 없는 세계’와 지역 블록 등 경제적 교류의 중요성이 대두하면서 국경을 달리하는 종족 네트워크로서 디아스포라 개념이 다시금 부상한 것이다. 특히 이 시기 중국이 경제적으로 급성장하면서 동남아시아 화인사회의 정체성이 주목됐다. 이는 기존의 디아스포라 개념이 식민주의와 유럽중심주의 역사를 바로잡는 역할에선 긍정적이었지만, 민족주의와 국민국가 서사의 틀을 극복하기에는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디아스포라에 관한 새로운 접근법이 ‘디아스포라의 전망 diasporic perspective'이다. ‘전망'은 누구의 어깨 너머로 역사를 바라볼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전의 디아스포라 논의가 특정 집단의 특별한 경험과 이주의 흐름에 주목한 것이라면, 디아스포라의 전망은 특정 시대와 특정 지역의 특정 이주자 공동체를 그들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84-85쪽)
바바/페라나칸의 타자는 중국에서 새로 이주한 신케sinkheh 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라카해협에서 페라나칸 화인의 역사는 15세기 말라카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 명대의 대항해가 정화(1371~1434)의 원정기에도 말라카왕국에 화인사회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교역의 속도와 규모가 커지면서 오랜 역사의 아시아 지역이 앤서니 레이드(Reid, 1988, 1993)가 명명했듯이 ‘상업의 시대’(1450~1680)로 불리게 된 것은 서양 식민지화 이전 시기의 일이다. 동양과 서양의 해상 교차로로서 동남아시아에서 항구에 기초한 정치권력들은 해상을 통과하는 해상교역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유럽과 중동, 인도, 중국, 일본의 상인들이 해상의 주요 항구에 기지와 지사를 건설하고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만들었다(Clark 2006: 391), 이렇게 생겨난 항구 도시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정착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임시 머무는 거처를 의미했다.
중국인은 15세기부터 18세기 말까지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을 지배했다. 18세기를 ‘중국인의 세기Chinese century'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Blussc, 1999; Reid, 1997: 11~14). ...이를 두고 화인 연구가 왕궁우(Wang, 1991b)는 '제국 없는 상인들’이라고 했다. 이 시기 복건성 출신 중국 상인들이 동남아 해상교역에서 제국이란 공권력의 뒷받침 없이도 거대한 교역 제국을 건설했다는 의미이다.
(87쪽)
코라이환은 둘째 아들 코안펭을 장남과 다른 길을 걷게 했다. 중국으로 되돌려보낸 것이다. 코안펭은 아편전쟁으로 유명한 양광총독 임칙서의 막료를 지냈고, 그의 아들은 대만에 정착했다(Khor, 2006: Appendix I). 이는 장남에게 현지 사업을 맡긴 코라이환이 중국 교역을 염두에 두고 차남을 보낸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페낭의 페라나칸 화인들이 영국 식민 당국과 조국인 중국 양쪽에 ‘이중의 정체성을 그다지 부대낌 없이 지니고 있었음을 방증하기도 한다.
코라이환의 장손이자 코콕차이의 아들 코텡춘Koh Teng Choon(?~1874)은 페낭 항소법원의 통역관으로 일했고, 태국에서 관리를 지내기도 했다. 코텡춘은 ‘페낭 빅 5'를 이끌던 쿠 씨의 뇨냐(khoo Sim Neoh)를 아내로 맞았다. 한편 코라이환의 손녀인 코켕옌Koh Keng Yean은 쿠콩시의 실력자인 쿠쳉림Khoo Cheng Lim(1808~1853)의 아내가 됐다. 이는 페낭 최고의 페라나칸 명문가인 코 가문과 페낭 화인사회의 신흥세력인 쿠 씨 일족의 동맹을 의미했다. 후술하겠지만 19세기 후반 페낭 아편팜 신디케이트를 이끌고 싱가포르는 물론, 홍콩의 아편팜까지 거머쥐었던 코샹 Koh Seang Tat (1833~1910)이 코텡춘의 아들이자 코라이환의 증손이다(Wright, 1908: 755, Trocki, 2009:213~216).
코라이환의 이름은 뜻하지 않은 곳에서도 나온다. 신해혁명 4년 뒤인 1915년 중국 북경대학교 교수를 지내며 중국학의 기초를 닦은 고홍명(1857~1928)이 코라이환의 증손이다. 고홍명의 부친은 영국인 농원의 관리인이었다. 명석했던 그는 열 살 때 귀국하는 영국인 농원주의 손에 이끌려 영국에 유학했다. 고홍명은 1877년 스무 살 나이에 영국 에든버러대학과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도시공학과 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천재였다.
영어, 독어, 불어, 라틴어 등 서양 9개 언어를 구사하며 문학과 철학 등 13개의 학위를 딴 고홍명은 1880년 돌연 페낭으로 돌아왔고, 정체성을 고민하던 젊은 서양 문화 전공자는 갑자기 중국 문화 연구로 공부의 진로를 바꿨다. 모두가 서양 문물만 쳐다볼 때 젊은 천재는 논어로 돌아간 것이다.
고홍명은 1885년부터 호광총독 장지동의 막부에서 20년을 보냈다. 논어와 대학, 중용을 영어로 번역해 유럽과 중국의 지성계에 동양의 가치를 재고하게 했던 그는 정치적으로는 공화주의에 반대하는 보수 중화론자였다. 그런데도 채원배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를 북경대 교수로 추천했다. 고홍명은 스스로 ‘동서남북인’이라고 했다. 그가 자신의 삶을 “남양에서 태어나 서양에서 공부하고, 동양에서 결혼해 북양에서 일했다”고 요약하면서 만든 말이다. 여기서 남양은 페낭을, 서양은 유럽을, 동양은 일본(일본인 아내), 북양은 중국의 북양계 정부와 북경대를 뜻한다.
코라이환은 반청을 도모하다 남양으로 망명해 영국 식민지의 일원이 됐고, 그의 증손 코샹탓은 영어 교육을 받고 폐낭과 싱가포르의 아편팜을 장악했으며, 고홍명은 유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고 청조가 무너진 중국에서 공자를 가르쳤다. 코라이환과 후예의 삶은 페낭화인사회만큼이나 다채롭다.
(98~100쪽)
아편팜으로 자본을 축적한 페낭의 화상은 19세기 중반 이후 주석광산 개발을 통해 거상으로 거듭났다. 이들은 자본가이자 기업가entepreneur였고, 근대적 의미의 부르주아이기도 했다. 말라카해협 북부에 넓고 복잡한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한 페낭의 화인사회는 1840년대 이후 주석광산 개발로 한층 영향력을 키웠다. 페낭의 중국인 부자들은 19세기 말~20세기 초 서양의 자본과 기술이 본격적으로 밀려들기 전까지 해협 북부 일대의 자본 공급을 주도했다. 19세기 중반 이후
페낭의 화인엘리트는 주석광산 개발을 주도하며 말라카해협 북부에 ‘페낭 화인권’으로 일컬을 만한 거상의 시대를 연 것이다.
(175쪽)
(페낭을 지역 중계무역항으로 재편하려는 영국의) 구상을 실현한 동력은 영국 상인과 유럽 자본이 아니라 아편팜을 장악한 페낭의 중국인 상인과 자본, 그리고 아편에 중독되어야만 했던 중국인 쿨리의 노동이었다. 이처럼 영국 식민지 페낭섬 바깥에서 자본을 투자하는 페낭의 중국인 거상과 주석광산의 노동력을 담당한 대규모 중국인 쿨리의 존재는 이전 상업시대 ‘교역하는 디아스포라의 화인사회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1848년 말레이반도 술탄국인 페락 북부의 라룻Larut 지역에서 대규모 주석 매장량이 확인됐다. 아편팜으로 자본을 축적한 페낭의 상인들이 라룻의 주석광산 개발에 뛰어들었다. 주석 붐을 만난 페낭의 경제와 화인사회는 영국 식민지 페낭의 경계를 넘었다. 주석 개발 붐으로 페낭의 화인 자본이 영국 식민지 바깥의 지역 경제와 밀착되면서 19세기 페낭 화인권이 구축될 수 있었다.
말레이반도의 페락과 태국의 푸켓에서 주석 개발은 20세기 초까지 전적으로 중국인의 자본과 노동으로 이뤄졌다. 페낭의 유럽인 무역상들은 대양 간 교역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중국인이 장악한 교역 시스템에 참여하는 정도에 그쳤다. 19세기 내내 유럽 자본은 말라카해협 북부 지역의 교역 주도권을 쥐지 못했고, 주석 개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페낭을 중심에 놓고 본다면 19세기의 해협 북부 지역은 ‘화인 거상의 시대’였다(Chuleepon, 2009; 112~113).
페낭의 화인사회는 독자적인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으며, 주석광산과 농원 개발 등에서 기업가의 역량을 발휘했다. 이는 동남아의 화상이 서양 제국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매판Compradore이라거나, 서양 자본과 현지 소비자를 잇는 중개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기존의 고정관념과는 사뭇 다르다.
(178~179쪽)
페낭 화인권은 인도-중국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1786년 페낭을 점거할 때나, 1819년 싱가포르를 추가로 점령할 때 영국의 설계도에는 없던 일이었다. 아울러 이 지역의 특성과 화인사회의 역사적 경험은 식민지 확장을 줄거리로 하는 유럽 중심의 역사나, 민족주의의 틀에 갇힌 국민국가의 서사에서 누락되거나 간과되어온 주제이다.
물론 19세기 후반이 유럽 열강이 주도한 제국의 시대이자 산업화의 시대였으며, 세계의 경제가 글로벌 교역 시스템으로 통합되던 거대한 전환의 시기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동남아에서 서양의 상업적 진출과 상대적으로 독립된 지역 교역권이 존재했던 시기였다는 점, 동남아의 사회적, 정치적 전환이 상업적 경제적 전환과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근래 동남아 연구자들은 식민사관을 탈피하기 위해 자율사의 논지를 따르면서도, 국민국가라는 좁은 서사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서 페르낭 브로델Fenand Braudel이 제시한 지중해의 관점에서 동남아를 통합적으로 전망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Loh, 2009: 28). 16세기의 지중해가 그러했듯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말라카해협을 경제적으로 통합된 지역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19세기 페낭 화인권에는 영국과 네덜란드, 말레이 술탄국과 태국 등 상이한 정치권력이 존재했다. 복잡하게 얽힌 제국과 지역과 종족의 구조적 요인들이 화인 교역 네트워크에 그대로 반영됐다. 19세기 이 지역의 상이한 정치체마다 현안은 달랐지만, 그 현안의 중심은 중국인 이주자, 즉 화인사회였다.
(212~213쪽)
태국 화인 사업가 커심비Khaw Sim Bee(1856~1913)는 1900~1913년 푸켓을 포함한 광역 행정구역인 몬톤 푸켓 Monthon Phuket의 최고행정관을 지낸 관료이자, 가족회사를 중심으로 20세기 초 폐낭 화인권 최대의 그룹을 이끈 기업가였다. 1916년 화인에 태국 시민권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태국식 이름을 강제한 법령에 따라 커 가문은 라농Na Ranong이란 태국식 성을 취했다. 나 라농 가문은 오늘날에도 홍욕Hongyok 가문과 더불어 푸켓을 대표하는 중국계 태국인 명문가로 꼽힌다. 홍욕 가문은 20세기 푸켓 최대 주석광산업자인 탄친관Tan Chin Guan(1888~1962)이 ‘봉황'을 의미하는 홍욕이란 태국식 창씨개명으로 시작됐다. 커심비가 몬톤 푸켓의 최고행정관이 되기 훨씬 이전인 19세기 초부터 푸켓의 주석광산 개발은 거의 전적으로 페낭 복건 출신 탄씨가 주도했다.
태국에서 가장 큰 섬으로 말라카해협 북부 초입에 위치한 푸켓은 정크 실론Junk Ceylon, 우중 살랑UjungSalang, 살랑 포인트Salang Point, 탈렁 Thalang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주석 산지이자 교역항이었다. 당시 푸켓의 주석은 태국인이 채굴하고 중국인이 제련했다.
(221쪽)
1860년대 메단에 담배농원이 개발되던 무렵 수마트라의 교역 환경이 크게 바뀌었다. 1830년 자바 전역을 장악한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가 수마트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북상하면서 영국과 네덜란드 사이 세력 균형의 틀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는 런던조약을 맺고 말라카해협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분할한 바 있다. 런던조약의 허점은 수마트라의 지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수마트라가 정치적으로는 네덜란드의 세력권이었지만, 해협을 장악한 영국은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의 간섭 없이 수마트라와 교역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아체는 영국의 보증 아래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런던조약 덕에 19세기 전반 영국 식민지 페낭이 네덜란드령 수마트라 북동부 연안에서 교역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낭의 화인 거상들이 주석광산 개발을 위해 말레이반도로 몰려가던 1840년대 후반부터 네덜란드 동인도 정부의 군대와 자본은 수마트라 중부 이북으로 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의 북상 명분은 독립 술탄국인 아체의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다는 점과 미국이나 프랑스 등 열강이 아체를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1860년대 후반 제국주의 경쟁이 본격화하자 영국도 네덜란드의 수마트라 북상을 용인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1871년 11월 헤이그에서 ‘수마트라조약Ango-Dutch Treaty of Sumatra'을 맺고, 네덜란드의 수마트라 지배권을 확정했다. 이 조약에서도 아체의 독립은 확인됐는데도 네덜란드는 1873년 아체 침공을 단행해 수도 반다 아체를 점령했다. 이로써 아체의 술탄은 폐위됐지만, 아체 이슬람 지도자의 완강한 저항으로 1903년까지 30년에 걸친 ‘아체전쟁'이 이어졌다(최병욱, 2015: 329~30).
(232쪽)
영국 식민 당국은 법과 제도를 동원하며 유럽 자본가들의 고무나무농원 개발을 지원했다. 우선 토지법을 손봤다. 19세기 말 말레이국연방에서 대규모 땅을 100년간 장기 임차할 수 있는 토지임대차령을 제정했다. 20세기 초에는 보다 편파적이고 급진적인 토지정책을 폈다. 페락의 경우 식민 당국은 1906년 중국인과 말레이인이 소유한 나대지를 유럽인 상인과 농원주가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고무나무농원 개발 과정에서 도로와 철로에 인접한 목 좋은 땅은 거의가 유럽인 농원주에게 돌아갔다(Wong, 206: 151~2).
농원 노동자도 식민 당국이 직접 통제했다. 이전 주석광산 광부 노동력을 페낭의 화인자본에 위탁하고 방임한 것과는 판이했다. 유럽인 자본과 식민 당국은 고무나무농원의 노동자로 인도인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1912년 해협식민지 당국은 중국인 쿨리의 말레이반도 유입을 통제했고, 1928년에는 이민규제령을 통해 중국인의 해협식민지 이주도 제한했다. 이로서 1907년에서 1938년까지 말레이반도 전역의 다양한 농원에서 인도인 노동자 비중은 73.7퍼센트로 높아졌다(Wong, 2006; 142). 이 무렵 수마트라의 담배농원에서도 자바인이 중국인 쿨리의 노동력을 대체했다.
(326쪽)
둘랑 워셔로 대표되는 중국인 여성 이주의 새로운 역사는 고무의 시대, 특히 20세기 초반 30년 사이에 집중됐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화인사회는 대체로 이들 이주 여성의 후예인 셈이다. 이 시기에 중국인 여성, 그 가운데에서도 광동 출신 여성들이 대거 이주한 것은 19세기 중반 주석의 시대에 남자 쿨리의 대량 이주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배출요인과 페낭을 비롯한 영령 말라야의 흡인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우선 1920~30년대 중국 남부에서 가난한 이들은 경제적 피폐, 기근, 전란 등으로 먹고살기 힘든 시대였다. 이전의 인신매매와 달리 1920년대부터 중국인 여성이 단독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요인이 작용했다. 이는 광동 일대에서 전개된 결혼 반대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 1930년대 여성 단독으로 이주한 이들 상당수는 광동의 견직과 면직공장의 노동자였으며,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결혼 반대운동에 참여했고, 종속적인 중국인의 아내가 되기보다 기회의 땅 말라야에서 노동자의 삶을 선택한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부터 전개된 결혼 반대운동은 1919년 5 4운동 이후 임금 노동과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 문제를 자각한 여성노동자의 신문화운동으로 확산됐다. 특히 일찍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할 여건이 성숙한 광주 일대 양잠지대 여성들 사이에서 20세기 초 결혼 거부운동이 확산되었다. 부모들이 딸의 결혼 거부 결정을 지지하기도 했다.
(384쪽)
20세기 초 영국에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선전하기 위한 백과사전의 다섯 번째 책으로 1908년에 ‘20세기 영령 말라야의 실상’이 출간됐다. 1786년 페낭 건설 이래 130년에 걸쳐 영국이 말라야에서 이룬 제국의 성취를 글과 사진으로 엮은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은 출간을 앞두고 갑자기 제목이 바뀌었다. 애초제목은 ‘영령 말라야Bitish Malaya'가 아니라 ‘해협식민지와 말레이국연방Federated Malay States(FMS)이었다. 해협식민지 총독을 역임한 프랭크 스웨트넘이 1907년에 ‘영령 말라야’를 펴내면서, 통치 형태가 다른 두 식민지를 하나의 영국 영토로 간주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
말라야Malaya는 말레이반도를 지칭하는 지리 용어로 19세기 중반부터 해협식민지의 영어 신문 등에서 널리 쓰였다. 1874년 팡코르조약 이후 영국의 보호령이 된 말레이반도 4개 술탄국을 해협식민지와 구분해 영령 말라야 British Malaya로 지칭하기도 했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스웨트넘의 책이 출간되면서 사실상 공식적으로 해협식민지와 말레이국연방이란 두 개의 식민지colony가 영령 말라야라는 영토적 개념으로서의 ‘하나의 나라country로 비로소 상상된 것이다(Cooray & Khoo, 2015: 97). 이는 해협식민지와 말라야에 거주하는 화인사회에 하나의 나라를 고민하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이후 1946년 하나의 국가state로서 말라야 개념이 구체화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스웨트넘이 영령 말라야에 해협식민지와 말레이반도의 4개 술탄국으로 구성된 말레이국연방만 포함시켰지만, 이는 태국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영토의 범위를 줄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 초 영국은 이미 말레이반도 전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기 때문이다. 당시 말레이국연방FMS(페락, 슬랑오르, 느그리 슴빌란, 파항)에 포함되지 않는 말레이 술탄국 5곳 가운데 남부 조호르를 제외한 북부 4곳(커다, 클란탄, 퍼를리스, 트릉가누)의 종주권은 명목상 태국에 있었다. 1909년 방콕조약으로 태국이 이들 4곳에 관한 종주권을 포기하면서 영령 말라야는 말레이국비연방 Unfederated Malay States(UMS)도 공식적으로 아우르게 됐다.
(393~394쪽)
해협 화인사회의 화교 정체성을 더욱 첨예하고 정치적으로 만든 것은 세기말 중국의 정치적 격변과 중화 민족주의의 대두였다. 1898년 무술변법에 실패한 개혁파 강유위에 이어 1907년 혁명파 손문이 싱가포르로 망명했다. 개혁파와 혁명파 두 집단은 각각 화인사회의 마음과 돈을 얻으려 경쟁했다. 싱가포르와 페낭을 비롯해 중국인이 밀집된 주요 도시에서 강연회가 잇따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협의 화인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중국의 정치 현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1899~1901년 의화단운동은 열강에 침탈당하는 조국의 현실과 외세를 배격하는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의 대두를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해협식민지 정부는 물론 화인사회에도 충격을 줬다. 세 가지 정체성의 모순이 동시에 제기되면서 어디에 소속감을 둘 것인가에 관한 화인사회의 고민은 깊어졌다.
개혁파와 혁명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중국어 신문들이 싱가포르와 페낭에 잇달아 창간됐다. 화인사회 엘리트가 대체로 보수파였지만, 변화의 물결은 멈추지 않았다. 1910년까지 말라야 전역에 혁명파를 대표하는 손문의 동맹회 지부가 50여 개나 생겨났다. 이 가운데 가장 강력한 곳이자, 손문이 마지막으로 무장봉기를 계획한 곳이 페낭이었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 봉기로 혁명의 물결이 성과 성을 넘어 확산되면서 결국 청 왕조는 몰락했다. 그 여파는 이내 해협으로 밀어닥쳤다. 신해혁명 이후 페락의 이포에서 열린 대중집회에서 보수파였던 페낭의 화인 거상 푸추춘은 혁명파로 전향을 선언하면서, 청과 인연을 끊는 상징으로 변발을 자르기도 했다(Yen, 1976: 271).
(407쪽)
바바 엘리트에게 비밀결사와 콩시에 바탕을 두었던 화인사회의 권력은 영국이 요구하는 ‘신사’가 되기 위해 폐기해야 할 깡패의 과거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는 그렇지 않았다. 바바 신사들은 화인사회를 대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국의 신뢰를 받지 못한 것이다. 영국은 1933년 화인 등 아시아계의 진출을 차단했던 공직의 인종 장벽을 없앴다. 하지만 화인 엘리트의 기대만큼 문호가 개방되지도 않았다. 말라야의 바바 엘리트에겐 아무리 해도 제국의 2등시민이란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는 회의가 밀려들었다.
영국은 1930년대 들어 타나 물라유tanah Melayu'(말레이인의 땅), 즉 '말레이인의 국가 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느슨하게 상상된 나라인 영령 말라야를 독립된 말레이 술탄국의 연합국가로 만드는 구상이었다. 이는 사실상 화인사회와 바바 엘리트를 배제하는 움직임이었다.
영국의 ‘타나 믈라유’ 구상은 모던 걸로 대변되는 코스모폴리타니즘의 흐름에 역행했다. 기존 중국인-인도인-말레이인의 종족 간 분업체제로 운영된 식민지배의 틀을 바꾸는 것이었다. 영국 식민지의 종족 간 분업체제에 관해, 바바라 안다야(Andaya & Andaya, 2001; 242)는 “거칠게 표현해 유럽인은 행정을 장악해 식민지를 통치하고, 중국인과 인도인 이주자들은 주석과 고무로 대표되는 추출경제의 노동자이자 교역 부문의 상인으로 기능하고, 말레이인들은 농촌의 들녘을 채우면 그만인 체제였다’고 일갈한다.
종족 간 분업체제를 위해 영국 식민 당국이 기존에 맺었던 종족 엘리트와의 정치적 동맹을 재편하는 것이 바로 타나 믈라유였다. 영국은 고분고분한 농민과 어민이기를 바랐던 말레이인을 식민지의 정치적 파트너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영국 식민지배 정책의 변화는 ‘오래된 불신과 새로운 자신감’이 결합된 결과였다. '페낭 화인권’을 포획함으로써 유럽의 자본이 식민지 경제를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화인사회와의 계약을 다시 쓰게 만든 영국의 새로운 자신감이었다. 달리 말해, 영령 말라야를 영국인이 통치하고, 영국 자본이 주도하며, 말레이인이 식민지 행정을 보조하게 하려 한 것이다.
1929년 대공황의 영향도 컸다. 화인사회의 계급 갈등이 심화됐다. 페낭의 점원이나 사무원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주석과 고무 가격이 폭락하면서 광산과 농원의 노동자들은 실업자로 전락했다. 회관, 콩시, 비밀결사 등 화인사회의 상호부조 기능이 약화되는 바람에 노동자 계급은 자구책을 모색해야 했다. 1930년 창당된 ‘말라야 공산당 MCP'의 주력이 화인 노동자였던 것도 이러한 사정을 대변한다. 이를 계기로 대중의 정치세력화를 우려한 영국은 화인사회를 더 불신하게 되었고, 영국 식민 당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려던 바바 엘리트와 화인사회 대중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일자리를 잃은 화인 노동자들이 농업에 뛰어들면서 말레인과의 종족 간 분업체제도 위협받았고, 말레이인의 위기감도 증폭됐다. 1931년 인구조사에서 영령 말라야 전체 인구 가운데 중국인이 170만 9392명으로 말레이인 인구(164만 4,173명)를 앞섰다. 이는 말레이인 엘리트를 정치적으로 자극했다. 영어학교에 말레이인 재학생이 급증한 것도 이 무렵이다. 영어 교육을 받은 말레이인이 늘어나면서 예전에 영어학교 출신의 중국인과 인도인이 차지했던 식민지 정부의 하급직이 말레이인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436~4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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