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이정희 선생의 <화교가 없는 나라>를 정말 재미있게 읽으면서 한국 화교의 역사뿐 아니라 몰랐던 한국의 근대 자체를 새로 생각해볼 수 있었다면, 이 책은 화교의 역사와 함께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두루 훑게 해준다. 책 만듦새가 학교 교과서 같고 어딘가 약간 촌스러운(?) 느낌도 좀 나는데, 책장을 넘기면서 어찌나 재미있는지 그 촌스러움을 다 까먹었다.
아편 자본은 다른 동남아 대량 물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해 주는 자금원이기도 했다. 주석, 고무, 후추, 갬비어, 금, 쌀 등이다.
아편자본을 바탕으로 중국인 상인이 각 항구도시에서 항로를 개설하고, 부동산제국을 세우고, 공장 및 은행 등 각종 기업을 설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러한 아편자본의 활용을 통해 아시아의 거대도시들이 탄생할 수 있었는데, 싱가포르, 바타비아, 방콕, 사이공, 홍콩 등이 모두 아편 무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 한 세기 동안 아편 무역은 아시아 거대 항구도시들의 주요 사업이었다.
동남아시아 거대 식민도시의 중국계 노동자들은 대부분 육체노동에 종사했지만, 그 가운데 매우 높은 노동 강도를 자랑하는 직업은 릭쇼 쿨리, 즉 인력거꾼이었다. 아시아 근대도시들의 거리에서 흔하게 보이던 ‘릭쇼'라는 명칭의 인력거는 1869년 일본에서 등장했다. 이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아시아 전역의 도심에서 주요 교통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39쪽)
그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쌓은 부의 일부를 본인의 고향, 소위 교향에다 투자하기 시작했다. 지방 관료들은 그들의 투자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고 근대화할 수 있음을 깨닫고 중앙정부에 그 존재를 인정해 줄 것을 요청하게 된다. 양광총독 장쯔둥 같은 이가 대표적이다. 또한 서구식 문물이 유입되면서 청의 엘리트들 사이에 서서히 해외 거주 중국인을 서구식 ‘근대국가’의 개념에 기초하여 바라보게 되는 인식상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청 제국은 1877년 싱가포르에 영사를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1896년에는 자국민의 해외여행을 자유화해 주는 법령을 선포한다. 이를 계기로 민난인을 비롯한 중국인의 해외 노동이민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동시에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지칭할 용어가 제도화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1909년 청 제국이 선포한 국적법에 등장한 용어가 바로 ‘화교’다. 학계에서는 해외에 영구 정착한 중국계 이주민의 경우 ‘화인’으로, 그들의 2세대, 3세대 후손을 ‘화예’라고 지칭하고 있다.
쑨원은 해외 거주 중국인의 경제적 잠재력을 일찍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1924년 광저우에 광둥정부를 세운 쑨원은 그 산하에 화교사무국을 두어 해외 거주 화교를 계속해서 대륙의 제도권으로 편입하려 노력하였다.
(43-44쪽)
동남아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화교들을 배출한 대표적 지역으로는 푸젠성과 광등성이 꼽힌다. 푸젠 출신의 경우 푸젠성을 가로지르는 민강을 기준으로 민난, 민베이, 민둥 등으로 나뉘고(호키엔 Hokkien), 광둥 출신의 경우 성도인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지역(캔터니즈 Catonese), 배후의 메이저우 등으로 대표되는 커지아 지역(하카), 그리고 동북 방향의 차오저우와 샨터우를 중심으로 형성된 차오샨 지역(떼오추 Teochew)으로 나뉜다.
흔히 푸젠인을 일컫는 호키엔은 대부분 민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여기에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세기 말 진출하기 시작한 하이난 출신의 화교공동체를 추가하면, 역사적으로 동남아시아에 거주해 온 화교의 출신 지역은 호키엔(푸젠), 캔터니즈(광둥), 떼오추(차오저우), 하카(커지아), 하이닌(하이난)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물론 이는 윈난성을 통해 대륙부 동남아로 건너온 소수의 화교들은 제외한 구분이다).
(55쪽)
출신 지역에 따라 구분되는 이러한 동남아 화교 그룹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낯선 동남아시아, 그들은 난양이라 부르는 지역에 정착해 왔다.
일반적으로 말레이반도, 인도네시아군도, 보르네오섬, 필리핀군도 등 도서부 동남아시아 화교 사회에서는 민난인, 즉 호키엔이 주류이고, 태국, 미얀마,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경우 떼오추와 캔터니즈 그룹이 주류라고 알려져 있다. 커지아의 경우 도서부 동남아시아에 분포되어 있지만, 퍼져 있는 성향이 강하고, 하이난은 후발주자로 상대적으로 그 세가 약한 경향이 있다.
(57쪽)
민난 지역 대표 교향 중 하나인 진지앙 지역 출신 이민자의 동향조직 진지앙회관은 1918년 진지앙 출신 남성 이민자들을 위한 조직으로 탄생하였고, 회관 건물은 1928년에 설립되었다. 1941년 일본의 싱가포르 침략에 대항하는 화교조직의 헤드쿼터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의 무차별 폭격을 피하려는 현지인의 대피소 역할도 했다. 1942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 점령 기간 동안에는 화교의 반일활동에 대한 본보기로 위안부를 수용하는 건물로 사용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다시 지역협회의 기능을 하게 되었고, 1946년부터는 여성 회원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화교 후예의 초등교육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동향조직은 신해혁명(1911) 이후 중화민국 시기 중화 내셔널리즘이 대량의 이주민과 함께 인식되면서 중화총상회나 중화회관 등의 이름으로 통합되기에 이른다. 화교라는 용어와 함께 지역 구분을 넘어선 통합의 공동체 논리가 동남아시아 화교 사회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61쪽)
아이러니하게도, 기존의 질서가 해체되고 서구 제국에 의해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는 와중에 발생한 혼란을 기회 삼아 성장한 집단이 있었다. 바로 상인이다. 자본주의적 상업제도들과 교통 통신의 비약적 발전을 통해 더욱 광범하고도 긴밀하게 연결된 초국적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아시아의 상인은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화교 상인, 인도 상인, 일본 상인이다.
근대 인도 상인의 네트워크는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에 걸쳐 광범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는 대부분 ‘대영제국’의 확장과 함께 이루어진 것이기도 했다. ‘제국’의 확대와 더불어 수많은 인도인이 식민지 및 조계지의 관료, 경찰, 군인, 용병, 노동자 등의 역할을 부여받아 미얀마, 말레이반도, 해협식민지, 홍콩, 그리고 중국 내 각 조계지에 강제 혹은 자발적으로 이주한다. 그중에서도 인도인 상인의 진출이 두드러졌는데, 특히 영국령 말라이Britsh Malaya의 경우 1844년에서 1931년 사이에만 30만 명의 인도 상인이 진출했다.
민족이 아닌 카스트 제도와 지역 정체성에 기대어 진출한 인도 출신 상인 그룹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초지역적 상업 네트워크를 형성하였다. 예를 들어 남아시아 신드 Sind(현재의 파키스탄 지역) 지역 출신의 상인 그룹은 아시아 전역에 걸쳐 국제적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인도 남부 타밀 Tamil 지역 출신 체티어 chetiar 계급 상인의 경우 말레이반도에 진출하여 현지인과 중국인을 대상으로 부를 축적한다.
(108-109쪽)
일본 상인의 아시아에서의 상업 활동은 국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제국의 아시아 진출은 일본 상인의 진출과 함께 이루어졌고, 해외에 진출한 그들은 때로 본국의 제국적 진출의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카고타니 나오토에 따르면 19세기 말, 20세기 초 일본 상인이 아시아의 역내무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화상의 네트워크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시기까지만 해도 화상의 상업 네트워크가 압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1920~1930년대가 되면 역전된다. 타이완 식민지에서 재배한 차와 가공한 고무 제품을 앞세운 일본 상인이 화상의 앞마당이던 동남아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앞서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일본 상인의 경우 당시 일본의 아시아 식민지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느라 아시아 전역에 걸쳐 형성해 놓고 있던 요코하마정금은행과 타이완은행의 금융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112-113쪽)
1930년대에 이르면 만주사변으로 반일감정이 전 중화권을 휩쓸게 되는데, 해외의 중국계 기업가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홍콩과 싱가포르의 화상은 연일 국화 운동을 벌이며 일본 상품을 배척하고 국화를 애용하자고 난리법석을 피웠다.
쿼훼이잉의 연구는 이면에 숨겨진 경제적 요인을 밝힌다. 싱가포르 화상이 반일운동에 참여한 것은 일본과의 동남아시아 무역시장에서의 경쟁력 약화에 그 원인이 있었다. 특히 값싼 고무창 구두를 앞세워 기존 화상과의 고무신발 시장 경쟁에서 일본 상인이 우위에 서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화상의 주요 거래 품목이던 차 시장에서의 경쟁에서도 역시 일본에 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차로 유명한 지역이 푸젠이다. 유명한 반 숙성차인 철관음, 대홍포, 무이암차 등이 모두 이 지역이 원산지이고, 이러한 차 시장을 잡고 있던 푸젠 출신의 상인이 싱가포르 화상 그룹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인 타이완으로부터 대량으로 재배되어 밀려오는 우롱차와의 가격경쟁에서 밀리게 됨으로써 수많은 차 상인이 시장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 외에 여러 품목에서 일본 상인과 동남아시아 시장을 둘러싸고 경쟁을 벌이다 일패도지하게 된 화상이 반일 보이콧 운동에 열렬히 참가하였던 것이다.
(118-119쪽)
그리 하여 우롱차가 철관음을 누르게 됐다는?
대만에 가면 늘 철관음과 우롱차를 사오는데, 아무래도 내 취향은 철관음 쪽.
호랑이연고 이야기도 나온다. 뒤에 친일파로 지탄받게 되는 오분호라는 화교 사업가가 만든 거라고.
"오분호는 1882년 당시 영국령이던 동남아 미얀마의 양곤에서 푸젠 하카 출신 화교 집안에서 태어났다....1926년에는 싱가포르를 본격적인 사업의 전진기지로 삼고, 동남아시아 전체에 ‘호랑이 브랜드’의 의약품 유통망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유통망을 1930년대 홍콩과 광저우 등으로 확대하여 초국적, 초지역적 상업 유통망을 형성한 거부가 된다.
‘호랑이 연고 Tiger Balm'로 불리는 의약품 외에 오분호가 적극적으로 진출한 영역은 언론이다. 1929년에서 1951년 사이 그는 총 17개의 ‘싱(星. 싱가포르를 의미)’자 계열 신문을 출간하였다. 그는 사업으로 발생한 이익의 25퍼센트에서 60퍼센트 정도를 자선사업에 투입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는데, 주로 교육사업, 체육사업, 하카 그룹 소속의 사회단체가 그 대상이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호파빌라 혹은 타이거 밤 가든이 있다." (129쪽)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한 권으로 훑어보기' 같은 것이 불가능하다. 흐름이 없지 않으나 그러면서도 제각각이고, 국내에 출간돼 있는 책도 적다. 이 지역에 대한 책을 읽은 것이 대체로 10여년 전이지만, 당시에는 더더욱 나와 있는 책이 적었다. 몇 권 읽고 나니 더 읽을 게 없어서(...) 중단했던 기억이. 실은 대단히 오래된 나라인 인도에 대한 책들도 역사/정치경제를 다룬 것들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하물며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등에 대해서는...
15세기를 전후한 시기 유럽-서아시아-남아시아-동남아시아-동북아시아로 이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있던 세력은 이슬람 상인이었다. 그 영향으로 당시 말레이 지역과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오랑라웃 Orang laut이라 불리던 로컬의 해상민족과 중국인 상인의 경우 이슬람 상인의 상관행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현실적 고민이 그들을 이슬람교로 개종하게 만든 직접적 요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 15세기 이후 가속화되는 도서부 동남아시아 지역의 이슬람화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다. 대표적인 지역이 현재 인도네시아 자바섬 북부 해안가를 중심으로 형성된 항구도시들이다. 데막 Demak, 수라바야, 켄달 Kendal 등 자바 북부 해안 지역은 동서교역의 주요 교통로이자 1400년대 초 이슬람으로 개종한 믈리카와 향신료의 주요 산지인 몰루쿠제도Maluku Islands(향신료 제도)를 연결해 주는 중개지역으로 이슬람 상인 중심의 항구도시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에 따라 푸젠, 광둥으로부터 건너온 중국인 상인들 역시 주요 거점인 자바섬 북부 지역에 자리 잡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상당수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168쪽)
자바 북부에 형성된 다종족 이슬람 세력들은 1572년 큰 사고를 치게 되는데, 바로 당시 자바 중·북부 지역과 발리섬을 장악하고 있던 강력한 자바인들의 왕국인 마자파힛 Majaphahit 왕국을 멸망시킨 것이다.
(마자파힛은) 현재 국민국가 인도네시아의 원형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자바섬을 기반으로 한 해상왕국이었다. 데막의 이슬람 상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바 북부 항구도시들 간의 이슬람 연합 세력이 결국 힌두, 불교 중심의 마자파힛 왕국을 패배시키고 자바 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중부 자바에는 마타람 Mataram 술탄국이, 서부에는 반튼 Banten 술탄국이 형성되어 자바섬의 이슬람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살아남은 일부 소수의 마자파힛 왕가의 인물들이 발리섬으로 피신하여 힌두 문명을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그런 이유로 현재까지도 발리섬은 인도네시아 내에서 유일하게 힌두교를 믿고, 희미하게나마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는 지역이다.
'중국에서 이슬람화한 중국인’과 ‘동남아에서 이슬람화한 중국인 간의 교류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역사적 사건이 바로 명대 1405년에 시작된 쩡허의 남해대원정이다. 쩡허의 원래 이름은 마화로 중국 윈난성 쿤밍 출신이다. 성인 마는 당시 중국 내 무슬림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으로 원래부터 이슬람 가정에서 태어난 이슬람교도라고 알려져 있다.
(169-170쪽)
19세기 말 20세기 초 본국에 중화 민족주의에 기반한 공화국이 성립하면서 많은 화교가 현지화하려는 노력보다는 본국과의 연계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 과정에서 이슬람으로의 개종은 선택지에서 서서히 사라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시기 물밀 듯 들어오는 신이민의 행렬로 화교공동체의 사이즈가 커졌다는 것 역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세 번째로는 네덜란드 식민 정부의 역할이다. 식민 정부는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의 내부에 대농장과 광산을 짓고는 대규모의 식민지를 경영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주로 행했던 전략이 중국계 공동체를 원주민 공동체와 분리시킴으로써 ‘디바이드 앤 룰' 전략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 영향으로 인해 인도네시아의 중국계 무슬림은 현지의 이슬람공동체뿐 아니라 화교공동체로부터도 이중의 차별을 당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처지는 1945년 인도네시아가 독립한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계 공동체 내에서 무슬림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83년 통계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전체 화교 가운데 0.5퍼센트만이 무슬림으로 분류되었는데, 2010년 통계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중국계 인구가 260만 명이고, 그 가운데 무슬림은 약 13만 명이다. 대략 5퍼센트로 그 비중이 늘어났음을 보여 주고 있다.
(174-175쪽)
(포르투갈의) 유산은 동남아시아 사회에 여전히 유라시안 Eurasian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라시안은 주로 포르투갈인을 비롯한 유럽인(네덜란드, 영국)과 그 혼혈의 후예가 현지화하여 형성한 소수 그룹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현재 싱가포르는 흔히 세 인종(중국, 말레이, 인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겨지지만 최근 유라시안을 제4의 종족으로 인정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지난 2018년에는 리셴룽 총리가 유라시안 협회의 행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가장 초기의 유라시안은 포르투갈과 아시아인 사이의 혼혈인 메스띠꼬스이고, 그들의 후예를 끄리스땅 Kristang이라 부르기도한다. 주로 포르투갈인과 말레이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의 후예를 가리킨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전역에 3만 7,000명 정도 거주하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포르투갈 계통이 많고, 다음으로 네덜란드 계통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은 아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다가 19세기 싱가포르가 영국의 식민지로서 다양한 종족이 모여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럽인에게 살기 편한 인프라를 갖춘 도시로 성장하면서 대거 모여들게 된다.
이들의 한 가지 특징은 혼혈로서 동남아 지역사회에 깊이 적응하고 있었지만, 친서구적 특성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심지어 유라시안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가 네덜란드와 독립전쟁을 벌였을 때에도 네덜란드가 형성한 연합군에 소속되어 인도네시아인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86-187쪽)
아시아의 보어인들이었군.
중국인 남편을 맞이한 현지 여성은 스스로 직접 현지 사회와 남편 사이의 상업 협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고, 해외 교역과 같은 상업 분야에서는 오히려 여성이 주도하고 있었다는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인이 현지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현지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는 유럽인의 이해관계 역시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스페인인은 카톨릭으로 개종한 중국인에게 마닐라 주변의 현지 농촌 마을에 거주하여 경작물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고, 중국인은 연간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현지 농촌사회와 마닐라를 자유롭게 오가며 상행위를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중국인이 현지 농촌의 필리핀 여성과 결혼하였고, 그 결과 메스티조라 불리는 혼혈이 발생하였다. 메스티조 그룹은 스페인령 필리핀 사회에서 농촌의 경작물을 구입하여 마닐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고, 19세기에는 미국 및 영국으로부터 온 해외 기업과의 무역 역시 담당했을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189쪽)
중국 상인, 힌두 상인, 불교 상인의 각 공동체는 내부의 장을 뽑아 통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해상교역의 전통적 관행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이 공식화하여 마치 제국의 식민지 공무원처럼 활용하였으니 바로 ‘까삐딴’ 시스템이다. 중국인 공동체의 경우 무조건 그 그룹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이’가 까삐딴으로서 권력을 갖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우 18세기 후반, 19세기에 급증한 신이민자(영국령 말레이 및 해협식민지에서는 싱커 Singkeh,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토톡 Torok)를 통제하기 위해 지역별로 까삐딴을 두었는데, 이 경우 대부분 일찍부터 정착하여 돈이 많고, 언어에 능해 중개자로서 기능을 잘할 수 있는 페라나칸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까삐딴을 중심으로 한 구이민 그룹과 페라나칸은 중국계 공동체 내에서는 영국 및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권위 아래 거의 독보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194쪽)
뒷부분에는 싱가포르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패배한 영국 동인도회사(LIC)가 동남아시아에 다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18세기 말 인도에서의 지배를 확립하고, 산업혁명으로 생산력 및 경제 규모에서 네덜란드를 비롯한 다른 유럽 제국주의 국가를 명백히 앞질렀을 즈음이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믈라카를 제외하고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그리 큰 관심을 받지 않고 있던 말레이반도를 공략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주요 항구도시들을 중심으로 내륙을 공략하였다. 1786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재정 부족과 부기스인 Bugis(말레이인의 한 갈래로 해상무역을 장악하고 있던 역내 해상민족) 및 시암왕국Siam(현재의 태국)의 위협에 시달리던 말레이반도 북부 끄다 Kdah 지역 술탄에게 무력을 이용한 보호를 미끼로 페낭을 구입하였다. 이후 페낭은 영국의 보호 아래 서구와 인도의 상품을 주석, 후추, 고무, 향신료 등으로 교환하는 거대항구로 성장하게 된다.
한편 1819년 영국 동인도회사의 스탬포드 래플스가 말레이반도 끝에 붙어 있는 섬을 발견하고 영국의 대아시아 지역 전략의 핵으로 삼을 계획을 세운다. 바로 동남아시아 영국 식민지의 핵심, 싱가포르의 시작이다.
말레이반도 전통의 항구도시인 믈라카 역시 182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로부터 영국으로 할양된다. 이후 영국 동인도회사는 1826년 페낭, 싱가포르, 믈라카로 이어지는 말레이반도 서부의 핵심 항구도시를 묶어 해협식민지 Straits Settlements를 설립하여 별개의 식민지 행정구역을 설치하였다. 해협식민지를 구성하고 있는 세 항구도시의 특징은 무역 중심의 식민지 거대도시라는 점과 인프라 건설을 위해 영국 동인도회사가 중국인의 이주를 독려하여 대다수의 인구가 중국인이었다는 점이다. 거기에 더해 인도로부터 인도인의 이주 역시 영국의 강제, 혹은 독려로 급증하고, 그 결과 해협식민지는 중국인, 인도인(주로 타밀인), 말레이인, 영국을 비롯한 서양인, 유라시아인(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유럽인과 현지 말레이인 사이의 혼혈 및 그 후예) 등이 공존하는 19세기 동남아 시아의 대표적 코스모폴리탄 지역으로 성장하였다.
(206-207쪽)
인도네시아는 늘 관심 대상이지만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는 딱히 그럴 일이 없었다. (김정남 피살을 빼면) 분란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문제가 딱히 없는 나라들;;이라.
무엇보다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책이 자바인에게 끼친 중요한 영향은 자바인이 자체적으로 농업과 상업, 산업에서의 발전을 경험할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동남아시아 해양문명의 대표적 상업집단으로 꼽히던 자바인은 네덜란드의 식민정책을 계기로 대부분 농노로 전락하게 되고, 그 빈자리를 식민지 정부와 결탁한 화교가 차지하였다. 자바섬 각지에 설치된 대농장을 모두 직접 관리하기 어려웠던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그 대리 경영을 화교에게 맡겼고, 이들은 각 지역에서 지주 및 지배계층으로 활동하며 현지인의 노동환경을 관리하였다.
주로 현지에 일찍부터 뿌리를 내린 조상을 가진, 현지에서 태어난 이들을 ‘페라나칸’이라 지칭하였고, 자바에 거주하는 현지인의 경우 인도네시아의 독립 이후 ‘프리부미pribumi’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그리고 19세기 이후 강제경작제도로 각지에 형성된 대농장의 노동자로 대량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중국 본토 출생 신이민자의 경우 ‘토톡Totok'이라 불렸다.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던 페라나칸과는 달리 토톡은 현지인과 다름없는 일용직 노동자였고, 때로는 농업 지역에서 작은 소매업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페라나칸과 토톡의 존재는 자바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지역의 상업 활동이 대자본가의 영역에서부터 중소상인의 영역까지 모두 중국계 이주민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음을 상징한다. 그 아래에서 프리부미라 불리는 자바와 주변 섬의 현지인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와 중국인에 의해 이중으로 억압을 당해 왔다.
(248-249쪽)
1942~1945년 사이 일본의 침략은 네덜란드 세력이 없는 정치적 공백과 더불어 현지인에 의한 지역 통치라고 하는 새로운 경험을 프리부미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 이후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자바를 포함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은 독립을 선언하였고,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250쪽)
인도네시아 현지인은 엘리트 계층과 대중을 막론하고 서구식 근대화와 경제적 발전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제 (아마 대부분 농업 종사자이거나 영세한 소매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10만 명 이상의 화교가 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후반이 되면 도시 지역의 화교 기업가들은 쿠데타로 수카르노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수하르토를 중심으로 현지 권력과 유착관계를 맺고 인도네시아 경제에 더욱 깊숙이 개입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이들 유력 화교 기업가 들은 이미 수카르노 정권 시기부터 현지 군부 엘리트들과 후원 계약을 맺고 생존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로 인해 생존한 화교 기업가들의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강력하다.
(257쪽)
베란다 공간, 거기서부터 파생된 싱가포르 등 동남아의 독특한 회랑식 주상복합 건물들, 거기 영향을 미친 방갈로 이야기는 정말 잼나다. 귀환 화교들이 사는 중국의 '발리 마을' 이야기도 그렇고.
베란다 공간의 출현은 19세기에서 20세기 동남아시아 주요 도시와 중국 동남부(광둥, 푸젠) 지역 주요 도시에 형성되어 있던 주상복합의 건축양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초국적으로 퍼져 있는 양상만큼이나 이러한 건축양식을 가리키는 용어 역시 매우 다양하다. 숍하우스shophous, 파이브 풋웨이 five foot way, 카키 리마 kaki lima, 치로우, 우쟈오치표, 베란다 하우스 등등이다.
(건축양식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크게 몇 가지로 나뉘는데) 우선 중국 대륙의 건축문화로부터 기원을 찾는 연구들이 있다. ‘점옥'이라고 불리는 주상복합의 건축양식이 이미 중국 동남부 연해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주로 선착장에 접하여 일층은 상점 혹은 작업장, 이층은 주거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 기원을 남아시아의 벵갈 지역에서 찾는 연구도 있다. 17~18세기에 걸쳐 벵갈 지역에 거주하게 된 영국인은 벵갈인 특유의 주거 형태인 방글라 Bangla(혹은 Bengali)에 유럽식 건축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건축 형식을 탄생시키게 된다. 지붕을 넓혀 현관 전면의 일정 공간까지 덮을 수 있도록 설계하였고, 앞으로 튀어나온 지붕 양옆으로 기둥을 세움으로써 완전히 개방된 형태의 공간을 가진 건축양식이 형성된 것이다. 벵갈 지역 특유의 주거 형식인 방글라는 19, 20세기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변형이 이루어지며 벙갈로우 Bunglow라고 불리게 된다. (209-211쪽)
송대 이후 명 청 시기까지 중국 동남 연해 지역의 주요 항구도시에는 ‘점옥' 형태의 주상복합의 건축양식이 존재하였고, 이러한 건축양식은 푸젠과 광둥 출신 중국 상인 및 노동자가 동남아시아로 진출하 면서 외부로 전파되었다. 특히 말레이시아와 자바섬의 주요 항구도시에 형성된 중국인 거주지와 시장에는 비슷한 형태의 건축양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후 영국 식민제국이 말레이반도에 진출하면서 19세기 초기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도시 개발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가져온 벙갈로우 건축양식을 도입하였고, 동시에 중국의 주상복합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동남아시아 특유의 식민지 도시건축문화, 즉 숍하우스 건축문화를 형성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숍하우스 형태의 건축이 행정 시스템의 필요에 의해 도시 구획, 혹은 도시 개발의 한 축으로서 계획적으로 건설된 경우는 19세기 초중반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한 해협식민지가 최초였다. 이 과정에서 개개의 숍하우스를 연속적으로 규칙성 있게 붙여 놓음으로써 외랑 arcade식 공간, 즉 베란다가 발생하게 되었다. 바로 이 베란다 공간의 성격을 둘러싸고 중국인 공동체와 영국 식민정부 사이에 갈등이 벌어진 것이다.
(212-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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