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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은의 '수상한 GPS']문화유적이 공습 타깃? 트럼프 "이란 52곳 목표물" 발언

딸기21 2020. 1. 6.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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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고대 유적도시 밤(Bam)의 성채.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이라크와 가까운 이란 서부의 초가잔빌은 기원전 1250년 무렵에 지어진 거대한 지구라트다. 진흙 벽돌을 높이 쌓아 만든 메소포타미아의 전형적인 거대 건축물로, 페르시아보다도 더 먼저 존재했던 엘람 문명의 유산이다. 기원전 640년 앗시리아 제국의 아슈르바니팔 대왕이 이 일대를 점령한 이래 폐허가 됐으나 여전히 53m 높이의 위용을 자랑하며 고대 역사의 흔적을 찾는 이들을 맞고 있다.

 

초가잔빌의 지구라트, 샤흐르-이 수크테(‘불에 탄 도시’)의 청동기 시대 인류 정착지,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와 수사의 아파다나 왕궁, 다리우스 대왕 시절의 유적과 기원전 5세기 슈슈타르의 수리(水理)시스템, 인구 673명의 유목민 마을, 18세기 카자르 왕실의 유산인 테헤란의 골레스탄 궁전, 몽골의 점령과 파괴 속에서도 살아남은 높이 53m의 곤바드 이 카부스 영묘, 도시 전체가 유적인 이스파한, 페르시아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는 술타니야의 푸른 돔, 7세기에 지어진 아르메니아 수도원, ‘파라다이스’라는 말의 연원인 페르시안 가든. 이란이 자랑하는 유적이자 인류의 문화유산들이다.

 

이스파한의 마스지드 이 자메 모스크.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10만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이란 땅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곳들 중 하나다. 그리스와 몽골과 아랍과 투르크의 점령을 모두 견뎌낸 장구한 역사를 갖고 있고, 그만큼 여러 문명이 남긴 유적과 문화유산들이 많다. 유네스코 세계유산만 24곳이 지정돼 있다.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자부심도 크다. 2003년 유서 깊은 고대 오아시스 도시 밤(Bam)에 지진이 나자 미국도 나서서 구호를 도우며 호의를 보였고, 잠시 화해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역사와 문화를 위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일(현지시간) “이란 내 52곳의 공격목표를 정해뒀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미군이 이라크에서 이란 혁명수비대 장성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공습으로 살해한 뒤 긴장이 급격히 높아지던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반격을 해오면 “아주 빠르고 강력하게” 타격할 것이라면서, 공격 타깃인 52곳이 “이란에, 이란 문화에 중요한 곳들”이라고 명시했다. 이란이 거세게 반발했을 뿐 아니라, 국제법에 위반된 전쟁범죄를 저지르겠다는 것이어서 거센 비판이 일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 글.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은 5일 트위터에 “역사의 밀레니엄(천년)들을 거치면서 야만인들이 우리 도시들과 도서관과 기념물들을 파괴했다. 우리는 여기 이렇게 서 있는데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글을 올렸다. 이란 온건파의 얼굴로서 서방을 상대해온 자리프 외교장관은 이례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범죄”를 저지르려 하고 있다며 격하게 비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글을 수시로 반박해 이란 젊은이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어온 모하마드 아자리 자흐로미 정보통신부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을 이슬람국가(IS), 아돌프 히틀러, 칭기즈칸에 비유하면서 “양복을 입은 테러리스트”라 지칭했다.

 

압바스 무사비 이란 외교부 대변인은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초강대국의 대통령이 문화유적 공격은 전쟁범죄라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에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이란 외교부는 또 테헤란에서 미국을 대리하는 역할을 해온 스위스 대사를 불러 트럼프 대통령의 트위터 글에 공식 항의했다.

 

이란 서부 초가잔빌의 지구라트.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지난 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국제사회는 민간인 대량살상을 막고 인류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전쟁의 룰’을 만들어왔다. 1907년 헤이그 규약 56조에는 ‘역사적인 기념물(historic monuments)’을 폭격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 들어갔고, 1954년 헤이그협약의 ‘문화적 자산의 보호’ 규정으로 정식화됐다. 헤이그협약을 다시 다듬은 1999년 2차 의정서는 규정을 더욱 세분화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도 2017년 문화유산 파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이 세계에 악명을 떨친 계기는 2001년의 바미얀 석불 파괴였다. 2003년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은 박물관 약탈을 막기는커녕 유물을 미국으로 빼돌리고 온라인 경매사이트 이베이에 내다팔아 세계의 지탄을 받았다. IS의 시리아·이라크 유적 파괴, 특히 2015년 팔미라 신전 파괴는 이들을 인류의 공적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였다. 이란 정치분석가 메흐르다드 하디르는 AP통신에 기원전 330년 그리스인들의 침략 당시 페르시아 도시들이 파괴된 것을 언급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새로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되겠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하늘과 땅과 물과 식물이라는 4개 요소를 바탕으로 꾸며진 이란의 ‘페르시아 정원’은 독특한 조성양식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센터

 

고대 유적이 아닐지라도, 테헤란의 아자디탑(자유탑) 같은 혁명기념물이나 아야톨라 호메이니 영묘처럼 상징적인 곳들을 미국이 폭격대상으로 정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이란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 헤이그협약은 민간인 거주지역과 역사유적뿐 아니라 교육, 과학, 문화, 자선·종교시설을 폭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파장이 커지자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5일 폭스뉴스, ABC방송 등과 인터뷰를 하면서 “대통령의 발언을 아주 자세히 읽어보면, 문화유적을 공격하겠다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다”라는 어설픈 변명을 내놨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도 이란의 오랜 역사와 유적들을 소개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고 있다. AP통신은 트럼프 정부 외교안보 관리들 사이에서도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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