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테러리즘이 아이들을 죽이고 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이 2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미국의 일방적인 경제제재로 의약품을 들여올 길마저 막혀, 희귀질환에 걸린 아이들이 숨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란은 의약품 공급처 중 하나였던 한국에 대해서도 ‘인도적 지원물품마저 끊었다’며 반발하고 있다. 미국의 제재로 그간 한국 정부가 공들여온 이란과의 경제관계도 파국을 맞을 판이다.
자리프 장관은 이날 트위터에 여러 차례 글을 올리며 미국의 ‘비인도적인’ 제재를 비난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향해 “미국의 이코노믹 테러리즘은 이란을 굶겨죽이기 위한 것이고, 약품 공급을 끊어 무고한 우리 시민들을 죽이려는 것”이라고 했다. 자리프 장관은 지난 6월에도 “미국의 경제 테러는 이란의 무고한 시민들을 타깃으로 삼고 있다”면서, 아이의 보철장비를 못 구해 애태우는 어머니의 동영상을 올렸다.
이란 보건부는 지난달 29일 세계보건기구(WHO)에 미국의 의약품 수입 제재에 대한 대책을 촉구했다. 보건부는 “WHO와 유엔은 미 행정부의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행태에 대응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앞서 지난달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화학무기금지협약(CWC) 회의에 참석한 골람-호세인 데카니 이란 외교차관도 미국의 의약품 교역 제재를 “반인도적이고 수치스러운 일”이라 비난했다고 테헤란타임스 등이 보도했다.
데카니 차관은 1990년대 미국이 사담 후세인의 자국민 화학무기 공격을 징벌한다며 이라크를 제재해 화학무기 희생자들이 치료를 못 받은 사태를 거론했다. 이라크는 1990년대에 미국이 주도한 제재로 식료품과 약품 같은 기본 생필품조차 구하지 못해 고통받았으며, 뒤에 유엔은 ‘석유-식량교환(Oil for Food)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제재를 완화했다.
지난달 19일 이란 프레스TV는 유전성 피부질환인 ‘수포성 표피박리증’을 앓는 아이들이 미국 제재로 약을 못 들여와 8월 이후 15명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현지 의료단체에 따르면 이 병을 앓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메필렉스라는 치료용 특수 붕대는 스위스 제약사 몰른리케 제품인데 미국 제재로 수입이 끊겼다. 피부가 벗겨져 ‘나비 날개처럼’ 되는 이 아이들은 이 붕대가 없으면 고통이 매우 크고, 먹고 걷고 숨쉬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척수성 근육위축으로 고통받는 어린 딸의 사진과 함께 ‘수입이 중단된 치료제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이란 어머니의 글이 소셜미디어로 돌기도 했다.
미국은 지난해 5월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를 파기한 뒤 8월부터 다시 제재에 들어갔다. 의약품과 의료장비, 식량은 제재 대상이 아니지만 미국이 금융거래를 제재하기 때문에 각국 기업들은 이란과의 교역을 중단하는 수밖에 없다.
지난해 10월 국제사법재판소(ICJ)는 미국이 제재를 유예해야 한다며 이란이 낸 가처분 소송에서 “인도적 물품과 서비스는 제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미국은 판결에 항의하듯 의약품·식료품 수입 관련 거래를 맡고 있는 이란 파르시안은행까지 제재 대상에 올렸고, 휴먼라이츠워치 등은 미국을 거세게 비판하며 철회를 요구했다.
이란과의 관계에 공들여온 한국은 인도적 차원에서 이란에 수십만 달러 어치의 의약품을 전달해왔다. 그러나 미국이 지난 9월 이란중앙은행마저 ‘테러조직’이라며 제재 대상에 올리자 모두 중단했다. 이란은 인도적 물품마저 끊는다며 한국에 거세게 반발했다. 이란 식품의약국 골람호세인 메흐랄리안 국장은 지난 10월 “이란이 의약품을 주로 수입해오던 곳 중 하나였던 한국이 미국 제재에 따라 공급을 중단했다”고 했다.
국내 시중은행들이 이란 유학생들의 은행 계좌까지 동결한 상황과 겹치며, 이란과 힘들게 맺어온 관계가 끊어질 판이다. 국내 전문가들과 외교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란은 제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한국 금융기관들마저 거래를 중단하자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란 언론들은 “한국의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은 이란중앙은행이 갖고 있던 원화 계좌를 동결했다”고 일제히 보도했고, 한-이란 상공회의소의 푸야 피루지 사무총장도 ILNA통신에 “한국 정부와 민간은 이란과 경제관계를 이어가길 바라면서도 금융거래를 유지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미국의 제재로 의약품을 수입하지 못하게 된 것이 이란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수치로 확인하기는 힘들다. 미국 의회전문지 더힐에 미국 내 강경파들은 이란 제재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수 우익단체 ‘민주주의 방어연맹’ 측은 최근 의회전문지 더힐 기고에서 “이란이 원한다면 의약품을 살 수 있다”면서, 이란이 ‘의약품 부족’을 호소하는 것은 프로퍼갠다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올 상반기 유럽연합(EU)의 대이란 의약품 수출액은 3억2000만 유로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오히려 소폭 늘었고 중국의 올 1분기 대이란 의약품 수출 역시 5950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거의 같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다른 것으로 보른다. 사이드 나마키 이란 보건의료장관은 지난 10월 한국이 약품 수출을 끊었을 때 국민들을 안심시키려는 듯 “의약품 97%는 국내에서 생산하고 3%만 수입해온다”고 큰소리쳤다. 그러나 이를 믿는 이들은 거의 없다. 국내의 한 이란 전문가는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어 국민들이 체감하는 고통은 큰 것 같다”며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는 희귀질환 치료제가 끊겨 상황이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유럽국들은 미국의 제재를 우회할 방법을 찾고 있다. 지난달 27일 벨기에, 덴마크, 핀란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6개국은 공동성명을 내고 ‘인스텍스(INSTEX)’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인스텍스는 EU가 올 1월 역내 기업들이 이란과 거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출범시킨 기구다. 이 기구를 만들면서 유럽국들은 “인도적 차원에서 식료품, 의약품, 의료장비 거래부터 하겠다”고 설명한 바 있다. 이란과 교역하고 싶은 기업이 인스텍스에 돈을 내면 인스텍스가 대신 결제를 하게 된다. 하지만 결제 보증이 어렵고 미국의 세컨더리보이콧(2차 제재)을 우려하는 기업들이 많아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북유럽 6개국은 이번 성명에서 “유럽과 이란 간의 합법적인 거래는 계속돼야 한다”면서 “인스텍스의 주주로서, 우리는 각국 내에서 관련 절차를 완료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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