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NB 담배’. ‘아이코스’나 ‘글로’처럼 ‘태우지 않고 가열하는(heat-not-burn)’ 담배다. 담뱃잎이 타지 않을 정도의 열을 가해 흡연자가 니코틴을 흡수하게 하되 불에 태우지는 않는 담배를 가리킨다. ‘찌는 담배’로 불리는 이런 담배의 역사는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코스 등의 유행은 새 시장을 개척하기 힘들어진 담배회사들이 오랜 시도와 치밀한 상술 끝에 이뤄낸 성공인 셈이다. 하지만 지난해 한국에도 상륙한 궐련형 전자담배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실패 거듭한 궐련형 전자담배
필립모리스의 아이코스가 찌는 담배의 대표 상품처럼 돼 있지만, 맨 처음 이런 담배를 내놨던 것은 이 회사가 아니었다. R.J.레이놀즈가 1988년 출시한 ‘R.J.레이놀즈 프리미어’라는 제품이 원조다. 하지만 이 제품은 흡연자들에게 외면당했다. ‘담배 맛이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였다. 이 제품은 담배 안에 글리세린을 다량 집어넣어서, 가열하면 글리세린이 안으로 퍼지면서 니코틴이 뿜어져나오게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히트를 치는 데에 실패했고, 이듬해 R.J.레이놀즈는 3억2500만달러나 투입했던 찌는 담배를 시장에서 철수시켰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이 담배를 일반담배와 똑같이 규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도 한 원인이 됐다.
필립모리스가 2007년 출시했던 궐련형 전자담배 ‘히트바’. _ 위키피디아
1990년대 중반에 R.J.레이놀즈는 프리미엄을 업그레이드해 ‘이클립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내놨다. 하지만 이 또한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끝내 포기하지 않고 ‘레보’라는 이름의 대체 상품을 내놨으나 2015년에는 이것도 생산을 중단했다.
필립모리스는 1998년에 ‘어코드’라는 상품을 내놨다. 배터리를 충전해 가열하는 이 담배는 당시 유행하던 통신기기인 페이저(삐삐) 정도의 크기였다. 역시 시장의 반응은 미지근했고, 2007년 이 회사는 ‘히트바’라는 걸 다시 출시했다. 이번엔 크기가 휴대전화만큼 커졌다. 흡연자들에게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으며 뒤에 아이코스를 개발하는 발판 정도의 의미에 그쳤다.
2017년, 담배회사들의 ‘혁명의 해’
상황이 바뀐 것은 지난해다. 궐련형 전자담배들이 시장을 뒤흔들었다. 아이코스는 ‘평범한 담배는 그만둔다(I-Quit-Ordinary-Smoking)’의 약자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 나온 것은 2014년 6월이었다. 필립모리스는 이전의 실패를 발판삼아 아이코스의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였다. 맨 처음 제품이 출시된 곳은 미국이 아니라 이탈리아 밀라노와 일본 나고야였다. 필립모리스인터내셔널(PMI)의 여러 부문 중에서 말보로와 팔러먼트를 담당하는 쪽에서 아이코스 마케팅을 맡았다.
자료 나스닥(www.nasdaq.com)
출시 국가는 2016년 20개국으로 늘었고, 지난해에는 31개국으로 늘었다.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세계의 흡연자 370만명이 태우는 담배 대신 아이코스를 택한 것으로 집계됐다. 나스닥 웹사이트에 따르면 지난해가 이 회사에는 ‘변신의 한 해’였다. 아이코스의 성공을 발판 삼아 필립모리스는 영국 시장에서 ‘담배 없는 미래’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려 하고 있다. 담배회사가 ‘담배 없는 미래’를 자신하는 형국이다. 영국 언론들은 필립모리스가 아예 영국에서 기존 스타일의 담배 판매를 중단할 계획까지 갖고 있다고 보도했다. ‘암 유발자’로 낙인찍혀 설 곳을 잃어가던 담배회사 입장에서 아이코스같은 담배의 성공은 그야말로 숨통을 틔워주는 ‘사건’이었다.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BAT)의 글로는 아이코스와 함께 찌는 담배 시장을 이끌고 있다. BAT는 2015년 루마니아, 2016년 일본, 2017년 캐나다 등 잇달아 세계 곳곳에서 글로를 출시했다. 이 회사가 공들이는 시장은 러시아다. 2016년말 기준으로 러시아 담배시장에서 글로가 차지하는 점유율이 22.52%라고 회사 홈페이지에서 밝히고 있다. BAT러시아는 글로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사라토프와 상트페테르스부르크에 생산공장을 세웠고 3000명을 고용했다. 2015년 러시아 투자액은 28억루블이었는데 이듬해엔 56억루블이 돼 2배로 늘었다.
‘대박 이익’은 미래의 일
필립모리스의 지난해 매출액은 285억달러로 전년보다 6.8% 늘었다. 미국 시장에서 성공한 것이 컸다. 담배 판매가 제자리 걸음이었던 몇년 간의 추세와 비교하면 지난해의 매출 성장은 더욱 눈에 띈다. 주당 이익률은 20%로 올라갈 것으로 예상됐다. 회사 측은 아이코스 판매대수가 300억개에 도달하면 이익이 7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흡연자들이 빠른 속도로 찌는 담배를 선택하는 것에 비해, 담배회사의 이익이 아직은 그리 크지는 않다. 필립모리스는 이 제품을 개발하느라 30억 달러를 투자했다고 밝히고 있다. ‘신상’으로 담배 시장을 뒤흔든 것은 분명하지만, 담배 시장은 각국의 규제정책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미국 언론들에 따르면 필립모리스의 발목을 잡은 존재는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사우디가 지난해 조세제도를 바꾸면서 담뱃세를 많이 물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해 3분기 이후 사우디에서의 담배 판매량은 업계 전체를 통틀어 30%나 줄었다. 올해엔 다른 걸프 국가들도 비슷한 과세를 준비하고 있다. 아이코스를 판 만큼 일반담배 시장에서 타격을 입는 셈이다.
리투아니아 등은 아이코스같은 전자담배에 기존 담배와 같은 규제기준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제품마다 국가별 규제가 제각각이지만 일반담배에 준해 규제를 강화하는 나라들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아이코스 마케팅에 너무 돈을 퍼부었다. 시장의 변화를 유도하기 시작하는 단계라 홍보비용이 많이 들었고, 그래서 아이코스의 마진이 그리 크지 않았다. 가열기기가 일단 많이 보급돼야 담배 판매수익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업계에선 실제 순익증가로 이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본다.
아시아는 ‘찌는 담배’의 금밭?
나스닥 기사에서는 특별히 일본과 한국 등 아시아 시장을 언급하고 있다. 아직까지 통계에서 두드러지진 않지만 장차 필립모리스의 수입이 꽤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에선 이미 지난해 말까지 흡연자의 60%가 아이코스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 나스닥(www.nasdaq.com)
한국에선 지난해 말부터 아이코스 흡연자가 급격히 늘면서 일본을 추월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지난해 10월 닛케이는 한국이 필립모리스의 ‘가장 뜨거운 시장’이 되고 있으며 일본을 제치고 가장 빨리 성장하는 아이코스 시장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필립모리스의 아시아부문 사장 마틴 킹은 닛케이아시안리뷰와 인터뷰를 하면서 “같은 기간 아이코스를 채택하는 비율로 봤을 때 일본보다 한국이 더 빠르다”고 했다.
필립모리스가 한국 시장에 들어온 것은 1989년이다. 2002년 경남 양산에 담배 생산공장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국내 일반담배 생산량을 계속 늘려왔다. 한국에서 생산하는 이 회사의 일반담배는 주로 말보로와 팔러먼트, 버즈니아S.와 라크다. 하지만 이제는 아이코스가 주력 제품으로 떠올랐다.
자료 나스닥(www.nasdaq.com)
담배전문매체 베이핑포스트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전자담배를 기존 태우는 담배와 다르게 분류하고 있어, 일반 담배에 75%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과 달리 아이코스의 세금은 상대적으로 낮다”며 한국에서 아이코스의 성공요인을 분석했다. 지난해 10월 이 문제가 불거지자 정부는 궐련형 전자담배의 세금을 일반담배의 90%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발표했다.
건강 영향 적다? 근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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