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우치다 타츠루, 하류지향

딸기21 2017. 1. 7. 10:00

하류지향

우치다 타츠루. 김경옥 옮김. 민들레



우치다의 책은 두 번째이고, 집에 한두 권 더 있는 듯 싶다. 어떻게 보면 지식인 꼰대 아저씨인데 그가 하는 진심 어린 말들이 콕콕 박힌다. '옛날엔 그래도 이렇지는 않았어, 가난했지만 희망과 열성이 있었어, 요즘엔 모든 게 돈 위주로만 돌아가서 너무 심해'라고 이 아저씨 혹은 할아버지는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폭력적인 노친네 잔소리로 들리지 않는 것은, 지금 우리 모두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엔 모든 게 돈 위주로만 돌아가서 너무 심하다는 걸. 이 시대에 절망하고 있기에, 이 할아버지의 잔소리를 새겨듣게 되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배움의 장에 서게 되면 첫 질문으로 "이걸 배우면 뭐에 도움이 되나요?"라고 묻는다. 아주 냉정하고 어떤 면에서는 비즈니스 냄새가 나는 질문이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40분이든 50분이든 교실에 가많이 앉아 묵묵히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필기하는 일은 일종의 고역이다. 아이들은 이 '고역'을 교사에게 지불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말로 하면 고통이나 인내라는 형태의 '화폐'를 교사에게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자기들이 지불한 화폐와 등가교환되는 재화나 서비스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지불하는데 선생님은 무엇을 줄 건가요?:

'의무교육'이라는 말을 지금 아이들은 '교육을 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 말은 틀렸다. 아이들에게는 '교육을 받을 권리'만 있을 뿐이다. 자녀에게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지는 사람은 부모다. 아이들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는,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넓혀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권리다. 이 권리 당사자인 아이들 쪽에서 "어째서 이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되나요?"라는 질문이 나올 줄은 헌법을 기초했던 사람들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명을 제대로 잘 해주면 권리를 행사하겠지만, 설명이 납득되지 않으면 교육받을 권리 따위는 필요 없다"고 아이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45쪽)



요즘 아이들과 삼십 년 전 아이들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처음 사회관계에 들어설 때 노동을 통해 들어가는가, 소비를 통해 들어가는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최초의 사회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유용한 구성원으로 인지되기 시작하는 것은 가사노동을 분담하면서부터이다. 작지만 가족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감사와 인정으 보상으로 획득하면서 어리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다져간다. 이런 데서 예전에 아이들은 사회화 과정을 밟아가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노동주체로서 출발했다.

지금은 다르다. 오히려 지금의 아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다. 아이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자체가 집안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소여서, 가능하면 그들에게 할당된 공간 안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최대의 공헌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부탁할 만한 생산활동이 거의 없어졌다. 반면에 아이들의 소비활동은 아주 이른 시기부터 촉발된다. 

(49-51쪽)


한 사람 몫으로 사회관계의 장에 등장하는 경우, 만일 그가 네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그를 교섭 상대로 대등하게 대우해줄 어른은 없다. 하지만 돈을 쓰는 사람으로서 등장한다면 그 사람의 나이나 식견, 사회적 능력 따위의 속인적 요소는 기본적으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돈의 투명성'이라는 특권적 성격이다. 어린아이라도 돈만 있으면 어른과 대등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는 전능성은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이질적인 것이다.

문제는 돈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사는 사람입니다" 하고 자신을 설정하면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어엿한 한 사람의 선수로 시장에 참가하도록 허락된다. 이 경험이 가져다주는 짜릿한 쾌감은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교욱 서비스를 사는 사람'이라는 위치를 무의식 중에 선점하고자 한다. 아이들은 마치 경매에 참가한 부호들처럼 바지주머니에 손을 넣고서는 교단 위의 교사를 거만하게 바라보며 속으로 말한다. "자, 당신은 뭘 팔 건데? 마음에 들면 사주지."

(53쪽)



배움의 과정에 던져진 아이들은 '이미' 배우기 시작했다. 이미 배움의 한가운데에 들어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 아이들은 학습에서 주권을 가진 자유로운 주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1950년대 이후 교육현장에서는 큰 목소리로 하지 못했던 말이지만 여기서는 크게 소리내어 말하고 싶다. 먼저 배움이 있고, 그 운동에 끌려가고 있는 동안에 배움의 주체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사로 자기결정에 따라 배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은 언제나 배움에 뒤처져 있을 수밖에 없다. '나도 모르게 이미 배우고 있는' 그 미묘한 타이밍을 느끼지 않고서는 배움은 시작되지 않는다.

배움이란, 배우기 전에 몰랐던 잣대로,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측정할 수 있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배우기 시작했을 때와 배우고 있는 도중, 그리고 다 배우고 난 뒤의 배움의 주체는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배움이라는 과정에 몸을 던진 주체의 운명이다.

그러나 '교육 서비스'를 구입하기 위해 '교육 투자'를 하는 소비주체로 자기를 확립한 아이들에게 이런 배움의 과정은 이해 불가능한 영역일 뿐이다. 소비주체로 배움의 장에 들어선 아이들은 이른바 학교를 편의점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72-73쪽)


아이들이 무엇보다 먼저 배워야만 하는 것은 '변화하는 방법'이다. 배움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이에 비하면 시장경제와 등가교환의 원리가 인간 세계에 도입된 시기는 극히 최근이다. 자신의 유아적 욕망을 가슴에 품고 그저 소비주체로 안주할 것, 시장원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존재하길 요청한다. 

아이들을 배움의 과정 속에 던지는 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인류사적인 책무다. 하지만 오늘날 일본의 교육행정은 물론 미디어를 떠들썩하게 하는 교육론도 이와 정반대 방향의 교육개혁을 부르짖고 있다. 교육을 말하는 단어도 대부분 비즈니스 용어에 가깝고, 교육 관계자들도 아이들을 소비주체로 더 한층 강화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듯이 보인다. 

(77쪽)



리스크 헤지는 '살아남기'를 목표로 집단이 합의한 계획에 따라서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리스크 헤지를 하고, 발생한 리스크에 개인이 대처해야 하는 시다가 되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는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 사회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도 혼자서 책임진다'는 원리로 사는 게 결코 아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결과도 자신이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 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108쪽)


'나는 리스크 사회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결정 여부에 상관없이 결과에 따른 책임을 공유할 수 있는 상부상조 집단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로 바꿔 물어야 한다. 약자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상부상조 조직에 속할 수 없는 사람이다. 획득한 이익을 공유할 동료가 없고 어려울 때 지원해줄 사람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이 리스크 사회에서 약자가 된다.

(109쪽)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상부상조, 상호지원은 '도움을 서로 주고받는 일'이기 때문에 폐를 끼치는 타인과의 관계를 원리적으로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으니 내버려 두세요"라는 말은 젊은이들의 상투어다. 그 사람은 정말로 아무에게도 신세를 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속내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타인이 자신에게 폐를 끼칠까봐 두려운 것이다. 자기결정에 대해 타인이 관여하는 것이 귀찮고 번거로워서 "당신이 어떻게 살든 관여하지 않겠다"라고 먼저 선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되돌아올 길 없는 사회적 하강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리스크를 떠안는 존재는 자기결정, 자기책임의 원리에 충실한 약자들뿐이다. 교육행정도, 대중매체도 도움을 주고받을 상대를 가질 수 없는 방대한 수의 구조적 약자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113쪽)



'자기결정을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모두가' 공유하자고 소리 높여 요구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에는 분명 모순이 있다. '자기결정은 좋은 일'이라는 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정부 주도로 형성되고 있고,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은 묵살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도착적이다. 내가 '자기결정 페티시즘'이라고 말한 것은 이처럼 '자기결정을 하는 것'이 국가 정책으로 권장되고 이데올로기로 아이들에게 타율적으로 주입되는 사태를 의미한다. 

(128쪽)


일본형 니트는 이러한 '자기결정'을 하는 젊은이들이 보이고 있는 하나의 병리현상으로 고찰해야 한다. 유럽의 니트는 계층화의 한 증상이다. 사회적 상승 욕구가 있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본의 니트는 유럽과 다르다.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열려 있는데도 아이들이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한다. 일본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자진해서 차별적인 사회구조를 강화하는데 가담하는 방법으로 계층화가 진행되고 있다. 자신의 의사로 지식과 기술 익히기를 거부하고 계층 하강하는 아이들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아마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다. 

(130쪽)


젊은이들 입장에서 보면 경제적 합리성은 '노력과 성과(임금 또는 위신)의 상관'이다. 그런데 노동 현장에서는 아무리 봐도 노력과 성과가 상관관계가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불합리한 일은 못하겠어요"라고 당당하게 주장한다. 최대 난관은, 니트족이 어렸을 때부터 쭉 경제적 합리성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해왔고 그 결과 스스로 무직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그들 나름의 수미일관성을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논거로 깨뜨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들은 등가가 아닌 교환에는 결코 응하지 않는 '영리한 소비주체'로 자기들을 규정하고, 여기서 비록 작으나마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고 있다. 

(147쪽)



아동학대 현상은 육아를 등가교환 관점에서 생각하는 습관이 낳은 필연적인 결과로 보입니다. 아마도 육아를 비즈니스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식은 자기가 만들어낸 '제품'이며, 부모의 성과는 이 제품에 어떤 부가가치를 덧붙이느냐에 따라 평가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성과가 평가를 받으면 부모는 '육아의 성공'이라는 형태로 자기실현을 다했다고 여깁니다. 

사춘기 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가 "기분이 좀 나빠요"라거나 "이건 싫어요" 같은 불쾌한 메시지를 발신할 때 부모가 이런 메시지는 선택적으로 배제해버립니다. 아이가 심신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다는 정보는, 말하자면 '제품'이 소음을 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제품 공정에 하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부모는 '육아 실패'라는 기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지요.

(171쪽)



니트는 노동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사회에 특별히 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잠재적인 것이지요. 그들이 언젠가 60세, 70세가 되었을 때 사회가 어떤 식으로 그들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담보해줄 것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니트가 된 까닭이 자기책임이 아니라 '어느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이데올로기의 희생자'라는 점을 납세자들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날 그냥 내버려둬"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가져올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법은 "미안하지만 내버려두지 못하겠어"라고 말하는, 이른바 '참견'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도움을 받으면서 이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너희들이 굶어죽게 할 수 없다. 옛날부터 그래왔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니트가 된 이유는 요컨대 "세상이 차갑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그렇게 차갑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고 실제로 손을 내밀면 거기서부터 상황은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207-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