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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

딸기21 2016. 12. 12. 14:40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 Disturbing The Universe
프리먼 다이슨 (지은이) | 김희봉 (옮긴이) | 사이언스북스 | 2009-02-10 | 원제 



어쩌다 보니 이 책을 두 번 읽었다. 올 여름 책을 펴들었는데, 분명 일전에 다 읽은 책이라 생각했음에도 밑줄 하나 없지 뭔가. '엥, 분명히 읽었던 것 같은데' 하면서 다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재미있어서 한참을 쥐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줄 쳐 가며 다 읽었다. 그러고 나서, 다른 책꽂이에서 '줄.쳐.진.' 똑같은 책을 한 권 더 발견. 그러니까 두 권이 있었던 게 문제였어.... 이리하여 우리 집에는 밑줄 쫙쫙 쳐진 다이슨의 '20세기를 말하다'가 두 권이 되었다. -_-




나는, 한 과학자가 ‘인간의 상황’에 대해 느끼는 것들을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나는 안쪽에서 본 과학의 모습을 설명할 것이며, 기술의 미래에 대해서도 조금 말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과학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성장할 과학과 기술을 파괴적인 방향이 아니라 건설적인 방향으로 끌고 갈 이들은 과학자가 아니라 일반인들이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아닌 여러분이 이런 일을 성취하려면, 여러분이 길들여야 할 야수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16쪽)



수학을 좋아한 소년


오후가 되면 아버지는 어슬렁거리면서 물에 잠긴 습지를 개간했다. 배수관은 아버지의 자랑이고 기쁨이었다. 허리까지 잠기는 차가운 진흙탕 속에서 막힌 배수관을 파내는 일은 아버지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단 한 가지만 빠져 있었다. 아버지의 행복이 완성되려면, 다 자란 아들이 진흙탕 속에서 아버지를 도와주고 부자 간의 정을 느낄 수 있어야 했다.

내가 생각하는 즐거운 크리스마스 방학은 달랐다. 나는 해변의 오두막에 갈 때 소중한 피아지오의 <미분 방정식> 책을 가져갔다. 나는 아인슈타인의 언어를 배우고 싶었고, 그래서 그 문제들을 내 방식대로 풀어 나갔다. 나는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공부했고, 식사할 때만 잠시 쉬었다. 나는 하루에 평균 열네 시간씩 공부했다. 나는 방학을 이렇게 즐겁게 보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공부하면 건강을 해치고 뇌가 타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단 몇 시간만이라도 수학 계산을 중단하고 도랑 파는 일을 도와 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부모님이 간청하면 할수록 나는 더 고집을 부렸다. 나는 수학과 사랑에 빠져 있었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열다섯 살이었던 영국 소년들이 1917년과 1918년에 참호에 들어갔다가 어떻게 되었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사정을 감안할 때, 나는 살아갈 날이 많지 않으며 수학을 하지 않고 보내는 시간은 비극적인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28-29쪽)


'핵 억지력'의 모태가 된 전략 폭격 정책


사악함의 뿌리는 전략 폭격이라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전쟁에 이기거나 전쟁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적국의 하늘에 죽음과 파괴를 쏟아 붓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정책이 1930년대에 정치가들과 군사 지도자들에게 인기를 끈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그들은 모두 제1차 세계대전의 지긋지긋한 참호전에서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참호전의 재현을 끔찍하게 두려워했다. 그들은 전략 폭격이 참호전을 막을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그들은 전략 폭격이 ‘억지력’으로 작용해 전쟁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전략 폭격은 전쟁을 억지하지도 못했고 승리를 가져다주지도 못했다. 이제까지 전략 폭격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폭격 사령부는 전쟁의 역사에서 오래된 악에다가 과학과 기술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악을 더한 것의 초창기 예였다. 기술은 악을 익명화한다.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악은 관료주의적으로 조직되어, 그 누구도 일어난 일에 대해 전혀 책임 의식을 갖지 않게 되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자신이 죽인 사람을 보지 못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았다. 

(52쪽)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나의 윤리적 입장은 조금씩 후퇴했고, 결국 나에게는 윤리적 입장이라는 것 자체가 없어지게 되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인류의 형제애를 굳건히 믿었고 스스로를 간디의 추종자로 여겼으며 모든 폭력에 반대했다. 1년 뒤에 나는 한 발 물러나서 이렇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히틀러에 대해서는 비폭력 저항이란 것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윤리적으로 볼 때 폭격에는 반대한다.”

몇 년 뒤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폭격을 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폭격 사령부로 일하러 간다. 하지만 윤리적으로 볼 때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는 반대한다.”

폭격 사령부에서 일하면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도시를 무차별 폭격하고 있지만, 전쟁에 이기는 데 도움이 되므로 이 행위는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1년 뒤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하는 폭격은 전쟁에 이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폭격기 승무원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일하고 있으므로, 나는 윤리적으로 정당하다.”

(53쪽)


독일의 야간 전투기들이 자신들의 고향과 가족을 지키도록 지원하는 독일 기술자들, 즉 나의 적을 나는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장점은 자신들이 왜 싸우는지 분명히 안다는 것이었다. 전쟁의 막바지가 되자 그들은 히틀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도시와 사람들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전쟁 초기에 그들은 싸워야 할 깨끗한 명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전쟁의 막바지에 그들에게 싸워야 할 깨끗한 명분을 제공한 것은 바로 우리였다.

(65쪽)


유고슬라비아에서 죽은 톰슨


프랭크 톰슨이 1938년에 윈체스터를 떠난 뒤로 나는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고, 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39년에 전쟁이 나자 군인이 되었고, 전시의 대부분을 서남아시아에서 보냈다. 그는 리비아, 이집트, 팔레스타인, 페르시아에 있었고 때때로 싸우며 언제나 친구와 언어를 늘렸다. 1944년에 그는 독일 점령지인 유고슬라비아에 낙하산으로 침투했다. 그런 다음에는 거의 1년이 지나서 ‘뉴스크로니클’에 그의 마지막 이야기가 실렸다. 

-- 톰슨 소령은 엉터리 재판을 받은 뒤에 6월 10일 경에 처형되었다. “영국인인 당신은 무슨 권리로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우리에게 대항하는 전쟁에서 싸우는가?” 톰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이다. 나는 자유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불가리아 애국자들과 함께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톰슨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저는 여러분에게 자유의 인사를 보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인사를 하면서 죽었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이 불가리아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었다고 선언했다.

‘반파시즘’은 불가리아 대표가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리라. 언제나 솔직했던 톰슨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대결이다.” 그는 공산주의자였다. 그의 불가리아 동지들도 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오래 살지 못해서 공산주의와 자유가 언제나 동의어가 아닌 것을 알지 못했다. 톰슨에게 공산주의는 지식인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그가 페르시아의 산골짜기에서 트럭을 호송할 때 만난 소련 트럭 운전사의 공산주의였다. 1944년 9월에 소련군이 불가리아에 진입했고, 조국전선이 정권을 잡아서 톰슨은 국가 영웅으로 추서되었다. 빨치산이 가장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프로코프니크 역은 이름이 바뀌어 톰슨 소령 역이 되었다. 

(62-63쪽)


1943년에 톰슨은 이렇게 썼다. “유럽 바깥에는 이 지친 대륙이 수백년 동안 알던 것보다 더 훌륭하고 용감한 정신이 있다. 최악의 모욕과 고통을 아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겨 내고, 자신들의 삶을 단번에 완벽하게 건설해 내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확신에 찬 의지이다.” 30년이 지나서, 현재 소피아에서 정부를 운영하는 관료들이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나는 톰슨과 함께 싸웠던 불가리아 빨치산들은 이 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 정신으로 싸우다가 죽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그들이 세운 정부는 역사적 정당성을 지닌다. 현 정부가 그들의 이상에는 아무리 못 미친다고 해도, 리타코보 언덕의 기념비는 미래 세대에게 그들이 헛되이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라고 외치면서 서 있을 것이다.

1945년 봄에 나는 이 모든 사건들을 내다볼 만큼 현명하지 않았지만, 톰슨이 불가리아 정치보다 더 큰 꿈을 위해 죽었다는 것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희망이 나온다면 그 희망은 톰슨이 벌인 시인의 싸움에서 오는 것이지, 내가 벌인 기술자의 싸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좋은 동기로 싸운다고 해도 무차별 살육이라는 수단을 쓰면 그 동기는 나쁜 것이 된다. 어떻게 싸우느냐가 왜 싸우느냐와 똑같이 중요하다. 기술이 나쁜 수단으로서 전쟁에 점점 더 많이 사용될수록 재앙은 더 커지고, 좋은 동기를 더 더럽히게 된다. 나는 미국 폭격기가 베트남에서 폭격을 시작했을 때 미국의 ‘대의’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톰슨의 정신이 밀림 속에서 호치민과 함께 싸우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66-67쪽)



오펜하이머와 에드워드 텔러


오펜하이머의 보안청문회는 3주 동안 진행되었고, 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가 검사측 증인으로 나서서 오펜하이머와 일대일로 대면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오펜하이머는 나와 마찬가지로 혼란스럽고 복잡했다. 오펜하이머는 워싱턴의 장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인류의 구원자가 되려고 했다. 텔러는 나의 아버지처럼 단순했다. 군사적 약자 입장에서 고상한 도덕적 원칙을 주장하는 것으로 인류를 구원한다는 것이 환상이라고 보았다. 텔러는 과학자로서, 원자폭탄 설계자로서 미국에 힘을 주기 위해 일했고, 그 힘의 사용에 대해서는 미국 시민과 그들이 선추한 대표들에게 맡겼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텔러는 미국이 강한 힘을 가지고 온당하게 처신한다면 머지않아 온 세계가 미국의 편이 된다고 믿었다. 

시카고대학교의 엔리코 페르미와 텔러는 코넬 대학교의 베테와 파인만 같았다. 페르미는 친근하고 누구에게나 터놓고 지냈지만 근본적으로 진지한 사람이었다. 텔러는 끊임없이 아이디어와 농담을 쏟아냈다. 이렇게 쾌활하고 즐거운 기질의 사람이 극악한 파괴 무기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그는 자신을 세계 정부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라고 말했다. 나는 매주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상주의자만큼 위험한 사람은 없다고 하는데, 텔러야말로 좋은 예입니다.”

(134-135쪽)


내 오랜 친구이자 은사인 한스 베테는 정부와 대중을 상대로 광범위한 핵 실험 금지를 외치고 있었다. 새로운 친구인 텔러는 핵 실험 금지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베테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은 결코 줄어든 적이 없지만, 이 논쟁에서 내 마음은 텔러의 편에 가 있었다. 핵 실험이 금지된다면 오리온 계획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베테가 반대편에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5년 전에 공안 당국이 오펜하이머에게 그랬듯이 이번에는 베테까지 건드릴까봐 두려웠다. 

나는 비 핵분열 방식 폭탄을 연구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리버모어로 갔다. 2주일 동안 열심히 연구했고, 오리온에서 나오는 낙진을 10분의 1로 줄일 폭탄을 설계하려고 노력했다. 폭탄 설계는 내 평생 처음이었다. 내가 그 일을 했던 것은 오로지 우주를 탐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고, 이 폭탄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리버모어에서 평화를 위한 폭탄과 전쟁을 위한 폭탄을 깨끗하게 나눌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의 동기는 뒤섞이게 마련이다. 리버모어에서는 오늘날 중성자탄으로 알려진 것을 개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도와주었고, 그들은 나를 도와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중성자탄 개발에 책임이 있다. 이 일을 겪은 뒤에, 나는 오리온 계획에 사용할 폭탄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설계된 폭탄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없게 되었다. 

(188-189쪽)



핵실험 반대론자로 바뀌다


1961년과 1962년에 미국과 소련은 더 자주 핵 실험을 했다. 다수가 메가톤급 폭탄이었고, 북반구의 방사성 낙진 농도는 크게 치솟았다. 어느 조용한 저녁에 나는 핵 실험에 관련된 정보를 모아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간단한 그래프를 그려보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는 1945년부터 1962년까지의 연도를 적었다. 각 연도 위에 수직으로 누적 핵 실험 횟수를 표시했다. 그래프가 완성되자마자 상황은 명료해졌다. 누적 핵 실험 횟수가 그리는 곡선은 거의 정확하게 지수 함수였고, 1945년부터 1962년까지 계속해서 3년마다 두 배씩 늘어났다. 이는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핵 실험을 계획하고 실험하는 데는 대략 3년이 걸린다. 핵 실험 한 번에 새로운 질문이 두 가지씩 생긴다면, 그 답을 알기 위해 3년 뒤에 핵 실험을 두 번 해야 한다. 이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나자, 나는 결론을 내릴 준비가 되었다. 어떤 질문은 해결하지 않은 채 그냥 두어야 한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그만두어야 한다. 나는 그날 밤 처음으로 핵 실험 금지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였다.

(197쪽)


8월 말에 핵 실험 금지조약 비준 청문회가 상원 외교위원회에서 열렸고 풀브라이트 의원이 의장을 맡았다. 텔러는 웅변적으로 조약에 반대하는 증언을 했다. 나는 조약에 찬성하는 쪽의 증인으로 초빙되었는데, 미국과학자연맹을 대표하는 시민 자격이었다. 나는 미국노동조합연맹 대표 조지 미니 바로 뒤에 발언하는 행운을 누렸다. 그는 15분 동안 소련을 비난했고, 정직한 미국 노동자들은 속임수 많은 공산당 협상가들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정직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아내들과 아이들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핵 실험으로 하늘에 뿌려질 독으로부터 아내들과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며, 공산당을 불신하고 저주하지만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조약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상원에서 증언을 한 뒤에 나는 국무부 건물에서 터벅터벅 걸어서 몇 블록 떨어진 컨스티튜션가로 갔다. 거기에는 또 다른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국 전역에서 모인 흑인들이 행진하고 있었다. 25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조용히 행진하고 있었다. 음악도 없었고 발도 맞추지 않았다. 나도 그들과 함께 링컨기념광장으로 걸어갔다.

흑인 지도자들은 2시부터 4시까지 연설을 했고, 거대한 링컨 상이 그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제임스 파머는 루이지애나 감옥에서 메시지를 보내왔다. 마틴 루서 킹은 구약의 예언자처럼 연설했다. 나는 그가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평화와 정의에 대한 자신의 비전을 설명했다. 그날 밤에 나는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저는 언제라도 그를 위해 감옥에 갈 수 있습니다.” 나는 그때 내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연설을 듣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단지 위대한 연설을 듣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또한 그때는 루서 킹이 5년 안에 죽으리라는 것도 몰랐다.

미니와 루서 킹처럼 다른 두 인물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한 사람은 브롱크스의 늙은 배관공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애틀랜타의 젊은 예언자였다. 둘 다 거칠었다. 둘 다 정의를 요구함으로써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둘 다 미래를 믿었고 아이들을 믿었다. 둘 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었다.

(205-206쪽)


생물학자들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이해하려면, 물리학자들이 처음에 핵무기 제조에 반대하고 나중에는 정부에게 보유 중인 핵폭탄을 해체하라고 설득했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상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생물학자들은 물리학자들과 달리, 역사 속에 처음부터 깨끗한 손으로 등장했다. 

생물학 무기를 추방하기 위해 누구보다 더 애를 많이 쓴 사람은 하버드대학교의 생물학 교수 매슈 메셀슨이다. 그가 무기통제 및 군비감축 기구(ACDA)에서 본 것들 중 가장 놀라운 것은 '육군 야전교범 3-10'이었다. 각 전투부대에 비치된 이 소책자에는 생물학전 수행 요령이 자세히 나와 있었다. 이 교범은 비밀로 분류돼 있지도 않았고 1963년 미 전역에 널리 배포돼 외국 정보원들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외국군 일반 참모장교들도 이것을 우연히 읽기만 하면 분명한 메시지를 알게 된다. 미국은 생물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생물학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의 군대는 이러한 훈련을 받아야 하며,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으려는 국가는 스스로 생물학 무기를 갖춰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다.

메셀슨은 공식 통로와 사적 통로를 모두 동원해, 미국이 생물학전에 관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폭로했다. 첫째, 생물학 무기는 작고 가난한 나라에 공급될 위험이 아주 크며, 심지어 테러집단의 손에 들어가서 미국과 같은 큰 나라에 넓은 범위에 걸쳐 심각한 손상을 줄 수 있다. 둘째, 미국이 생물학전 기술을 개발하고 야전교범 같은 것을 배포하는 일 자체가 다른 나라들의 생물학 무기 사용을 부추기는 짓이다. 셋째, 생물학 무기는 매우 신뢰성이 떨어지므로 미국이 수행할 이성적인 군사 임무에 부적합하며, 미국 시민이 생물학 무기로 공격당했을 때의 보복수단으로도 마찬가지이다.

(246-247쪽)



미래에 대한 강박이 나에게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마 내가 윈체스터의 중세 건물들 사이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것이다. 윈체스터는 과거를 사랑하는 도시이다. 그 도시에서 과거는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나는 어릴 때 지은 지 300년 된 집에서 살았고, 내가 다닌 학교의 교사는 위컴의 윌리엄이 세운 것으로 거의 600년이나 된 것이었다. 아이의 성급함으로, 나는 이 모든 것들에 강하게 반발했다. 왜 사람들은 과거에 그렇게 매달리는가? 나는 그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600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기 싫었다. 차라리 나는 600년 후의 미래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이 유식하게 초서와 위컴의 윌리엄을 얘기하는 동안 나는 우주선과 외계 문명을 꿈꾸었다. 윈체스터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600년은 긴 시간이 아니다. 600년 뒤의 미래로 가면 오래된 교회보다 훨씬 더 재미난 것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먼 미래에 흥미가 있고, 여기에서는 정량적인 예측이 무의미하다. 먼 미래에 대해 지금 알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리라는 점뿐이다. 먼 미래를 탐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상상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272-2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