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유럽이라는 곳

동방정책 설계자 에곤 바르 타계  

딸기21 2015. 8. 20.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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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독일의 중요한 역사적인 고비에는 늘 그가 있었다. 통일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 평가되는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뒤에서 ‘동방정책’의 틀을 잡은 것도 그였다. 소련을 설득해 통일 문제를 독일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끔 합의한 1971년의 모스크바 조약 협상장에도, 폴란드와의 복잡한 국경협상을 마무리한 같은 해의 바르샤바 조약 뒤에도 그가 있었다.

 

독일 통일의 설계자로 불리는 에곤 바르 전 독일 경제협력부 장관이 93세를 일기로 20일(현지시간) 타계했다. 독일 사민당은 이날 트위터 메시지를 통해 “에곤 바르는 위대한 정치인이었으며 사민당은 위대한 인물을 잃었다”고 그의 사망 사실을 알렸다.

 


바르는 1922년 독일 중부 소도시 프레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의 군수공장에서 산업기술자로 일하다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나 할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비아리안계’로 분류돼 전역했다. 전쟁이 끝난 뒤 베를리너차이퉁과 알게마이네차이퉁 등에서 기자로 일하던 그는 1960년 당시 서베를린 시장이던 브란트의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그 후 줄곧 바르는 브란트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충실한 조언자 역할을 했다. 1963년 유명한 ‘투칭거 아카데미 연설’에서 바르는 동독 정책의 슬로건인 ‘접촉을 통한 변화’를 주창했다. 1969년 10월 사민당이 집권하자 바르는 연방총리실 정무장관을 맡아 핵심 측근으로 브란트를 도왔다. 그의 구상은 브란트 밑에서 현실 정책으로 추진됐고, 그의 활약에 힘입어 1970년 동·서독 간 정상회담이 처음으로 성사됐다.


다른 정치인들이 통일의 공허한 레토릭만 내세울 때 그는 분단 현실을 수용하고 현실주의 입장에서 통일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독이 동독의 존재를 인정하는 대신 ‘자결권’을 소련으로부터 인정받은 모스크바 조약은 그 구체적인 성과물이었다. 브란트의 뒤를 이은 헬무트 슈미트 총리 시절 경제협력부 장관을 맡기도 했으나 1976년 연방정부 직함을 모두 내려놓고 공직을 떠났다. 하지만 유럽 정계에서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1980년에는 스웨덴의 자유주의자 올로프 팔메 총리가 이끄는 유럽 기구인 ‘비무장과 안보를 위한 독립위원회’의 멤버가 돼 군축 흐름을 주도했다. 바르는 2000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통일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려면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며 통일의 성급한 환상을 버리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슈피겔 등 독일 언론들은 “사민당의 가장 유력한 정치인 중 한 명이었던 사람”이라고 평했고, 하이코 마스 법무장관은 “그는 대담한 사상가였다”며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