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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깊이보기]사망한 오마르는 누구이며 탈레반은 어디로 갈까

딸기21 2015. 7. 29.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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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무장조직 탈레반을 결성한 최고지도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55)가 사망했다고 아프간 정부가 공식 발표했다. 압둘 하시브 세디키 아프간 국가안보부 대변인은 29일 AP통신에 “오마르가 2013년 4월 파키스탄 카라치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며 “그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확인한다”고 밝혔다. 앞서 이날 영국 BBC방송은 아프간 정부 정보당국 관계자들을 인용, 오마르가 2~3년 전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탈레반은 그간 오마르가 건재하다고 주장했으나 이전부터 사망설은 끊이지 않았다. 탈레반 내부의 한 분파인 ‘피다이 마하즈’는 오마르가 수하의 탈레반 지휘관들이던 악타르 무함마드 만수르와 굴 아가 측에 의해 2013년 7월 피살됐다고 주장했다. 반면 파키스탄의 익스프레스트리뷴은 “오마르는 2년 전 폐렴으로 숨을 거뒀고, 탈레반 중앙의 지도부도 이를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탈레반 정권의 각료를 지낸 사람의 말을 인용, 오마르의 아들이 아버지의 시신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반 소련 항쟁서 눈 잃은 ‘애꾸는 지도자’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얼굴 없는 지도자’라 불리는 오마르는 1960년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주의 차히히마트에서 태어났다. 아프간 남부의 주류 부족인 파슈툰족인 오마르는 1980년대 옛 소련이 아프간을 점령했을 때 반소련 항쟁에 뛰어들었으며, 전투 중 파편에 부상을 입어 오른쪽 눈이 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테러조직 알카에다 지도자였던 오사마 빈라덴(2011년 파키스탄에서 미군에 사살)과 연결된 것도 반소련 항쟁 과정에서였다. 빈라덴은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과 연결돼 이슬람권 각지에서 청년들을 끌어모아 아프간에서 소련에 맞서 무자헤딘(이슬람 전투원)으로 싸우게 하면서 재정지원을 했다. 그러나 빈라덴과의 이 인연은 훗날 오마르를 궁지로 몰고 아프간을 미군의 포화 속에 놓이게 하는 결과를 맺는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 /경향신문 자료사진

 

오마르는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한 뒤 소련 점령기의 괴뢰정권인 나지불라 정권 쪽으로 화살을 돌렸다. 1992년 나지불라는 수도 카불 시내 복판에서 교수형을 당하며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1980년대 말 이후 오마르는 이슬람 전통 교육기관인 마드라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 종교적 근본주의를 내세운 정치세력을 형성하고 전국을 장악하기 위한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그에게는 ‘물라(스승)’라는 호칭이 붙었고, 그가 이끄는 세력은 탈레브(학생)들의 무리라는 뜻에서 ‘탈레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소련군이 물러났을 때 아프간 곳곳에서는 무장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카불을 놓고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약 군벌로 악명 높은 굴붓딘 헤크마티아르 같은 자들은 카불 시내를 폭격해 수천 명의 시민들을 몰살시키기도 했다. 북부에서는 아흐마드 마수드 샤 같은 세속주의 지도자들이 명망을 얻고 있었으나, 그는 탈레반과의 경쟁에서 밀렸으며 2001년 미국의 침공 직전에 암살당했다.
 
파슈툰족에 바탕을 둔 부족단체에서 출발한 탈레반은 오마르를 구심점 삼아 엄격한 이슬람 규율로 무장하고 전국을 빠른 속도로 장악해갔다. 카불의 무력한 기득권층과 북부 양귀비 재배 지역에서 아편 매매 수입으로 횡포를 부리던 이른바 ‘마약군벌’들과 경합하다가 1997년에는 정권을 장악했다. 군벌 경쟁자들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지만 정국은 다소 안정되는 듯했다.
 
탈레반이 집권할 당시만 해도 미국은 옛 소련의 영향력에서 아프간을 빼낸다는 쪽에 무게를 둬 경계를 하지 않았다. 실제 당시 탈레반 정권은 민주적 투표로 집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통성이 있는 정권으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다. 국제사회의 공인은 몇몇 나라에서 받는데 그쳤으나 아프간 내 지지율은 60% 이상이라는 조사결과가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뒤에는 탈레반의 극단적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이 도마에 올랐다. 부정부패를 청산하는 작업에 그치지 않고 언론을 탄압, 대부분 방송들을 폐쇄했으며 ‘서방 문화를 전파하는’ 언론 활동을 금지시키고 종교 자유를 억압했다.
 

 

1996년 BBC방송이 촬영한 오마르의 모습. 사진 BBC

무엇보다 국제사회를 경악하게 한 것은 여성 교육을 전면 금지시키고 모든 여성들을 집안에 가둔 조치였다.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 대통령 부인 등이 나서서 국제무대에서 탈레반을 비판했던 것도 여성탄압 정책 때문이었다. 탈레반은 모든 여성들이 얼굴과 온몸을 가리는 부르카를 입게 만들었고,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전면 금지시켰다. 심지어 집 밖에 여성들만이 외출하는 것도 막았다. 남성이 특정 여성을 ‘간통했다’고 지목하기만 하면 돌로 때려죽이게 하는 끔찍한 사형제도도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특히 아프간은 옛 소련 점령시절 사회주의 교육정책으로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았고 사회활동도 다른 이슬람권 국가들보다 훨씬 활발하게 벌였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조치들이 가져온 충격은 더욱 컸다. 세계를 또 한번 충격에 빠뜨린 것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얀의 거대 불상들을 대포로 파괴한 것이었다. 2001년 봄 벌어진 이 사건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빈라덴 숨겨준 죄’로 미군 침공 받아 산악지대로 피신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 수단에서 미군을 공격한 테러조직 알카에다 지도자 빈라덴이 아프간에 오래 전부터 근거지를 두고 있었으며 1996년부터 탈레반 정권의 보호 아래 아프간에 숨어있다고 주장해왔다. 2001년 9월11일 대참사가 일어나자 미국은 곧바로 알카에다와 빈라덴을 범인으로 지목했으며, 그해 10월 빈라덴을 색출한다며 아프간 전쟁을 시작했다. B2 스텔스기, 무인전투기 프레데터 등을 총동원한 미국의 막강한 화력 앞에 탈레반은 변변한 저항도 못 해보고 무릎을 꿇었다. 

 

탈레반 정권은 축출됐으며 무하마르 오마르는 동부 파키스탄 접경지대로 피신했다. 하지만 미국이 10년 넘게 수색작전을 벌이고 1000만달러(약 116억원)의 현상금까지 걸었음에도, 오마르는 건재한 것으로 전해졌으며 그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다. 

 

올초 탈레반은 이례적으로 오마르의 ‘전기’를 내놔 눈길을 끌었다. 탈레반이 공식 웹사이트에 올린 이 전기는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오마르의 출생에서부터 봉기의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한 것이었다. 오마르의 나이와 출생지가 ‘공식 확인’된 것도 이 전기를 통해서였다. 전기에 따르면 오마르는 매우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특별한 유머감각’을 갖고 있고, 행방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지만 그럼에도 조직 상층부와 늘 ‘접촉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프간과 세계 뉴스를 날마다 체크하고 있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지난 15일에도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의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성명을 내는 등 몇 년 동안 오마르 명의의 메시지를 발표해 왔다. 하지만 15일의 메시지는 탈레반 웹사이트에 텍스트 형태로 올라왔을 뿐, 음성이나 동영상은 붙어 있지 않았다.


오마르 없는 탈레반은 어디로 갈까

 
파키스탄의 익스프레스트리뷴은 탈레반 소식통들을 인용해 탈레반이 이미 오마르 이후의 체제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탈레반은 아프간 정부와 파키스탄의 중재 아래 권력 분점을 바탕으로 한 평화협상을 하고 있다. 이 신문은 31일 파키스탄에서 열릴 예정인 평화협상 이전에 탈레반이 후계자를 공식 발표할 계획이었다고 전했다.
 
아프간 안팎에서는 물라 바라다르 아쿤드가 오마르의 후계자로 거론되고 있다. 오마르는 예전에 바라다르와 우바이둘라 아쿤드 두 사람을 부지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우바이둘라는 파키스탄에 체포돼 수감 도중 사망했고, 남은 사람은 바라다르 정도다. 바라다르는 2013년 파키스탄이 체포했던 탈레반 간부들을 석방해줄 때 풀려났다. 오마르의 최측근이었고, 지금은 카타르에서 탈레반에 자금을 지원해주고 있는 사예드 타얍 아가도 바라다르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탈레반 소식통들은 오마르의 아들인 야쿠브도 바라다르가 아버지의 후계자 되는 걸 지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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