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의 유산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이경식 옮김. 랜덤하우스 5/26
내용이 내용인지라 재미도 있고, 알아두면 좋을 내용도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오탈자가 많은 책은... 태어나 두 번째로 본다. -_-
(내용 정리)
2차 대전 뒤의 이탈리아 공작
제임스 포레스탈과 앨런 덜레스는 월스트리트와 워싱턴의 친구들과 동료들인 기업인, 은행가, 정치인 등에게 손을 벌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가 없었다. 포레스탈은 해리 트루먼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재무부 장관이던 존 W. 스나이더에게 갔다. 그리고 추축국 포획물에 대한 예탁금으로 변환시켰던 환율안정기금의 일부를 융통해달라고 설득, 동의를 얻어냈다. 그 자금 가운데 2억 달러는 유럽 재건비용으로 책정돼 있었는데 일부가 이탈리아 출신이 다수 포함된 부유한 미국 시민의 계좌로 송금되었고, 이 돈은 다시 CIA가 조직한 정치전선들로 송금되었다. 이렇게 해서 수백만 달러가 이탈리아 정치인과 바티칸의 정치조직인 가톨릭행동(Catholic Action)으로 들어갔다.
효과는 확실하게 있었다.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이 상당한 표 차이로 승리를 거두고, 공산주의자들이 배제된 정부를 구성했다. 이렇게 해서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과 CIA 사이의 긴 밀월이 시작되었다. 그 뒤 25년 동안 유권자와 정치인을 돈으로 매수하는 일은 이탈리아에서 계속 반복됐다.
미 의회는 마셜 플랜을 승인한 뒤 5년에 걸쳐 137억 달러의 지출을 승인했다. 그런데 마셜 플랜으로 원조를 받는 국가는 자국 통화로 거기에 해당하는 금액을 따로 마련해둬야 했다. 이 자금의 5%, 모두 합해 6억8500만 달러의 돈이 해외의 마셜 플랜 사무국을 통해서 CIA에게 전달됐던 것이다. 한 마디로 거대한 돈세탁 과정이었다. 마셜 플랜의 혜택을 받고 돈이 넘쳐나던 국가에서는 미국 첩보원들 역시 돈이 넘쳐났다.
미국 내 여론 조작
프랭크 와이즈너가 수행했던 작전 중에는 보다 온건한 것도 있었다. 장차 20년 동안 영향력 있는 CIA 전선으로 기능을 하게 될 단체를 만들고 지원하는 거시었다. 이 단체는 문화자유회의(CCF)였다. “와이즈너는 지식인을 목표로 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일명 ‘피카소의 마음을 뺏기 위한 전투’였다.”
이 예산에는 매호 4만 부 이상 팔리지 않고도 1950년대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했던 지식인 월간지 <인카운터(Encounter)>의 창간비용도 포함돼 있었다. 이것은 CIA에 새로이 포섭된 자유주의 예술가들이 매력을 느꼈던 일종의 선전작업이었다. 와이즈너, 케난 그리고 앨런 덜레스는 동유럽에서 탈출한 정치적 열기와 지적 에너지를 이용해 이것을 다시 철의 장막 너머로 되돌려 보내는 훨씬 나은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은 ‘라디오 자유 유럽’이었다. 덜레스는 미국에서 CIA의 자금 지원을 받는 ‘자유 유럽을 위한 국민위원회’의 창립자가 됐다. 자유 유럽 이사회에는 아이젠하워, <타임>, <라이프>, <포춘>의 대표인 헨리 루스, 할리우드의 제작자 세실 드밀 등이 포진해 있었다.
한국전쟁
400명이나 되는 CIA 분석가들은 한국전 발발 초기에 날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일일보고를 했다. 그러나 보고서 내용의 90%는 내무부 자료를 다시 쓴 것이었다. 전쟁에서 CIA가 동맹자로 삼았던 대상은 부패하고 믿을 수 없는 두 지도자인 남한의 이승만과 중국 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의 정보기관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CIA는 사기꾼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돈에 굶주린 피난민들이 정보를 조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2차 대전 막바지부터 1949년 말까지 극동에 관한 믿을 만한 유일한 정보 원천은 국방부 산하 신호정보기관의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은 모스크바와 극동 사이에서 오가던 공산주의자들의 전신 내용을 가로채고 해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이 남한을 공격하겠다는 계획을 놓고 스탈린, 마오와 협의를 하던 바로 그 시간에 전신 탐지능력이 갑자기 정지해버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날이었다. 미국의 암호 해독 신경중추이던 알링턴 홀에 이상이 생겼다. 이곳에 소련 첩보원 한 명이 침투했던 것이다. 윌리엄 울프 와이스밴드였다. 베델 스미스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백악관에 경보를 울렸다. 그 결과 국가안보국(NSA)이 창설됐고 신호정보기관이 CIA를 규모나 역량 면에서 압도하면서 성장했다. 50년이 지난 뒤에 국가안보국은 아이스밴드 사건을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정보전의 손실”이라고 불렀다.
1951년 2월과 3월, 4월에 1200명이 넘는 북한 피난민이 부산 영도에 집결했다. 이들을 지휘하는 작전대장은 과거 OSS 대원이었던 한스 토프트였다. 부대의 이름은 백호, 황룡, 청룡이었다. 백호부대는 1951년 4월 말에 해상을 통해 북한에 투입됐다. 처음에는 104명이었지만 나중에 추가로 36명이 공중투입됐다. 11월이 되면 백호 부대원은 대부분 살해되거나 체포·실종됐다. 청룡 부대와 황룡 부대도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952년 봄과 여름에 와이즈너의 부하들은 1500명이 넘는 한국인 대원들을 북쪽에 투입했다. 이들은 북한군과 중국군의 움직임에 대해 무전으로 상세하게 엄청난 양의 보고를 했다. 보고 내용은 CIA 서울지부장 앨버트 하니에게 집결됐다. 하지만 당시 국무부 소속 정치정보 담당자로 서울에 있던 우리리엄 토머스 주니어는 하니가 자기 부하들이라고 말하는 한국인들 가운데는 “적의 통제를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하지는 서울의 CIA 요원 200명을 지휘했는데 이들은 모두 한국말을 몰랐다.
이란 모사데그 정권 전복 공작
1차 대전 직전 영국 해군장관이던 처칠은 해군의 함정 원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꿨다. 그는 새로운 ‘영국-이란 석유’ 사의 지분 51%를 영국이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회사는 5년 전 이란에서 처음으로 유전을 찾아냈었다. 이란 석유는 처칠의 새로운 함대에 연료가 됐을 뿐만 아니라 영국 국고의 돈줄이 됐다. 당시 영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터키 군대가 이란 북부를 짓밟으며 농지를 파괴해 2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근이 발생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카자흐인 사령관 레자 칸이 권력을 잡았다. 1925년 그는 자신의 이란의 샤라고 선언했다. 무하마드 모사데그는 그에게 반대한 이란 국회의원 네 명 중 한 명이었다.
마즐리스는 곧 ‘영국-이란 석유’가 정부를 속여 수십억 달러를 훔쳐간 사실을 발견했다. 1930년대 이란에서는 영국에 대한 증오와 소련에 대한 두려움이 워낙 거세서 나치가 이란에 깊숙하게 개입할 수 있었다. 나치 개입이 얼마나 심했던지 처칠과 스탈린은 1941년 8월에 이란을 침공, 레자 칸을 몰아내고 아들인 스물 한 살 무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를 꼭두각시 정권의 얼굴로 내세웠다. 소련과 영국군이 이란을 점령한 동안 미군은 이란의 공항과 도로를 이용해 180억 달러 규모의 군사원조를 스탈린에 제공했다. 이 기간 유일하게 미국인 중 이란에 관련된 인물은 이란헌병대를 조직한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이었다. 같은 이름을 가진 그의 아들이 1991년 이라크를 공격해 사막의 폭풍 작전을 수행한 사령관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모사데그는 마즐리스를 소집해 석유이권에 대한 영국과의 재협상을 주장했다. 당시 영국-이란 석유사는 세계 최대 매장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아바단의 해상 정련소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1951년 4월 마즐리스 구성원들은 투표를 통해 석유생산 설비를 국유화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며칠 뒤 모사데그가 이란 총리가 됐다. 6월 말이 되면 영국 전함들은 이란 연안에서 모두 떠났다. 9월에 영국은 이란 석유 불매운동을 강화했다. 모사데그를 무너뜨리려는 경제전쟁 행위였다. 그때 처칠이 총리 자리에 올랐다. 그는 76세, 모사데그는 69세였다. 두 사람 다 자기 방식대로 국익을 위해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던 완고한 노인이었다.
영국 정보요원 몬티 우드하우스는 워싱턴에서 월터 베델 스미스와 와이즈너를 만나 1952년 11월 26일 어떻게 모사데그를 축출할 수 있을지 의견을 나누었다. 음모는 미국 대통령의 교체시기에 시작됐다. 박으로 공표된 미국의 정책은 모사데그를 지지하는 것이었지만 CIA는 백악관 승인도 없이 모사데그를 축출할 계획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 정보부는 이 쿠데타 계획에 평범하고 단조로운 ‘부트 작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커밋 루즈벨트는 ‘아이아스 작전’이라는 보다 장엄한 이름을 붙였다. CIA는 영국 정보부가 통제하는 매수 조직망을 통해 필요한 돈을 얻었다. 그 조직망은 선박과 은행과 부동산을 지배하던 친영파 이란인 삼형제인 라시드족 형제들이 운영했다.
CIA 테헤란 지부장 로저 고이런은 본부에 왜 미국이 중동에서 영국 식민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으려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며, 그렇게 할 경우 역사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며 오랜 세월 미국의 이익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앨런 덜레스는 그를 워싱턴으로 소환한 뒤 지부장 지위를 박탈했다. 8월 19일 새벽, CIA가 고용한 폭도들이 테헤란에 집결했다. 역도 선수나 차력사들이었다. 그날 테헤란 거리에서 최소 100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CIA가 샤의 제국수비대더러 모사데그의 집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적어도 200명이 더 사망했다. 모사데그는 탈출했지만 다음날 항복했다. 그는 3년간 감옥에서 생활했고 그 뒤 10년 이상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사망했다.
CIA가 어떤 국가의 정부든 무너뜨릴 수 있다는 환상은 매혹적이었다. 이 환상이 그 뒤 40년 동안 이어질 중앙아메리카의 전투 현장으로 CIA를 이끌었다.
기시 노부스케의 밀약
CIA는 외국 정치인을 돈으로 매수하는 데 탁월했다. 세계 권력의 미래 지도자로 선택한 첫 번째 국가는 일본이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일본인 요원이 일본 정부를 통제하는 임무 수행을 도왔다. 두 사람은 전범으로 기소된 감방 친구였고, 전후 미군정 아래에서 3년 동안 감옥생활을 한 뒤 1948년 말 수많은 동료 전범들이 교수대에 오르기 하루 전 석방됐다. CIA의 도움으로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수상(총리)이 됐다. 요시오 코다마는 자유를 얻는 동시에 일본 최고의 폭력조직 우두머리 지위를 굳혔다.
1930년대에 코다마는 수상을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우익 청년단을 이끌었다가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됐는데, 일본 정부는 다가오는 전쟁에 대비한 첩보원과 전략 금속들의 생산을 담당하는 인물로 그를 활용했다. 전쟁 동안 중국에서 가장 큰 암흑시장을 운영하던 그는 자기 재산 일부를 일본에서 가장 보수적인 정치인들을 후원하는 데 쏟고, 이들이 권력을 잡도록 돕는 CIA 공작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전쟁 동안 미국인 기업가들, OSS 대원들, 그리고 전직 외교관들과 함께 CIA가 자금을 대는 노골적인 비밀 공작을 벌였다.
미 군부는 희귀 금속인 텅스텐을 필요로 했다. 코다마의 조직망은 일본의 텅스텐 수 톤을 미국으로 밀수했다. 펜타곤은 이 대금으로 1000만 달러를 지불했다. 그런데 이 작전으로 CIA 도쿄지부는 코다마를 나쁘게 평가하게 됐다. 결국 CIA와 코다마의 관계는 끊어졌고, CIA는 기시 노부스케를 포함해 젊은 일본 정치인들을 후원하는 데로 관심을 돌렸다. 기시는 일본에서 새롭게 부상한 보수주의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코다마의 자금과 정치 수완을 무기 삼아 국회의원 가운데 최대 계파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됐고 일본을 거의 50년 동안 이끌게 될 자민당을 만들었다.
기시는 전후 전범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에서 미국에 많은 후원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기시는 석방되자마자 곧바로 군정 내각의 내무성 장관이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가 살던 수상관저로 갔다. 사토는 기시에게 갈아입을 옷을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 우리는 지금 모두 민주주의자가 되어 있단 말이야.” 기시는 7년 동안 끈질긴 노력과 계획으로 마침내 수상이 됐다. 그는 뉴스위크 도쿄지국장으로부터 영어교습을 받았으며 뉴스위크의 외국 담당 편집자 해리 컨으로부터 미국 정치인들을 소개받았다.
1954년 3월 그는 도쿄의 가부키 극장에서 정치적 복귀를 화려하게 연출했다. 그는 빌 허친슨을 초대했는데, 허친슨은 OSS 대원이었으며 일본의 미국 대사관에서 CIA 임무를 수행하던 인물이었다. 기시는 가부키 극장의 화려한 로비를 누비면서 일본 정계의 거물들에게 허친슨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기시는 1년 동안 허친슨의 거실에서 CIA 요원과 미 국무부 관리들을 은밀하게 만났다. 허친슨의 집에서 있었던 대화들이 그 뒤로 이어질 일본과 미국의 40년 우호관계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자기가 정권을 잡으면 일본의 외교정책을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겠다고 맹세했다.
CIA와 자민당의 가장 결정적인 상호작용은 돈과 정보의 맞교환이었다. CIA는 이탈리아에서보다 훨씬 정교한 방법들을 썼다. 고급 호텔에서 현금 가방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미국 기업들을 내세웠다. 그 하나로 록히드사를 꼽을 수 있다. 1957년 2월, 기시가 수상에 오르던 바로 그 날 자민당이 최대의석을 확보하고 있던 의회에서 안보조약을 비준하는 투표가 예정돼 있었다. “당시 의원들 사이에는 열시 삼십 분이나 열한 시에 휴정을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기시는 자민당 의원들에게 이렇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휴식 시간에 회의장 바깥으로 나가지 마라.’ 자민당 의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들이 모두 자리를 비우자 이들은 비준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죠.”(CIA의 클라이드 매커보이)
다른 사람들도 기시의 길을 따랐다. 전시 내각에서 재무성 장관을 역임했던 가야 오키노리 역시 전범으로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인물인데 1955년에 가석방됐고 1957년에는 사면을 받았다. 가야가 CIA와 공식·비공식적으로 맺었던 관계는 사토 에이사쿠 수상의 가장 믿음직한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하던 1968년에 절정에 다다랐다. 이 해 일본의 가장 큰 정치적 쟁점은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였다. 이 기지는 베트남 폭격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지였으며 미국 핵무기 저장소이기도 했다.
이스라엘과의 협력
1956년 4월, 이스라엘 정보기관이 흐루시초프의 연설 원고를 제임스 앵글턴에게 전달했다. 그 뒤 제임스 앵글턴은 이스라엘과 접촉하는 연락담당 요원이 됐다. 이 창구에서는 아랍세계에 대한 CIA 정보의 많은 부분을 생산했다. 그러나 여기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스라엘에 점점 더 많이 의존을 해야 한다는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은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을 공격했다. CIA는 이를 미리 알고 있었다. 헬름스는 이스라엘이 정한 시각에 정한 장소로 공격을 개시할 것이며 신속하게 즉 며칠만에 승리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말했고, 린든 존슨은 마음을 놓았다. 헬름스가 이런 예측을 정확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앵글턴 덕분이다. 앵글턴은 이 정보를 이스라엘 정보기관 고위층의 친구에게서 입수한 뒤 헬름스에게만 전달했다.
‘성전’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성전을 보다 강화하길 원했다. 1957년 한 백악관 회의에서 대통령은 “우리는 ‘성전’이라는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서 모든 걸 다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포스터 덜레스는 비밀전담반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이 조직의 지원 아래 CIA는 사우디 국왕 사우드, 요르단 국왕 후세인, 레바논 대통령 카밀레 샤모운, 그리고 이라트 대통령 누리 사이드에게 미국 무기와 돈 그리고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거였다.
비밀전담반의 유산 중 유일하게 남은 것은 요르단 국왕 후세인을 CIA 대원 명부에 올리자는 와이즈너의 제안을 이행한 것이었다. CIA는 요르단 정보기관을 창설했고 이 기관은 지금까지 남아서 아랍 세계와의 연락책 기능을 하고 있다. 요르단 국왕은 그 뒤 20년 동안 CIA로부터 비밀 지원금을 받았다.
콩고(자이르) 모부투와의 결탁
대통령은 CIA 국장에게 그들이 아프리카의 카스트로라고 보았던 콩고(현 DR콩고)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CIA는 이미 콩고의 차기 지도자를 점찍어두고 있었다. 조셉 모부투였다. CIA는 돈과 무기와 탄약을 그에게 제공했다. 모부투는 루뭄바를 사로잡은 뒤 덜레스가 주문한 대로 그를 ‘철천지원수’의 손에 넘겨주었다. 콩고 심장부 깊은 곳인 엘리자베스빌에 있던 CIA 지부는 “플랑드르 출신의 벨기에 장교가 기관단총 세례로 루뭄바를 처형했다”고 본부에 보고했다. CIA의 꾸준한 지원으로 모부투는 5년 동안의 권력투쟁 끝에 마침내 대통령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CIA의 유익한 동맹자로서 냉전 기간 아프리카에서 펼쳐진 온갖 비밀공작의 세탁소 역할을 했다.
콩고는 냉전의 싸움터였고 모부투와 CIA는 긴밀하게 협조했다. 당시 모부투는 심바스라는 초라한 반군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심바스 전사들이 1964년 CIA 책임자를 납치했다. 모부투는 돈과 총, 비행기와 조종사, 주치의 그리고 미국 정부와 밀접하게 접촉할 수 있는 연락관이라는 정치적 안전판 등 모든 것을 CIA로부터 얻었다. 그리고 CIA는 아프리카 심장부에 기지들과 지부들을 세웠다.
카스트로 암살시도와 케네디 피살
존슨은 부통령이었지만 미국이 3년간 카스트로를 죽이려고 온갖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한 사람은 앨런 덜레스, 또 한 사람은 리처드 헬름스, 세 번째가 로버트 케네디였고 네 번째는 피델 카스트로였다. “헬름스는 (카스트로) 암살음모를 밝히는 일이 진행되면 CIA와 자기 자신에게 매우 불리한 사실들이 드러날 것임을 알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공작에 대한 복수로 쿠바가 이런 암살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CIA나 자신에게 엄청낸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죠.”
수카르노 축출과 캅 게스타푸
1965년 10월 1일 밤 수카르노가 친위쿠데타를 감행했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과 연합해 통치력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PKI는 그동안 꾸준히 성장해 당원 350만명을 거느림으로써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공산주의자 조직이 됐다. 하지만 수카르노의 좌경화는 그에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날 밤 군 장성이 최소 5명 암살됐다. 국영 라디오방송은 대통령과 국가를 CIA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혁명위원회가 국가권력을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CIA가 확보한 주요 인물은 정확하게 한 명, 48세의 아담 말리크였다. 끔찍한 몇 주 뒤 인도네시아는 두 개로 쪼개졌다.
CIA는 아담 말리크와 중부 자바의 술탄, 그리고 수하르토 육군소장이 연합한 이름뿐인 그림자 정부를 실질적인 강력한 존재로 만들려고 애섰다. 말리크는 신임 미국 대사 마셜 그린과 은밀히 만나 대화하며 ‘캅 게스타푸(9월 30일 사태라는 뜻. 그 해 9월 30일에 군 내 공산주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가 수하르토의 반격으로 끝났다. 군 내 반란세력을 진압한 조직이 캅 게스타푸였다)’를 통해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자기들이 반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명히 깨달았다. 미국은 수하르토와 그의 캅 게스타푸가 미국의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에 거대한 폭력과 살육의 해일이 덮쳤다. 캅 게스타푸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린 대사는 나중에 허버트 험프리 부통령에게 “30만명에서 40만명이 피의 욕조 속에서 살해됐다”고 말했다. 훗날 상원에 출석한 그린은 “그 수치를 50만명 가깝게 올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저 완전히 사라진 마을의 숫자를 놓고 추정을 할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말리크는 외무장관으로 임명됐다. 백악관에 초청돼 미국 대통령을 이십분간 만났다. 대화 말미에 린든 존슨은 말리크와 수하르토의 건승을 빌었다. 말리크는 미국을 등에 업고 나중에는 유엔 총회 의장을 역임했다.
티베트 지원
1960년대 10년 동안 CIA는 중국 공산당과 싸운다는 이름 아래 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를 위해 싸우던 수백 명의 티베트 게릴라에게 수 톤의 무기를 공수하고 수천만 달러를 지출했다. 1960년 아이젠하워는 브리핑에서 이 작전에 대해 보고받고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이 작전 때문에 티베트를 더욱 지독하게 탄압하고 앙갚음을 하는 게 아닐지 염려했다.” 그럼에도 아이젠하워는 이 작전을 승인했다. CIA는 콜로라도 로키산맥에 티베트 전사 훈련소를 세웠고 달리아라마에게 직접 약 18만 달러를 줬다. 그리고 뉴욕과 제네바에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티베트 대표기관 기능을 할 수 있는 ‘티베트의 집’을 세웠다. 자유 티베트에 대한 꿈을 살려두는 것과 아울러 중국 서부의 붉은 군대를 귀찮게 하기 위해서였다.
키신저 시대가 되자 비록 달라이라마에 대한 지원금은 계속 지급됐지만 티베트 전체 차원의 저항은 포기했다. 중국을 상대로 CIA가 20년간 수행해 온 비밀공작들의 유산을 모두 포기했던 것이다. 닉슨과 키신저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와 마주앉을 계획을 갖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CIA는 여전히 중국 해방을 꿈꾸는 장개석 총통과 손을 잡고 있었다.
태국의 ‘민주주의’
군사정권은 11년 동안 태국을 지배했었다. CIA는 베트남전을 지탱하기 위해 모든 전선에서 싸웠다. 이런 비밀공작의 결과로 1969년 2월 태국에 민주주의가 들어섰다. 암호명 '로터스'인 선거공작은 1965년 그레이엄 마틴 대사가 처음 생각한 노골적인 돈 장난이었는데 존슨이 이를 처음 승인했고 나중에 닉슨도 재확인했다. CIA는 1968~69년 수백만 달러를 태국 정치판에 풀었다. 이 바람에 군사 정권은 선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정당으로 교체됐다. CIA의 돈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은 주미 태국 대사 출신인 포테 사라신이었다. 그는 군사독재정권이 내세우던 간판 민간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배자들은 점차 민주주의 절차를 성가시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포테 사라6신은 무혈쿠데타가 일어나자 군사정권의 얼굴마담으로 다시 돌아갔다.
사이공에서의 마지막 전문
CIA 사이공 지부장은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한 딱 한 사람이었다. 1975년 4월 29일, 미국 대사관 안에서 폴가는 성난 사람들이 닉슨과 키신저의 사진을 내동댕이치고 짓밟는 광경을 보았다. 주차장에서 시작되는 대사관 비밀 통로의 끝은 프랑스 대사관 정원이었다. 마틴 대사 등은 이리로 피신했다. 그날 저녁 폴가는 CIA 자료들을 불태우고, 자정이 조금 지나 작별의 전문을 작성했다.
“이것은 사이공 지부에서 보내는 마지막 전문이 될 것이다. (중략) 길고 긴 싸움이었고, 이제 우리가 이 싸움에서 졌다. (중략)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 다시는 또 다른 베트남을 경험하지 않기를 기원하자. 여기에서 교훈을 얻었기를 기대하자. 여기는 사이공, 교신 끝.”
그리고 전문을 보낸 뒤 기계를 폭파했다.
이용당한 흐멍족
CIA의 제리 대니얼스는 라오스에서의 흐멍족 철수 작전을 지휘했다. 당시 그는 공황상태에 놓인 5000명의 생명줄을 잡고 있었다. 대니얼스와 방 파오가 흐멍족 전투 부대와 그들 가족을 버렸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흐멍족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난민 수용소에 수용됐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완전히 파괴됐다. 그들은 이제 다시 라오스로 돌아가지 못한다. (중략) 미국은 폭풍같았던 긴 세월 동안 우리 가까이에서 함께 일했던 그들에게 진 도덕적인 빚을 떠안으려 하지 않았다.”
카터 시대
카터의 국가안보 팀에는 다섯 명의 핵심 멤버들이 참여했으며 각기 다른 네 개의 의제를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인권 원칙을 기초로 하는 미국의 새로운 외교정책을 꿈꿨다.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에게는 군비 축소가 지상 과제였다. 해럴드 브라운 국방부 장관은 계획보다 적은 수십억 달러로 군사·정보기술의 새로운 세대를 열어가겠다는 포부가 있었고 안보담당 특별보좌관 브레진스키는 비둘기들과 올빼미 사이의 사나운 매였다. 그는 소련의 가장 약한 고리를 포착해 공격하려고 애썼다.
브레진스키의 국가안보회의에 소련 분석가로 참가했던 로버트 게이츠는 지미 카터가 시작한 정치전이 냉전의 새 전선을 열었다고 말했다. “인권 정책을 통해서 카터는 트루먼 이래로 소비에트 정부의 적법성을 직접 공격한 최초의 대통령이 됐다. 소비에트는 즉각적으로 이것이 근본 문제를 파고드는 공격임을 깨달았다. 카터가 자기들 체제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터의 목적은 온건했다. 그는 소련 체제를 바꾸려고 했지 무너뜨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남아공을 버리다
카터는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을 공격하는 데에도 CIA를 활용했다. 이는 30년 동안 이어진 냉전 외교정책의 경로를 바꿨다. 1977년 2월 백악관 국가안보팀은 인종차별적인 남아공 정권을 바꿀 때가 왔다는 데 의견을 함께 했다. 3월 3일 국가안보회의에서 카터는 CIA에 남아공과 로디지아에 경제적, 정치적 압력을 가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소련은 ANC를 지원했다. ANC 의장 만델라가 1962년 체포되는 데 CIA도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CIA는 남아공 정보기관 국가안전국(BOSS)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프리카 4개국 CIA 지부장으로 일했던 게리 고센스는 이렇게 말했다. “CIA 요원들은 남아공 비밀경찰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다녔죠. 그러니까 우리 요원들이 만델라를 찍어서 넘겨주었다는 말입니다.” 1978년 고센스는 프리토리아 신임 지부장으로 갔다. 워싱턴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남아공 백인정부를 염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CIA는 소련을 남아프리카에서 밀어내고 흑인 아프리카 정부들로부터 지지를 얻으려는 미국의 야심찬 노력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됐다.
리비아와 차드와 이라크
CIA는 리비아 상대 공작의 작전기지를 물색, 인접국인 차드 정부를 통제하기로 하고 작업에 나섰다. 이를 수행할 차드의 대원은 국방부 장관 이센 아브르였다. 그는 정부와 결별하고 서부에 약 2000명의 군인을 데리고 있었다. 차드에 대한 미국의 공식 정책은 파벌 간의 싸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아브르는 국민을 상대로 수많은 잔학행위를 했었다. CIA는 아브르와 그의 역사를 거의 모른 채로 1982년 그가 대통령이 되게 도왔다. 그가 카다피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브르와 그의 군대가 권력을 잡으려 싸우던 과정에서 수천 명이 사망했다. 전투가 격렬해지자 CIA는 아브르를 스팅어미사일로 무장시켰다. 1980년대 내내 CIA의 동맹자인 아브르가 사담 후세인에게 직접적인 접촉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었다. 1991년 걸프전 발발 전날 밤, CIA는 차드에 보낸 십여 기의 스팅어미사일이 자신들도 모르게 사라졌음을 알았다. 아마도 사담의 손 안에 있을 터였다.
이란-콘트라 사건
CIA는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낙후된 미사일을 받아 이란에 전달했다. 이란 정부는 물량이 적은데다 구식이라는 점, 이스라엘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후에는 펜타곤이 CIA에 수천 기의 토우 미사일을 전달하게 되는데, 한 기 가격은 할인된 3496달러였다. 와인버거 국방장관은 1985년 1월 수석보좌관 콜린 파월에게 토우 미사일 천 기를 펜타곤 창고에서 CIA에 넘기라고 지시했다. CIA가 펜타곤에 지불하는 가격은 1만 달러였고 한 기에 6532달러가 남았다. 이 순수익은 고스란히 중미의 콘트라에 넘어갔다. 이란 사기꾼 고르바니파르는 이 1만달러에 얼마를 더 붙여 이란 정부에 팔았다. 무기들은 2월에 이란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이 계산에 한 가지 요소가 빠져 있었다. 인질들이었다. 1986년 7월에 여전히 네 명이 인질로 붙잡혀 있었다. 여섯 달 뒤에는 인질 수가 열두 명으로 늘었다. 미국이 이란에 기꺼이 무기를 제공할 마음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면서 미국인을 납치하겠다는 욕구만 키워준 셈이 되었다. 당시 이란 정부에는 온건파가 남아 있지 않았다. 온건파는 모두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받아든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혀 있었다.
아부 니달 사건
이 작전은 CIA의 새로운 대테러센터에서 비롯됐으며 지미 카터가 1987년 3월 시리아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에게 아부 니달에 관한 정보를 넘겨준 뒤 본격 시작됐다. 아사드는 테러범들을 추방했다. 다음 두 해 동안 CIA는 PLO와 요르단, 이스라엘 정보기관들 도움을 받아 아부 니달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쳤다. 아부 니달은 부하들이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하고 수십명을 살해했다. 그의 조직이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라크 거짓정보
“전쟁에 이기려면 정보가 중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전쟁은 정보로 이기는 게 아니다. 우리가 전쟁터로 내보내는 청년들의 피와 보물과 용기로 이긴다. (중략) 정보가 정말로 도움이 되는 것은 전쟁을 피하도록 할 때이다.” (CIA의 이라크 무기사찰팀장 데이비드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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