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사람들의 모임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그냥 모여 있는 사람들은 '계열', 서로 소통하는 무리는 '그룹', 그리고 '조직'이다. 그 중 첫 단계인 '계열'은 사회적으로는 별 힘이 없다. 계열 속의 사람들은 서로 남이다. 책에 적혀 있는 유식한 말로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다. 반대로 그룹은 서로 엮이면서 융합된다. 그래서 '상호성'이 생겨난다.
이들이 마지막 단계인 '조직'이 되는 순간 '정치'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나와 너는 이제 더이상 남이 아니야(그러고 보면 '우리가 남이가'처럼 정치적인 행위는 없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남이 되지 않는다는 보증이 있어야 한다. 배신자가 나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이 부분에서 회의주의로 돌아선다.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서로의 맹세는 '형제애' 못잖게 '배신에 대한 두려움(공포)'에 의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사르트르를 공부한 것은 아니고, 알랭 바디우의 책에서 본 글이다. 바디우는 버스 정류장의 사람들을 예로 든다.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냥 '계열'이다. 같은 목적을 갖고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지만 남이 왜 버스를 기다리는지 굳이 묻고 궁금해하고 할 필요는 없다. 왜냐? 남이니까.
그런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면? 투덜거린다. 말을 한다. 불평하고 항의한다. 이제 '융합'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옆자리에서 기다리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 저 사람과 나의 처지는 같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유동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집단적으로 버스 회사에 전화를 걸 것인가? 서울 시에 항의를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모두 버스 정류장의 사람들이다. 보이고 들리는 소식은 온통 슬프다. 눈물과 분노를 자아낸다. 우리 주변의 모든 미디어가 중개하는 것들은 슬프고 화나는 소식이다. 사실은 이게 저널리즘의 본질이다. 아름다운 소식, 권장할만한 내용을 전할 때도 있지만 그것이 주를 이룬다면 '계도'이지 저널리즘이 아니다. 미디어가 전하는 소식들에 불편해하고, 마음 상하는 것. 그것이 연대의 출발점이며, 이를 끄집어내는 것이 저널리즘의 의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 소식에서 벗어나려 해도 우리는 벗어날 수 없다. '여기가 로도스'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굳이 세월호 사고를 보며 '이것이 나라인가'를 외치고 싶지는 않다. 이런 국가, 이런 정부를 만든 이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슬퍼하고 화를 내며 자책하고 미안해 한다. 우리는 노란 리본을 달고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고민해야 하는 것은 사르트르를 멋지게 한 방 먹이는 방법, 두려움이 아닌 형제애로 시민의 '정치'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행동이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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