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

방글라데시 사태와 '윤리적 대응'의 딜레마

딸기21 2013. 5. 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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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다카 북쪽의 가지푸르에 있는 ‘가리브’라는 의류공장 벽에  지난 3일 금이 갔다. 이 건물에는 의류공장 2곳이 입주해 있었다. 공장주들은 기계를 멈추고 노동자들을 내보냈다. 다카 근교 사바르 의류공장 붕괴사고를 본 공장주들이 일단 공장 문부터 닫은 것이다. 

일간 데일리스타는 이 건물에서 2010년 2월 불이 나 21명이 숨진 적이 있다고 보도했다. 노동자들은 그 후 “안전한 근무환경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해왔지만 번번이 묵살당했다. 경찰은 공장주들에게 “건물 정밀검사 후 가동을 재개하라”고 했으나 지켜질지는 알 수 없다. 하루 벌어 먹고살기도 힘든 노동자들만 일당을 날리게 됐을 뿐이다.

약 6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바르 사건이 일어나자 영국 등의 대형 의류판매체인들이 방글라데시산 ‘노동착취상품’을 팔아왔다는 비판에 휩싸였다. 하지만 번번이 재연되는 사고에서 보이듯 소비자들의 윤리적 대응만으로는 저개발국의 현실을 바꾸는 데에 한계가 있다.



‘패스트패션(저임금 노동력으로 생산되는 저가 의류)’ 문제를 추적해온 영국 작가 엘리자베스 클라인은 BBC방송에 “의류공장 하나를 제대로 바꾸는 데에는 50만달러가 들어간다”며 “공장주들은 그만한 돈이 없어도, 대형 브랜드들은 돈이 있다”고 지적했다. 소비자들이 글로벌 기업들을 압박함으로써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러 기업이 방글라데시 사고 뒤 지원을 약속했으며, 관련성을 부인해온 베네통조차 로고가 찍힌 의류제품 사진들이 계속 올라오자 4일 성금을 내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선진국 소비자들의 압박 때문에 세계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더 굶게 된다”는 비판도 있다. 유럽연합은 사바르 사건 뒤 방글라데시에 무역제재를 경고했다. 그러자 방글라데시 정부는 “지나친 조치는 우리 국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고 전부터 미국 월트디즈니 등 몇몇 대기업은 ‘안전 리스크’와 정치불안을 들어 방글라데시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옥스퍼드대 린다 스콧 교수는 “의류 생산기지는 세계에 널려 있다”며 불매운동은 착취 산업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만들 뿐이라고 지적했다.


노동착취나 인권침해, 환경파괴형 산업에 대한 소비자들의 비판의식은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으며 ‘공정무역’ 시장도 커지고 있다. 

외부 압박이 효과를 거둔 대표적인 예로는 아동노동·노예노동을 이용한 카카오 생산을 상당부분 없앤 것을 들 수 있다. 1990~2000년대 미국과 유럽 소비자들은 네슬레 등을 압박해 초콜릿 원료인 카카오 생산과정을 개선했다. 하지만 카카오의 경우 전 세계 생산의 30~50%가 코트디부아르 한 나라에서 이뤄진다는 특징이 있었다. 세계 카카오 유통망도 서너 개 기업에 장악돼 있었기에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었다. 

흔히 ‘바나나 공화국’이라 불리던 카리브해 바나나 생산국들의 독재정권과 결합해 이익을 거두던 미국과 유럽 농산물업체들도 소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농민들에게 주는 몫을 늘렸다.


반면 커피의 경우 생산지역과 공급자가 워낙 많아 비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즉 외부로부터의 규제는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저항할 힘이 없는 노동자들이나 원주민·소수민족들에게 외부의 연대가 도움이 될 때가 많지만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특히 의류산업처럼 과잉경쟁인 분야에서는 효과를 거두기가 더욱 힘들다. 지난달 말 독일에서 방글라데시와 거래하는 의류회사들을 압박하기 위한 비정부기구 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방글라데시 의류산업 환경개선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한 기업은 타미힐피거와 캘빈클라인의 모회사인 미국 PVH와 독일 소매업체인 치보그룹뿐이었다. 이는 브랜드 압박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사진. 베네통 태그가 박힌 티셔츠가 사바르 공장터에 흩어져 있다.

베네통은 이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을 납품받은 적 없다고 했다가, 이런 사진들이 올라오자 

뒤늦게 사과하고 "기금을 만들어 피해자들에게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방글라데시는 의류·섬유노동자가 350만명이지만 노동법원은 7개뿐이다. 방글라데시 노동부는 법정 인원의 절반밖에 채용하지 않고 있었다. 사고 건물주는 여당 간부로, 건물을 짓고 관리하는 동안 모든 법망을 피해갔다. 이처럼 재앙의 1차 원인은 해당국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있었다.


일부 우파 경제학자들은 “성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주장한다. 영국 경제칼럼니스트 팀 하포드는 파이낸셜타임스 기고에서 “방글라데시에서는 경제성장으로 빈곤이 줄어들고 문자해독률과 기대수명이 올라가고 있었다”며 “유럽연합이 방글라데시를 제재하면 인도적 비용은 더 올라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글로벌기업과 저개발국 정부 모두를 상대로 투명성을 요구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런 점에서 국제노동기구(ILO) 주도로 4일 다카에서 열린 회의는 눈길을 끈다. 이 회의에는 방글라데시 정부 측과 의류산업 관련단체·노조연합 대표들이 참석했다. 구속력을 높이기 위해 미국·유럽·캐나다 대사 등도 참석했다. 국제노동기구는 이 자리에서 의류산업 ‘로드맵’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이번 사건으로 국제적인 시험대에 올랐으며, 성과를 반드시 보여줘야 하는 처지가 됐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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