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 커즈와일. 김명남·장시형 옮김. 진대제 감수. 김영사
레이 커즈와일은 참 재밌는 사람인 것 같다. 발명가이고, 부자이고, 불로장생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데, 아이디어맨인데다가 생각이 앞서나가도 한참 앞서나간다. 저자는 “내가 너무 앞서나가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변화는 이미 진행 중!”이라고 누차 주장하는데, 나는 저자의 말에 어쩐지 혹한다. 허풍선이처럼 표현을 해서 그렇지,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 같은 소설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 혹은 상상돼 왔던 것들 아닌가.
저자는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이 이번 세기 전반을 지배할 세 가지 변화를 이끌어낼 것이며, 이는 정보혁명의 서로 다른 세가지 얼굴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넘어 인간의 지성/의식은 이제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고 있다.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 인간 뇌 속 정보들은 이제 컴퓨터/인공지능과 통합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전우주적인 의식의 통합’으로 나아갈 것이다!
에너지 활용기술이 높아지면 우리는 획기적으로 에너지를 적게 소비하는 정보처리과정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나노기술의 발달 덕에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온실가스와 환경오염도 다 해결할 것이고 질병의 치료와 인공 신체/장기 생산도 가능해질 것이며, 분자조립자라는 작은 창조주들을 만들어서 세상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며(도라에몽을 연상케 한다;;), 완벽을 향해 고안된 ‘버전 2.0의 신체’를 갖게 될 것이며… 여튼, 우리는 지금 그러한 양질 전화의 시기, 곧 ‘특이점’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 커즈와일의 주장이다.
황당무계한 얘기 같지만, 황당한 일이 어디 한 둘이었나. 유전자조작 옥수수에 악수하는 로봇, 등에 귀 달린 쥐 같은 것들도 예전엔 다 상상 못했던 것들이었다. 심장도 간도 각막도 다 이식하는 마당에, 팔다리에 의족 의수 달 수 있는 마당에, 뇌를 교체하고 머리 속에 컴퓨터를 단다 해도 안 될 것은 없지 않은가.
생물학적 지능(동물)과 비생물학적 지능(기계)의 본질적 차이 따위는 없다.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지가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인공지능을 머릿속에 이식한다면, 컴퓨터에 내 뇌 속의 기억과 정보, 곧 나의 생각과 마음과 감정을 모두 다운로드한다면, 이 육체의 나는 나인가, 저 컴퓨터는 나인가. 특이점의 시대에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책은 재미난 주제들과 소재들을 섭렵하고 있는데 좀 많이 길다. 150쪽에 이르는 주석과 부록을 빼고도 본문만 680쪽인데, 중언부언이 많아 지겨웠다.
... 2040년 중반이 되면 비생물학적 지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그건 여전히 인류 문명일 것이다. 인간은 생물학을 초월하는 것이지, 인간성을 초월하는 게 아니다. (183쪽)
“기억의 작동 방식에 대해 한동안 이런저런 발견이 이어졌지만 주된 저장 장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화이트헤드 생의학 연구소 소장인 수전 린퀴스트의 말이다. “이 연구 덕분에 저장 장치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단백질의 프리온식 활동이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발견입니다. 프리온이 그저 자연의 별종이 아니라 근본적인 과정들에 참여하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프리온은 전자 기억장치를 만드는 데도 유용하게 쓰일지 모른다. (239쪽)
분자조립자는 다양한 모양새로 상상되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모습이라면 책상에 올려놓을 만한 크기의 기기를 통해 온갖 물건들을 생산해내는 조립자다. 소프트웨어만 있으면 무엇이든, 컴퓨터, 옷, 예술 작품, 조리된 음식에 이르기까지 뭐든 만들 수 있다.
... 진짜 비용은 생산품을 묘사하는 정보의 가치에 달렸다. 조립 과정을 통제하는 소프트웨어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세상 모든 것의 가치는, 물론 물리적 실체들도 포함하여, 전적으로 그 속에 저장된 정보의 가치에 달렸다. ... 분자 제조 과정을 통제하는 소프트웨어 자체도 광범위한 자동화 작업에 의해 설계될 것이다. 요즘의 전자 칩과 마찬가지다. (315쪽)
그런데 분자 제조기술의 목표는 생물학의 분자 조립 능력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생물계는 오로지 단백질을 바탕으로 한 구조만 만들 수 있어 강도나 속도에 심대한 제약이 있다. 단백질 자신은 3차원적 구조이지만 생물학 자체는 1차원적 아미노산 사슬을 3차원으로 접어주는 화합물에 의존하고 있다.
... 다이아몬드 형 물질 조립자는 외부로부터 계속 물질을 입력 받아야 한다. 이 점은 분자 규모의 로봇이 바깥 세상에서 광포하게 자기복제하는 것을 막아줄 몇 가지 안전장치 중 하나다. 생물학의 복제 로봇인 리보솜 또한 늘 자원과 연료 물질을 필요로 하는데, 우리는 소화계가 흡수한 영양분으로 그것을 공급해준다. 그런데 나노 복제자가 더욱 정교해지면, 그래서 정제되지 않은 원료 물질에서도 탄소 원자나 분자 조각들을 끄집어 쓸 수 있다면, 그때는 커다란 위기가 닥칠 것이다. 나노 복제자는 어떤 생물보다도 강하고 빠르기 때문에 더 그렇다. (319쪽)
뇌에 널리 퍼진 나노봇들은 기존의 생물학적 뉴런과 상호작용할 것이다. 오감으로 완전 몰입형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고, 신경계 내부로부터 작업을 하여 감정을 유발시키기도 할 것이다. 타고난 생물학적 사고 장치와 우리가 만들어낸 비생물학적 지능이 융합됨으로써 인간의 지능은 엄청나게 확장된다.
학습은 일단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겠으나, 뇌 자체를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게 되면 거추장스런 과정 없이 곧바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다운로드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음악과 미술에서 수학과 과학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지식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노는 것 역시 지식을 창조하는 일이 될 테니, 사실상 일과 놀이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어진다.
지구 상의, 그리고 지구를 둘러싼 지능은 줄곧 기하급수적 확장을 거듭하여 결국에는 지능적 연산을 뒷받침할 물질과 에너지가 모자라는 순간에 다다를 것이다. 그렇게 우리 은하의 에너지를 모두 소모하고 나면 인간 문명의 지능은 이론적으로 가능한 최고의 속도로 더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413쪽)
새로운 인체를 개념적으로 설계한 것 중에 예술가이자 문화 촉진자인 나타샤 비타-모어가 고안한 프리모 포스트휴먼이라는 것이 있다. 인체의 이동성, 유연성, 내구성을 최적화하려는 설계로서, 나노봇을 이용해 AI를 구현한 인공 신피질로 광역 통신이 가능한 보조 뇌, 색깔과 질감을 바꿀 수 있는 바이오센서에 고감도 감각 기능을 갖추었으며 태양빛도 보호해주는 스마트 피부 등을 쓰는 것이다. (416쪽)
나는 2030년대나 2040년대에 좀 더 근본적인 인체의 재설계, 이른바 버전 3.0 인체가 탄생할 것이라 본다. ... 내가 버전 3.0 인체의 특징 중 하나로 꼽는 것은 말 그대로 쉽게 신체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뇌의 대부분이 비생물학적 물질로 찬다 해도 인간은 인체에 대해 미적이고 감정적인 애착을 계속 느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미감은 우리에게 의미가 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단 인체가 엄청난 유연성을 획득하게 된 이상, 미적 기준 자체가 서서히 변할 것이다. (427쪽)
특이점 이후를 ‘포스트휴먼’ 시대라 부르며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좀 생각이 다르다. 인간이란 존재는 끊임없이 제 경계를 넓혀가려는 문명에 속한 존재다. 인간과 기술의 융합은 분명 급속한 변화를 가져올 사건이다. 하지만 놀라운 혜택들을 가능케 할 오르막이지, 니체의 심연에 바지게 할 내리막은 아니다. 융합 후의 인간을 새로운 ‘종’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종이라는 개념 자체가 순수한 생물학적 개념인데, 정작 변화는 생물학 자체를 초월하는 것이다. 특이점이라는 변화는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 역사의 마지막 단계가 아니다. 아예 생물학적 진화를 통째로 딛고 올라서는 단계인 것이다. (519쪽)
나는 비생물학적 개체에도 의식이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본다. 비생물학적 개체들도 인간이 현재 지니고 있는 온갖 미묘한 의식의 단서들, 감정이나 기타 주관적 체험과 결부되어 있는 듯한 현상들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 나는 패턴에 바탕을 둔 철학을 믿는다. 나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영속하는 패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진화하는 패턴이고, 스스로의 패턴 진화 과정에서 영향력을 갖는다. 지식 또한 하나의 패턴이다. 정보와는 다르다. (536쪽)
프라이타스는 나노봇이 일으킬 수 있는 여러 끔찍한 상황들을 상상해 보았다. ‘그레이 플랑크톤’ 시나리오는 해로운 나노봇들이 바다 바닥에 메탄 형태로 저장된 탄소와 이산화탄소 형태로 녹아 있는 탄소를 해치우는 것이다. 바다에 있는 탄소 자원의 양은 지구 생물자원 탄소량의 열 배나 된다. ‘그레이 먼지’ 시나리오는 자기 복제하는 나노봇들이 공기 중의 먼지를 재료 삼고 태양빛을 동력 삼아 번지는 것이다. ‘그레이 이끼’ 시나리오는 바위에 있는 탄소 등의 물질이 점령되는 상황이다. (558쪽)
미래 기술의 영향을 숙고하는 사람들은 종종 세 가지 생각의 단계를 겪는다. 첫째는 오래된 골칫거리들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데서 오는 경외와 놀라움, 둘째는 새로운 기술에 수반한 심각한 위험들에 대한 두려움, 마지막은 우리가 책임감 있게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위험을 적절히 관리하며 편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조심스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5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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