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얘기 저런 얘기/딸기의 하루하루

촛불시위

딸기21 2002. 12. 1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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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저녁 때 시청앞에 갔다. 야 정말 오랜만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월드컵 때에도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내가 드디어 서울시내 한복판으로.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차에서 내려 시청까지 걸어가는데 도처에 반미아빠 반미엄마가 반미어린이들을 이끌고 나왔고 반미커플과 반미어르신들, 반미스님들과 반미수녀님들도 보였다. 시청앞에서 양초를 샀다. 윤도현의 공연은 끝난 모양이었고 어두워가는 겨울저녁에 촛불들이 빛나고 있었다.
멀리서도 의혈의 깃발이 보였다- 대학교 때 가두집회 나가면 우리학교는 왜 그렇게 깃발 간수를 못하는지, 통 눈에 안 보여서 <의혈> 깃발을 따라다녔었다. 붉은 테두리 안에 검은 테두리, 그 안에 <의혈 중앙>이라 쓰여 있었는데 이걸 따라다니면 어떻게든 우리 학교 학생들을 찾아갈 수 있었다. 범대위의 집회 진행자를 따라 <미선이를 살려내라> <효순이를 살려내라> 외치는데 눈물이 나왔다. 양손으로 아이들을 안고 끌고 나온 엄마아빠들, 어린 아이들 손에서 빛나는 촛불들. 오랜만에 부르는 광야에서, 솔아솔아 푸르른솔아, 아침이슬. 
무교동 샛길로 광화문 진출. 세종로 큰길이 촛불로 가득찼다.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 앞쪽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전경버스들을 사슬처럼 엮어놨는데 전경버스 지붕에서 시위대와 경찰이 맞서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대학 친구가 광화문에 나왔다고 했는데, 전경버스 한대를 사이에 두고 만나지를 못했다. 

어떤 자의 권유로 민주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했다가 아무래도 아니지 싶어서(여기서 <아니지>라고 한 것에는 주.객관적인 여러가지 이유들이 포함된다) 탈퇴했었다. 결국 한달에 2만원씩 <목적의식없는> 당원비만 몇달간 낸 꼴이 됐는데, 대선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도 누구를 찍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이날 촛불시위 현장에서 나는 마음을 99% 굳혔다. 나는 노무현 후보가 심지있는 인물이다 싶어 마음 속으로 지지를 해왔는데 최근 반미 바람이 부니까 색깔론 덤터기쓸까 두려워 오히려 조심스러워 한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살얼음판 걷듯 신중할 수 밖에 없는 그 정치인의 입장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슨무슨 론이니 무슨무슨 설이니 혹은 보수언론들의 공격이니 하는 것 속에서도 지켜낼 수 있어야 진짜 소신이 아닌가. 굳이 정치적인 노선 구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촛불시위 현장에서 노무현 후보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권영길 후보측 유세차량은 대열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나는 권영길 후보를 찍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택시에서 들으니 교통방송 진행자가 "거리를 메운 촛불이 꼭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보인다"고 했다. 월드컵 때처럼 기쁨에 겨운 인파였더라면, 진짜 축복처럼 아름다운 촛불들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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