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딸기21 2005. 1. 8.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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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스라엘의 발명 The Invention of Ancient Israel (1996)
키스 W.휘틀럼 (지은이) | 김문호 (옮긴이) | 이산 | 2003-08-28

최근 몇 년 동안 되는대로 집히는대로 읽어왔던 것은 중동/이슬람/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관한 책들이었다. 왜 책을 읽는가? 잠시 우문(愚問)을 던져보면, '보기' 위해서다. 그냥 남이 보여주는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고, 간단하게만 대답해주자. 


바로 보는 것, 제대로 보는 것은 '가려진 것'들까지도 보는 것, '권력의 담론'에 머무르지 않고 '배제된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책을 읽을 때마다 절절이 깨닫게 되는 사실이 있다. 제대로 보려면 많이, 구체적으로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만 해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사실들을 많이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할 것은 너무 많은데, 그 많은 것들이 또한 권력의 담론에 의해 가려져 있으니. 그래서 알기가 힘들고 보기가 힘들다. 

아무리 '비판적'인 책들을 읽는다 해도 눈을 가리고 있는 장벽은 두텁디 두텁다. 두터운 장벽을 조금이나마 뚫어보려고 책을 읽는다. 한 권을 읽고, 이제 1cm 쯤은 뚫렸겠거니 생각하고 또 한권을 펼치면 여전히 높고 두터운 장벽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느낀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어려운 작업인가. 리뷰를 쓰기 앞서 이런 독백 아닌 독백을 늘어놓게 만든 이 책. 책을 읽으면서 제대로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절감하면서 잠시 좌절. 착한 독자를 이렇게 좌절하게 만든 이 책은 참으로 나쁜 책이다! 한번 욕해주고 싶지만 대단히 훌륭한 책이다. 

책은 '침묵당한 팔레스타인 역사'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묵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소개한 책은 아니다. 이 책은 이른바 '성서고고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연구들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고대 이스라엘'에 대한 환상의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함의를 파헤친다.

역사연구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 역사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특정 텍스트를 '선택'해 연구하고 '편파적'으로 해석하는 학문이라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역사학은 편파적인 학문이다'라는 것이 저자의 기본 전제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아니며, 팔레스타인의 역사라는 프로젝트가 성서연구의 담론에 의해서 어떻게 방해받아 왔는가에 대한 논평이다." (23쪽) 책은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고고학적 증거'들로 뒷받침하는데에 혈안이 되어온 성서고고학의 '편파적 텍스트'들에 맞서 쓰여졌으며, 따라서 이 책 또한 '편파적인 텍스트'라고 저자는 미리 선언을 해놓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저자가 '환상'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성서고고학의 기본 가정은 어떤 것인가.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 선진 문명을 가진 유대민족이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유대민족의 위대한 선조 다윗은 타락한 다신교 신앙에 물들어있던 가나안 부족들을 정복하고 유일신교를 믿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그 땅에 살고 있던 부족들은 열등한 문화 밖에는 갖고 있지 못했으며, 선진 문명을 건설할 능력이 없었다."

조야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이같은 '가정'은 '추론'을 넘어서 고고학자들의 대전제가 되었고, 고고학적 연구는 대전제의 '증거'들을 찾는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지워졌다. '팔레스타인'은 어떤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일지언정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름은 아니었다. 이 연구를 진행해온 사람들은 철저하게 팔레스타인의 고대사를 지우고 '고대 이스라엘'이라는 상상의 산물을사실(史實)'로 만들어버렸다. 

팔레스타인 역사를 '지우는' 행위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는 명백하다. 첫째 현대 이스라엘을 위해서, 둘째 기독교 경전에 바탕을 두고 근대 민족국가의 '기원'을 찾고자 했던 서구를 위해서였다. 성서고고학자들의 연구에서 시오니스트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대사를 지우는 행위는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저자는 우선 '시간과 공간의 명명법의 선택'이 하나의 방법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청동기 후기-철기시대 초기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가나안 시대' '정착과 판관의 시대' '유대 제국 시대' 등으로 이름 붙이는 것이 '시간의 명명법'에 해당된다면, '공간의 명명법'은 지금 이스라엘이 무력점령하고 있는 골란고원과 웨스트뱅크 등지에 가나안 사마리아 식으로 '성서의 지명'을 붙이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름붙이기, 즉 '이스라엘'이라는 꼬리표 붙이기에 이어 성서고고학자들은 '진화론적' 시간을 도입하는 방법을 함께 동원한다. 가나안 땅에 유대인이 '정착'하고 '정복'했던 것에 대해 도덕적, 진화론적, 서구적 개념을 적용하는 것. 여러말 할 것 없이, 서양이 '대항해의 시대' 이후 '야만인의 세상'을 문명화시켰다는 논리와 그대로 일치한다. 

또 하나의 방법은 '문자 텍스트(성서)에 의존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진정한 역사'는 오직 문자로 기록된 자료를 토대로 해야만 쓸수 있다는 성서연구의 공통된 가정 아래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료들이 없기 때문에 '선사'는 역사와 똑같은 비중을 갖지 못하고, 아무튼 사실이 아니며, 그래서 결국 이 시기들에 살았던 민족들은 침묵당하게 된다. 이것은 국민국가의 맥락에서 발전한 19세기 서양 역사서술의 원칙이다. 이제 그 원칙은 우리가 '진짜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오직 이스라엘 국가(국민국가)와 함께 할 때뿐이라는 사실에 의해 이스라엘 역사의 구성 속에서 더욱 강화된다." (189쪽) 그리고 '성서'는 팔레스타인땅의 과거를 서술한 '객관적인 역사책'으로 격상된다.

저자는 민족국가/문자텍스트만을 선별적으로 채택해온 성서고고학의 연구결과들이 어떤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는지, 바로 그 연구서들을 뒤져가며 설명한다. 성서학자들은 '우월한' 유대민족이 '열등한' 원주민들을 정복한 것은 정당한 행위였으며 심지어 '신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종주의를 극명하게 드러내보인다. 심지어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성서고고학계의 이런 경향은 사라지기는커녕 강화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오늘날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유대인을 나치와 동일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한 성서고고학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권리가 '정복의 권리'에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제국주의의 논리를 반복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서고고학은 이스라엘은 '특별한' 나라였다는 선민사상을 여과없이 수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특별한 위상 때문에 팔레스타인 정복은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복은 사실상 신의 계획의 일부"가 된다. 이는 곧 기독교 근본주의다.

책의 3장(고대 이스라엘 발명하기)과 4장(이스라엘 국가의 창조)은 1970년대까지 성서고고학을 주도했던 독일과 미국 주요 연구자들의 연구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5장에서는 1980년대 이후, 성서고고학에 대한 반발로 '수정주의' 해석들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의 연구들을 소개하고 비평한다. 

요약하자면 성서고고학은 이스라엘이 고대부터 '국민국가'의 원형을 갖고 있었다는 허구적 가설 위에 지어진 집이라는 것, 다윗과 솔로몬이 '대제국'을 건설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는 것, 성서고고학의 기본 가정들은 '다윗왕의 황금시대'와 같은 개인숭배적 요소들로 인해 더욱 강화됐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핀컬스타인 류의 수정주의적 해석들 또한 성서고고학의 바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현대 이스라엘'이라는 지배요인에 압도당한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침묵을 강요당한 팔레스타인의 역사'는 어떻게 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쉽게도 책은 '앞으로의 연구'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작업이 갖고 있는 의미는 크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역사를 말살하는 행위가 구체적으로 학문의 틀 안에서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갈파해내는 것, 현재와의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대이건 현대이건, 이스라엘-유대민족의 우월함과 팔레스타인-아랍인의 열등함을 강조하는 것은 공통의 전제다. 또 고대 이스라엘의 '제국' 건설과 '정복'에 '침략적 자기방어'라는 우스꽝스런 이름을 붙이는 것은 현재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 골란고원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고 있는 짓들과 완전히 똑같다. 고대 이스라엘의 이주-정복 모델은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과정과 일치한다. 이스라엘을 '민주주의 국가'로 묘사하면서 토착민들의 사회(페르시아/아랍)에 전제정치의 꼬리표를 붙이는 것도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역사적 모델'을 만드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현재가 과거를 만들고, 정치가 역사학을 만드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역사 지우기'가 팔레스타인 땅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국민국가'를 기본틀로 역사를 해석하는(빼앗는) 행위는 '국가'를 만들지 못한 많은 사람들을 역사 속에서 사상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팔레스타인의 비유대계 거주민들, '신대륙'이라는 이름 아래 역사를 빼앗겨 버린 아메리카의 원주민들, 국가를 만들려 한다는 이유로 터키 정부에 의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있는 쿠르드족, 티벳 등 목록은 계속 길어질 수 있다. 이들 모두를 위해서도 '편파적 텍스트'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