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아자니아의 검은 거인' 반투 스티브 비코- 과거를 잊고 책읽을 자유를 달라

딸기21 2005. 1. 7.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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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니아의 검은 거인, 반투 스티브 비코 (원제 The Revised Edition Biko)
도널드 우즈 (지은이) | 최호정 (옮긴이) | 그린비 | 2003-10-30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읽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꼭 한번씩 묻게 된다. '우리에게 그런 위대한 인물이 있는가?' 여기서 '우리'는 물론 한국민, 한국인이다.   



간디 평전을 읽을 때 나는 인도인이 간디를 생각하듯 그렇게 한국인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덩샤오핑의 평전을 읽을 때에는 (정치적 공과에 대한 여러가지 평가가 있겠지만) 우리에게 그런 정치인이 있었던가를 물었고, 만델라에 대한 글을 읽을 때에는 우리에게 만델라 같은 투사가 있는지, 있었던지를 물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묻게 된다. 우리에게 반투 스티브 비코 같은 사람이 있었던가? 물론, 있다. 있었을 것이다. 비코 같은 인물이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서류 캐비닛 속에 있을 수도 있고, 잊고 지낸 어느 시인의 시집에 있을 수도 있다. 


책은 남아공의 흑백차별 철폐를 위해 싸웠던 반투 스티브 비코라는 흑인 투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평전'이라 보기엔 범위가 좀 넓다. 남아공의 역사와 반(反) 아파르트헤이트 투쟁의 역사로 시작해 비코라는 인물에 대한 소개, 비코의 투쟁노선, 기고문, 대화록, 숨지기까지의 과정과 숨진 이후의 재판 기록 등등을 충실히 싣고 있다. 따라서 비코의 일대기를 연대기적으로 서술한 위인전은 아니다.

책은 몇가지 서로 다른 축으로 엮여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비코라는 인물 개인에 대한 것이다. 둘째, 남아공의 이른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철저하고 광범위한 것이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에 맞선 투쟁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번째는, 이 책을 쓴 도널드 우즈라는 백인 언론인과 흑인 투사 비코의 우정이다.

서문에서 밝혔듯 우즈는 비코와의 우정(백인정권의 눈에는 '백인의 배신'으로 비쳤던)으로 인해 그 자신도 보안관찰 처분을 받았고, 결국 외국으로 망명해서야 이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책에는 투사 비코의 인간됨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 정권 하에서 우즈와 같은 '백인 자유주의자'들이 겪어야만 했던 일들도 많이 나온다. 독극물을 묻힌 티셔츠를 배달받은 뒤 우즈의 아이가 티셔츠를 입고 괴로워했다는 잔혹한 에피소드 같은 것이 그 예다. 그러니 이 책은 단순히 '흑백 차별'이라는 말만 듣고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말 그대로 인간성을 말살하고 너나없이 올가미에 가두는(이 점에서만 흑-백의 평등이 가능했었을 것이다) 차별과 억압의 이야기들을 망라하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 남아공 인구에서 소수에 불과한 백인들이 투표권을 독점하고 있던 때에 아파르트헤이트정권은 정작 백인들의 지지조차도 온전히 받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 이른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정치권력을 유지/강화하기 위해 써먹었던 술수들에 대해서도 몇 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잘 모르고 있었던 남아공의 역사와 흑인들의 투쟁, 그리고 자유주의자들과의 관계 등등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은 내겐 큰 수확이다.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흑인들의 투쟁에서, 만델라라든가 비코의 사상을 좀더 상세하게 접하게 된 것도 소득이었다. 폭력투쟁이나 '포스트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구상 같은 것들이 아주 구체적이진 않지만 적어도 이미지로는 제시되어 있어 여러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책을 읽은지 며칠 되었지만 이 책의 리뷰를 올리기까지는 조금 '숨고르기'가 필요했다. '서평'이랍시고 몇마디 쓰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종류의 책이기 때문이다. 왜? 무엇 때문에,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 그것도 이미 30여년전의 이야기가 2005년에 책장을 뒤적이는 나를 숨막히게 만드는가. 

굴곡진 현대사를 가진 나라의 국민에게는, 남의 이야기를 그저 '남의 이야기'로만 읽을 자유가 없다. 스스로 '흑인됨'을 선언했던 이 사람의 이야기는 (다른 많은 책들처럼) 또다시 '우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의문사'의 이야기가 신문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지 않았던가. '멀쩡한 대학생이 탁하고 치니 억하고 쓰러졌던' 시절의 우리나라 법정에 비하면, 잔혹하기로 이름 높았던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남아공 판사들은 최소한 상식 수준의 법의식은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비코를 죽음으로 몰고간 감금과 구타와 고문 또한 많이 듣던 레퍼토리가 아니던가. 만델라가 28년간 감옥에 있었다지만 우리나라 비전향 장기수들 중엔 훨씬 넘어서는 기록을 갖고 있는 분들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우리가 겪어온 지난 세월은 대체 어떤 것이었나. 

물론 남아공 백인정권이 '상대적으로 덜 가혹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출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만델라가 집권한 뒤 남아공에서는 역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가 만들어져서 백인정권의 잔혹성을 파헤치는 작업을 했다. 외신 기사를 읽으면서, "'진실'만 밝히면 처벌 대신 '화해'를 시켜주는 위원회라니" 하며 다소 실망했던 기억도 난다. 

우리나라에서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을 했고, 명칭은 다르지만 '진실'과 '화해'를 내건 작업들이 시도됐었다. 그 결과는? 여전히 국가보안법은 살아있고, 친일파의 망령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아, 너무 많이 나갔다. 이래서 이 책의 서평은 아무래도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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