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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반지 Er redete mit dem Vieh, den Vogeln und den Fischen
콘라트 로렌츠 (지은이) | 김천혜 (옮긴이) | 사이언스북스 | 2000-07-05
말 그대로 '재미있는 동물이야기'이다. 저자가 콘라트 로렌츠이고 보면, 그닥 두껍잖은 책이지만 뭔가 알짜배기 내용을 기대하는 것이 독자로선 당연한 일.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심오한 철학이 있냐고? 이 책을 펼치는 독자라면, '비교행동학의 창시자' 혹은 '노벨상 수상자'라는 로렌츠의 경력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읽기를. 이 책은 로렌츠가 노벨상을 받기 훨씬 전에 쓰여진 것이다.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로렌츠의 모습은 '두리틀 선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도나우강 근처의 어느 유럽식 주택, 집안에는 개와 햄스터가 돌아다니고 지붕 처마밑에는 갈가마귀 무리, 서재에는 거위와 기러기가 들락거린다. 엉망진창인 집의 한구석에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과학자' 아저씨가 지저분하게 털이 뜯겨져나간 카페트를 밟고 서서 어항속 물고기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다--
이 정도면 책의 분위기가 전달되려나. 책은 로렌츠가 '집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면서 관찰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들로 구성돼 있다. 로렌츠는 친절한 동물가게 아저씨처럼 이 동물은 어떻고 저 동물은 어떻고, '집에서 기르려면 이런 애완동물을 골라라'는 충고까지 해주면서 다양한 동물친구들을 소개한다. 이런 로렌츠의 모습은 마법의 반지를 가지고 동물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솔로몬 왕보다는 수의사 두리틀 선생을 더 닮았다.
로렌츠의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상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책을 읽기전 내 눈에는 뭐랄까, 색안경 같은 것이 한꺼풀 씌워져 있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로렌츠의 '나치 부역' 경력이다. 이 책은 로렌츠가 알텐베르크라는라는 곳에 살 적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1937년 로렌츠는 실업자였다. 가톨릭성향의 빈 대학은 종교적인 이유로 동물본능에 대한 연구를 금지했다. 그는 자비로 새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알텐베르크로 내려갔다. 그리고 독일 정부에 연구비를 신청했다."
매트 리들리는 <본성과 양육>에서 '나치토피아'라는 제목으로 로렌츠의 나치 경력을 들춰내고 있다.
"1937년 로렌츠는 실업자였다. 가톨릭성향의 빈 대학은 종교적인 이유로 동물본능에 대한 연구를 금지했다. 그는 자비로 새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알텐베르크로 내려갔다. 그리고 독일 정부에 연구비를 신청했다."
매트 리들리는 <본성과 양육>에서 '나치토피아'라는 제목으로 로렌츠의 나치 경력을 들춰내고 있다.
"1938년 6월 오스트리아 합병 직후 로렌츠는 나치당에 가입해 인종차별 정책에 일조했다. 그는 즉시 동물행동에 관한 자신의 연구가 나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연설하고 글로 쓰기 시작했다. 1940년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후부터 1944년 러시아 전선에서 체포되기까지 몇년동안 그는 일관성 있게 과학적으로 입증된 인종정책', '국민과 민족에 대한 인종 개량',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들의 제거' 등의 유토피아적 이상을 주장했다." (<본성과 양육>에서 인용)
<솔로몬의 반지>에는 나치는 커녕, 정치적인 어떤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도 나와 있지 않다. 주위 사람들에게 미친사람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동물에 몰두한 어떤 학자와, 그의 동물친구들 얘기만 나와 있을 뿐이다. '학문은 학문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잖아?
책을 덮으면서 기분이 찝찝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이 재미난 에세이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믿어야할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로렌츠가 밝혀낸 개념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물의 '각인'이라는 것이다. 동물원의 공작이 하필 바다거북한테 필이 꽂혀 어긋난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실은 이 책에 나와 있는 것이다.
한데 리들리의 설명을 빌자면, 로렌츠는 자신을 엄마처럼 쫓아다닌(잘못된 '각인'의 실제 사례) 러시아 오리를 몹시 끔찍스러워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는 등장하는 '모든' 동물에 대한 로렌츠의 애정이 철철 넘쳐나고 있어서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어찌됐든 책은 굉장히 재미있다. 로렌츠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번역이 형편없지만, 전문과학자 겸 에세이스트로 활약했었다는 로렌츠의 이야기 솜씨는 대단하다. '닐스의 이상한 여행' 저리가라다(재밌게도 로렌츠는 이 동화를 책에서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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