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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딸기21 2004. 10. 1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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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Les Damne's de la Terre

프란츠 파농 (지은이) | 남경태 (옮긴이) | 그린비 | 2004-08-25




파농의 이 책을 읽고난 뒤의 느낌을 한마디로 말하면, '슬픔'이다. 식민지 출신의 정신과 의사, '식민지 엘리트'의 길을 걸을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에 맞서 싸웠던, 제3세계 민중들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진정한 투사, 상투적인 표현을 빌자면 '불꽃처럼 살다가 젊은 나이에 스러져간' 사람.

이 책은 파농이 죽기 불과 얼마전에 쓴 글들이고, 스스로 책의 제목을 정한, 유일한 저작이라고 한다.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이 문장에서 가장 먼저 내게 전달되어왔던 것은 슬픔이었다.

그는 투사였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의 글에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을 먼저 읽는다. 그의 눈에 비친 식민지의 비참한 현실, 경제적 정치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식민지인들의 모습, 그것들을 지켜보고 치료책을 내와야만 하는 의사 파농, 한창 싸워야 했을 시기에 병으로 쓰러져야만 했던 젊은 지식인의 고뇌,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전해져오는 듯한 기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파농을 읽는다고? 그래, 나는 아주 감상적으로 이 책을 읽었다. 지금은 2004년, 대부분의 '식민지'들은 해방됐다. 형식적으로 지구상에는 190여개의 독립국가가 존재한다. 식민지를 겪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은 지금도 피칠갑을 해대고 있지만 어쨌든 제국주의의 총독들은 제 나라로 돌아간지 오래다. 그러니 파농의 책을 이제 그만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하면서 다소 감상적으로 읽은들 어떠하리.

책에는 사르트르의 1961년판 서문과 알리스 셰르키의 2002년판 서문이 함께 실려있다. 알리스 셰르키는 "파농은 이 책에서 식민지의 폭력의 현실을 진단했다"고 말한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서문'이 자칫 30여년이 지난 지금 파농의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폭력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심을까 걱정하는 듯이.

파농이 책에서 식민지 민중들(주로 알제리와 아프리카)이 보여주는 폭력성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에서는 과거 알제리를 비롯해, 자국이 식민지로 삼았던 북아프리카인들을 '대뇌피질이 선천적으로 발달하지 못해 폭력성을 그대로 노출하는 야만인들'로 보는 '의학적 견해'가 판을 쳤던 모양이지만, 이 부분은 사실 내가 궁금해했던 것이기도 했다.

파농이 활동했던 알제리,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전쟁의 기록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실은 지금도 폭력이 기승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지역이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지금도 나타나는 폭력사태들을 놓고 '영국의 간접통치와 프랑스의 동화정책의 차이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말하면 우스운 소리가 되겠지만(영국령이었던 나라들 중에서도 유혈사태가 계속되는 곳은 많다) 1990년대 이후 알제리의 폭력은 외신을 통해 들려오는 유혈사태들 중에서도 특히 끔찍한 축에 속했다.

알제리는 이집트 사우디 예멘과 함께 이슬람 극단주의 폭력의 '온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80년대 아프간으로 건너간 무자헤딘(이슬람 전사)들의 상당수가 알제리안들이었고, 이들은 90년대에 본국으로 건너가 군사독재정권을 상대로 거센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다. 독재정권이나 극단주의자들이나, 행사하는 폭력의 잔인성은 막상막하다. 귀를 잘라내고 사람을 토막내는 식의 폭력들. 물론 '북아프리카인들은 잔인하다'는 식으로 일반화시킬 마음은 전혀 없다. 아프리카도 그렇고 아시아도 마찬가지다.

동남아시아 일대에서 대규모 폭력사태가 계속되는 나라들의 공통점이 분명히 있다. 식민통치를 가혹하게 겪은, 그리하여 원주민들의 저항이 거셌던 지역들은 두고두고 폭력의 악순환을 겪고 있으며 반대로 세력균형이든 무엇이든 외부적 내부적 이유로 해서 제국주의의 가장 잔인한 칼날을 피해갔던 나라들은 그럭저럭 잘들 꾸려나가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런 메커니즘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설득력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식민지 민중으로서는 폭력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폭력에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성격을 부여하게 된다. 폭력의 행사는 그들을 한 덩어리로 묶어주며, 각 개인은 폭력이라는 커다란 사슬의 고리들이 된다. 이 거대한 폭력의 유기체는 이주민(유럽인)이 처음에 행사한 폭력이 클수록 덩치가 커진다... 개인적 차원에서 폭력은 정화의 힘을 가진다. 폭력은 원주민에게서 열등감과 좌절, 무기력을 없애주고 용기와 자존심을 되찾게 해준다."

파농은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는 원론적인 설명을 좀더 구체화시켜, 식민지에서 폭력이 식민지 민중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 그리고 다시 태어난 개인들을 묶어주는 힘, 그들을 '민족'으로 서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폭력은 식민지의 독립전쟁과 이후의 건국과정이 식민주의에 물든 부르주아지들의 득세와 식민제국의 음모에 힘입어 왜곡되면서 또다른 폭력의 구조로 굳어진다. 종족-부족-종교집단 간 갈등, 옆나라에 대한 시기질투 등이 겹쳐지면서 식민지 민중들을 다시 태어나게 했던 폭력의 '순수성'은 폭력 그 자체로 남게 되고, 민족주의로부터 초(超)민족주의로, 쇼비니즘으로, 최종적으로는 인종주의로 옮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파농은 '독립 이후' 제3세계 국가들이 겪어야 했던 폭력사태들이 기본적으로 냉전 질서에 기인한 측면 또한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제3세계의 모든 소요사태, 모든 폭동은 냉전이 그려놓은 그림의 일부를 구성한다...식민지의 폭력과 지금(1950-60년대) 만연한 평화적 폭력 사이에는 일종의 공모적인 합의, 동질성이 있다.

파농의 시대는 가버린 것일까. 탈식민화가 화두였던 1960년대는 과거가 되었고, 21세기가 된 지금은 '민족'의 이름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인 일로 여겨진다. 심지어 '탈냉전'이란 말에서조차 과거의 냄새가 나는 요즘은. 그러나 9.11이 '탈냉전'의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인 것처럼, 지금 옛 식민지국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폭력의 악순환은 탈식민지, 탈냉전의 과정이 겹쳐지면서 나타난 것들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탈식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정의 이름이다. 라틴아메리카 독립영웅 볼리바르의 꿈이나 나세르의 '범 아랍주의 구상', 그리고 파농이 역설했던 '통일 아프리카'의 이상 같은 것들은 이 대륙들이 제각각 숱한 독립국가들로 찢어진지 반세기가 되어버린 지금은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렸다. 역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유물로 만들어버리는지!

얼마전 우연히도 알제리 사람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베르베르족의 얼굴을 한(전형적인 아랍인과 좀 다르지만 흑인과는 확연히 다른) 이 사람은 다국적 석유회사와 계약해 알제리 사막의 유전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자기 팔뚝을 보여주면서 "나는 흑인이 아니지만 분명히 아프리카 사람"이라면서 아프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알제리의 현재 정치상황에 대해서는, 부테플리카 대통령이 재선됐다는 것과, 폭력사태가 줄어들었다는 것만을 이야기했다.

어떨까. 파농이 진단했던 알제리의 '식민지 전쟁과 정신 질환'은 이제 치유가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우리가 겪어온 탈식민의 과정 또한 폭력과 왜곡으로 점철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고 보면, 그리고 우리가 겪어온 '대한민국 건설의 과정'이 파농이 아프리카에서 보았던 수준의 독립성조차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고 보면.

그래서 우리도 한국전쟁이니, 광주학살이니, 숱한 고문과 감금이니 하는 폭력의 역사를 걸어와야 했던 것일까. 파농의 책을 '감상적으로'만 읽는다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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