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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여인의 죽음

딸기21 2004. 10. 7.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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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여인의 죽음 The Death of Woman Wang

조너선 D. 스펜스 (지은이) | 이재정 (옮긴이) | 이산 | 2002-05-13



알라딘에서 '왕여인의 죽음'을 검색해보면 두 종류의 책이 나온다. 하나는 이화여대출판부에서 예전에 냈던 것이고, 또다른 하나는 이산에서 펴낸 이 책이다. 


내겐 '왕여인의 죽음'이라는 책이 두 권 있다. 전자와 후자 모두를 갖고 있는데, 사정이 좀 있었다. 처음에 이대출판부에서 나온 책을 샀는데-- 허거걱 번역도 엉망이고 책도 너무 구식이어서 읽을 기분이 안 들었다고나 할까. 그러던 차에 후자를 어찌어찌 구하게 됐다(그렇게 해서 이산의 제법 훌륭한 버전으로 책을 읽게 된 셈인데, 말 나온김에 번역 얘기하자면 이 책의 번역은 꽤 훌륭해서, 읽을 때에 술술 넘어갔다).

스펜스의 책은, 언제나 내겐 별 다섯개다. 이 책도 마찬가지.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동안 읽은 스펜스의 책들이 모두 까만별 다섯개짜리였는데 이 책에만 별표를 줄여버리면 (책이) 의리없다 할까봐 다섯개를 준다. 


스펜스의 저작들 중에서 이 책은 '소품'에 해당된다. 오랜시간 공들이고 공들여, 학문적 성과를 총동원해 쓴 책은 솔직히 아니다. 분량이 적은만큼 빨리 술술 읽힌다. 책의 배경은 산둥성 탄청현, '명소도 없고 영웅도 나지 않은' 평범한 고장, 그러나 평범하다 하기엔 너무 못살고, 지지리 고생많았던 곳. 때는 명말 청초, 정권교체기답게 수탈과 혼란과 민중의 간난고초가 극에 달했던 시기. 저자는 탄청현의 공식 기록인 '탄청현지'와, 지역 벼슬아치가 남긴 기록, 그리고 푸쑹링의 '요재지이'라는 세 가지 자료를 기본으로 해서 17세기 탄청 사람들의 고생스런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요재지이'라고라고라... 이렇게 요상스런 소설을 '사료' 마냥 버젓이 제시해놓은 데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삼백년전 탄청 사람들의 꿈과 판타지까지 역사의 일부로 포괄하고 있다는 것만 얘기해두자. 

별다섯개의 두번째 이유. 역사를 '힘센 자들의 기록' 혹은 '영웅의 이야기'로 보는 서술방식을 줄곧 거부해온 스펜스답게, 이 책의 주인공도 그저 '보통사람들'이다. 책에 나온 인물들 중에는 순악당 무뢰한도 있고 현명한 과부도 있고 무능한 지식인도 있지만, 그래봤자 뽀다구 안 나는 사람들이다. 다른 역사책 같았으면 결코 등장하지 못했을 사람들.

세번째, 두번째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왜 하필 왕여인인가. 다른 사내와 바람나 남편 버리고 도망갔다가, 결국 되돌아와 남편에게 살해당한 왕여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 여인은, 타이틀롤임에도 불구하고 뒷부분에만 등장할 뿐이다. 그녀의 죽음이 특별히 의미가 있는가? 혹은 유독 비참한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라고 왕여인이 없었을까.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혹은 지금도 60억인구의 절반 중에는 수많은 왕여인이 있다. 그리하여 별 다섯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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