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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 할아버지는 어떤 분일까

딸기21 2013. 12. 6. 10:01

넬슨 롤리흘라흘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넬슨 롤리흘라흘라 만델라(Nelson Rolihlahla Mandela). 미국인들에게 50년 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고 외쳤던 마틴 루터 킹이 있었다면, 만델라는 그 꿈을 실현시킨 ‘세계인의 마틴 루터 킹’이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들뿐 아니라 백인과 유색인종 모두에게 칭송받는 진정한 영웅이었다. 

모든 영웅에게는 적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에게는 적은 없었다. 그는 대의를 위해 적들도 끌어안을 수 있음을, 그리하여 적 또한 벗으로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남아공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F.W. 데 클레르크가 만델라가 출감한 뒤 1994년 흑인정권을 출범시키자 스스로 부통령으로 내려앉아 만델라를 도왔던 것이 바로 그런 예였다. 

남아공 흑인들은 물론 백인들도 만델라의 지도력과 통합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존경했다. 그는 20세기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평등의 투사이자 화합의 정치가, 분쟁의 중재자로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만델라가 5일 타계하자 세계가 애도하고 있다.

# 학창 시절, 동지들과의 만남

만델라는 1918년 이스턴케이프주 트란스케이 지역의 쿠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트란스케이는 남아공의 주요 부족 중 하나인 코사족의 자치지역 중 하나로, 백인 분리주의 정권 시절에 백인들이 만든 코사족 ‘괴뢰정권’이 세워졌던 곳이기도 하다. 만델라는 이 곳에서 코사족의 한 갈래인 템부족 부족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가들라(Gadla Henry Mphakanyiswa)는 템부족 대부족장인 다비드 달린드예보에게 정치적 조언을 해주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만델라는 헤알트타운의 기독교 감리교계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포트헤어(Fort Hare) 대학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인 올리버 탐보(Oliver Tambo)를 만난다. 대학 생활 첫 해가 끝나갈 무렵 만델라는 학교측의 인종분리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회 싸움을 이끌다가 퇴학당한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 때의 만델라


만델라는 대학에서 쫓겨난 뒤 “고향으로 돌아와 템부족 부족장 후계자인 저스티스(Justice)를 보좌하라”는 집안의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오히려 저스티스와 함께 대도시인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쳐 인근 광산에 감독관으로 취직한다. 하지만 부족의 명을 어긴 도망자 신분임이 알려져 해고당하고 요하네스버그의 한 변호사 사무실에 다시 일자리를 얻었다. 이 곳에서 만난 변호사 월터 시술루는 만델라는 정치적 후원자이자 평생의 동료가 된다. 

시술루의 보살핌 속에 만델라는 남아공대학을 졸업하고 비트바테어스란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 변호사가 된다. 법대 친구들 중에는 인종차별 철폐 투쟁을 함께 한 조 슬로보, 해리 슈바르츠, 루스 피어스트 등이 있다. 

#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통해 정치에 뛰어들다

48년 남아공 총선에서는 아프리카너(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주도하는 인종차별주의 정당인 국민당이 승리한다. 남아공은 네덜란드·영국의 전쟁무대가 되기도 했던 백인 식민지였지만 남아공에서 극악한 ‘흑백 분리’가 시작된 것은 이 총선 이후였다. 만델라가 정치에 본격 뛰어든 것도 이 선거가 계기가 됐다. 

만델라는 1952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불복종 운동’을 주도하면서 흑인 운동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이어 1955년에는 인종차별 철폐투쟁의 이념적 기반이 된 ‘자유헌장’을 만들어 발표한다. 동시에 만델라는 변호사 선배인 탐보와 함께 ‘만델라&탐보’라는 법률회사를 만들어 저소득층 흑인들을 위한 법률구조활동을 펼쳐 신망을 쌓는다.

1964년 미국 뉴욕에서 벌어진 리보니아 재판 반대 시위.


이 시기 만델라의 ‘불복종 운동’과 정치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비폭력투쟁의 선구자였던 마하트마 간디였다. 당시 남아공에는 큰 규모의 인도계 공동체가 형성돼 있어서, 만델라는 간디의 사상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다. 만델라는 2007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사티야그라하 100주년 기념축제에 노구를 이끌고 직접 참석해 간디를 기리기도 했다.
 
비폭력 운동을 근간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만델라는 1956년 동료 150여명과 함께 체포돼 위증죄로 기소된다. 이 때부터 1961년까지 5년간 기나긴 ‘위증 재판(Treason Trial)’이 이어졌다. 기소된 이들은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으나, 1950년대 후반은 ANC에는 정치적 기로에 선 시기였다. 

당의 주도권은 총재인 앨버트 리툴리와 올리버 탐보, 월터 시술루가 맡고 있었는데 이들의 ‘온건’ 노선에 젊은 당원들이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컬러드(아시아계 유색인종)와 인도계, 공산당을 비롯한 백인 좌파 정당들과의 연대에도 균열이 왔고, 가나 등으로부터의 지원도 끊어졌다. 이런 위기를 맞아 당의 일신을 위해 새 지도자가 된 인물이 만델라였다.


젊은 시절의 만델라
 
만델라는 이 때가 되면 꽤 급진적이 되어, 무장투쟁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61년 그는 ANC의 무장분과인 ‘움콘토 웨 시즈웨(Umkhonto we Sizwe·약칭 MK·국가의 창)’을 창설하고 사보타주 계획을 세운다. MK는 실제 만델라가 옥중에 있던 1980년대에 백인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기도 했다.

백인정권을 이를 부각시키며 만델라를 한때 폭력주의자로 몰아붙였지만, 그의 투쟁의 기본은 대체로 비폭력 정치투쟁에 맞춰져 있었다는데 이견이 없다. 그는 훗날 집권 뒤 ANC의 투쟁과정에서 당 내에서조차 인권침해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진상규명을 지시하기도 했다.

# 감옥에서 보낸 28년

1962년 만델라는 다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는데,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백인정권에 정보를 주어 그의 체포를 도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죄목은 그 전 해의 불법파업을 주도한 것이었다. 만델라에 이어 1963년7월 요하네스버그 북쪽 리보니아의 릴리스리프 농장에서 ANC 지도부들도 대거 붙잡힌다. 이른바 ‘리보니아 재판’으로 알려져 있는 기나긴 ANC 법정투쟁의 시작이었다. 
 
“ANC의 싸움은 진실로 민족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과 경험에서 우러나온 아프리카 동포들의 투쟁입니다. 그것은 살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한 투쟁입니다. 나는 평생을 이 투쟁에 바쳐왔습니다. 나는 백인 지배에 맞서 싸워왔고, 흑인 지배에 맞서 싸워왔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를 부여받아 함께 조화롭게 사는 자유민주사회의 이상을 소중히 여겨왔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목적이자 이상입니다. 필요하다면 기꺼이 나의 목숨을 바칠 이상이기도 합니다.” 
 
1964년 프레토리아의 대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만델라는 유명한 모두발언을 통해 자신의 투쟁노선과 인종평등의 사상,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꿈을 밝힌다.

재판 결과는 유죄였다. 만델라는 1990년이 될 때까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그가 주로 있었던 곳은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이 된 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섬의 감옥이었다. 이 곳에서의 17년을 비롯해 만델라는 28년을 닫힌 창살 안에서 보냈다. 옥중에서 그는 공부를 하고, ANC의 동지들과 미래를 향한 토론을 하고, 젊은 흑인들을 가르치고, 무지한 백인들조차 교화시켰다. 



로벤섬의 감옥과, 만델라가 수감됐던 감방
  
그는 뒷날 옥중에서 취미로 삼았던 화초 재배에 대한 책을 썼다. 만델라는 또 수감 중 영국 런던대학 해외프로그램을 통해 법학 학사학위를 받았으며 1981년에는 학생들의 지지 속에 상징적인 학생회장 후보가 되기도 했다. 

만델라의 명성은 세계에 알려졌고, ‘프리 넬슨 만델라(Free Nelson Mandela!·만델라를 석방하라)’ 캠페인이 펼쳐졌다. 백인정권을 도왔던 유럽국들은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미국마저 입장을 바꿔 경제제재를 가하기 시작하자 국민당 정권은 궁지에 몰렸다.

# 대통령 만델라

1990년2월, 데 클레르크 대통령은 옥중의 만델라와 협상을 벌인 뒤 ANC를 비롯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단체들을 합법화한다. 2월11일 만델라는 로벤섬에서 나와 잠시 머물던 파알 지방의 빅토르 베어스터 교도소에서 나왔다. ‘역사적인 석방’ 장면은 전세계에 생중계됐다. 

다시 세상 앞에 선 만델라는 석방되자마자 국민들을 향해 “ANC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소수 세력인 백인들과의 평화·화해를 비롯한 인종평등 투쟁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했다. 

1990~94년은 다소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백인 아프리카너 강경우파들은 반발했고, 만델라와 ANC의 투쟁을 물밑 지원했던 많은 백인들은 기쁨 속에서도 정치적 동요를 숨죽이며 지켜봤다. 갑자기 기세를 펴게 된 흑인들 사이에서는 갈등과 다툼이 빚어졌다. 특히 ANC의 주축이면서도 흑인 중에서는 소수파인 코사족과, 흑인 주류를 차지하는 줄루족 간 충돌이 일어났다. 망고수투 부텔레지가 이끄는 줄루 정당 잉카타자유당과 ANC 사이의 유혈분쟁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2008년의 넬슨 만델라.
 


혼란의 와중에 만델라는 데 클레르크와 함께 199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치러진 총선에서 ANC는 62%의 표를 얻어 제1당이 됐다. 흑백 타협으로 만들어진 새 헌법은 의회가 대통령을 뽑도록 규정했으며 만델라는 모두의 기대 속에 집권했다. 혼란 그 자체의 나라를 이어받은 만델라는 인종차별을 없애는 동시에 흑-백 갈등과 흑-흑 갈등을 해소해야 했다. 그러면서 백인정권의 인권탄압을 조사하는 과거사 규명까지 해야 했다.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만들어, 오랜 투쟁 동지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먼드 투투 주교에게 맡겼다. 시행착오와 비판도 많았지만 TRC는 훗날 다른 나라들에서도 과거사 진상규명의 모델이 됐다.
 
만델라는 남아공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백인들을 갑작스레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의 지식과 기술과 관료체계와 자본을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급진적인 흑인들 사이에선 볼멘 소리가 나왔지만 만델라는 백인들과의 공존 노선을 밀고 나갔다. 

자칫 대규모 유혈사태나 심지어 내전으로까지 갈 수도 있었던 혁명적인 시기를 비교적 안정되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만델라의 굳은 의지와 지도력 덕분이었다고 남아공인들은 입을 모은다. 만델라의 남아공은 다인종·다민족이 공존하는 ‘무지개 국가’를 슬로건으로 삼았다.

# 은퇴, 그리고 에이즈와의 싸움

만델라는 1994년 대통령에 취임할 때 이미 77세의 고령이었다. 4년의 재임 뒤 대통령직은 데클레르크에 이어 만델라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타보 음베키에게 넘어갔다. 음베키는 만델라의 투쟁 동지로 감옥에서 숨진 고반 음베키의 아들이었다. 

만델라는 어려운 시기 국가를 연착륙시켰지만 남아공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민주주의가 궤도에 올라서는 듯 보였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처지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에이즈였다. 에이즈가 전국에 급속히 퍼져, 노동가능 인구의 4분의1 이상이 에이즈로 숨지는 상황이 됐다. 부모를 잃은 ‘에이즈 고아’들이 넘쳐났다. 에이즈는 남아공의 경제를 갉아먹고 성장 잠재력을 잠식했다.

만델라는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로, 에이즈와의 싸움을 선언했다. 구호재단을 만들어 에이즈 고아들을 돕고, 자신의 명망을 활용한 이벤트들로 기금을 모아 에이즈 예방운동을 전개했다.


요하네스버그 시내 샌튼의 '넬슨만델라 광장'에 서 있는 6m 높이의 만델라 동상
 

동시에 만델라는 이라크 전쟁 반대, 아프리카 분쟁 조정 등의 활동을 하며 명실상부 ‘국제사회의 원로’ 역할을 했다. 89세 생일이던 2007년 7월18일에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가택 연금중인 아웅산 수치 버마 민주화 지도자,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 방글라데시 그라민은행 무하마드 유누스 총재 등을 ‘회원’으로 하는 ‘디 엘더스(The Elders·원로들)’이라는 모임이 만들어져 만델라의 뜻을 잇기로 결의했다.
 
만델라의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은 머지 않아 끝날 것이다. 어쩌면 만델라 이후의 남아공은 화합의 구심을 잃고 정정불안에 휩싸일 수도 있다. 에이즈, 종족간의 갈등, 경제위기 등 남아공의 문제점들은 여전하다. 그의 이상은 완전히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완전한 인종 평등과 민주주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만델라의 꿈은 뒤에 남은 세대들에게도 언제나 영감의 원천이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