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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아주 간략한 소개

딸기21 2011. 3. 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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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아프리카 대륙에서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대회가 열렸다. 게다가 2010년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이 우르르 서방 식민제국으로부터 독립했던 1960년 ‘아프리카 독립의 봄’ 이후 반세기가 되는 해였다. ‘아프리카의 내일을 가다’라는 주제로 현지 몇몇 나라들을 돌며 취재를 마친 뒤 귀국해 기사를 썼다. 시리즈 기사의 맨 마지막회는 ‘우리 안의 아프리카’ 편이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의 일명 ‘아프리카 골목’을 다니며 그곳 풍경을 스케치하면서, 아프리카출신 이주자들이 보이는 적대감과 공포심에 짐짓 놀랐다. 그들 거의 모두가 불법체류자 신분이니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한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일부 ‘영어교사’를 제외하고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취업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에 있는 1만명도 채 안되는(그나마 이 수치조차 확실한 것도 아니다) 아프리카인들의 대다수는 불법체류자일 터다. 

 

하지만 더욱 놀랐던 것은, 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었다. 네이버니 다음이니 하는 포털사이트에서 ‘우리 안의 아프리카’ 기사에는 욕설에 가까운 질타와 비난의 댓글들이 수백개씩 줄을 이었다. 댓글들의 내용은 극도로 단순했다. “우리 일자리 빼앗아가는 자들(검둥이들) 편을 들어주느냐”, “아프리카에서 온 자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기자는 이태원에 한번도 가본 적도 없느냐, 아프리카인들 무서워서 한국인들은 드나들지도 못한다”는 이메일까지 받았다. 나는 이태원 바로 옆동네에서 살고 있어, 거의 주말마다 이태원에 들르거나 지나친다. 내가 모르는 무시무시한 패싸움과 폭력사태가 그 곳에서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보다 더 궁금했던 것이 몇 가지 있었다.

 

19세기 유럽을 풍미했던 삽화의 하나.

첫째, 많은 한국인들이 백인과 비백인 외국인을 대하는 자세가 다르다는 것은 아마도 대부분 인정하리라. 일제를 패망하게 만들고 한국을 ‘해방시켜준’ 미국에 대한 환상을 이해한다고 치자. ‘역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할 여지가 있었다는 것, 백인에 대한 긍정적인 느낌이 주입되고 나니 비백인을 볼 때에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 이것이 현실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아시아 출신 이주노동자들’과 ‘아프리카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보는 우리의 시각에도 차이가 있을까? 피부색의 짙고 옅음에 따라 차별적인 마인드도 강약을 띠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기자의 글이 공교롭게도 아시아가 아니라 아프리카 출신 이주자들에 대한 것이었을 뿐, 아시아 이주노동자들의 인권을 옹호한 글이었더라도 같은 종류의 댓글이 줄줄이 붙었을까? 대답은 알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그 몇달 전 한국의 당시 국방장관이 “아프리카는 무식한 흑인들이 뛰어노는 곳”이라는 발언을 해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다. 각료의 발언이 이 정도였음에야.

두번째, 아이를 키우다 보면 ‘내 아이에게는 환경결정론, 남에게는 유전자결정론’을 주장하는 부모들을 종종 보게 된다. 내 아이에게는 돈과 에너지를 투자해 무엇이든 가르치면 능력을 키워줄 수 있다고 믿는다. 언어학자 스티븐 핑커가 말하는 <빈 서판> 개념이다. 인간은 빈 서판과 같아서, 거기에 ‘후천적으로’ 쓰여지는 내용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외국인에 대해서는 ‘유전자결정론’을 주장하곤 한다. “유대인은 머리가 좋대.” “아프리카인들은 천성이 게을러”와 같은 말들이 어느 새 입에서 흘러나올 때가 있지 않은가. 유대인들은 머리가 좋고 자기 나라를 사랑하는데 아랍인들은 게으르고 싹수가 없어 중동전쟁이 일어나자 모두 도망쳤다? 내가 학교다닐 때에 선생님들이 해준, 지금 생각해보면 얼토당토 않을 뿐더러 정치적으로도 몹시 잘못된 이야기다. 이런 면에서 보면 개신교와 친미·친이스라엘주의의 영향력이 막강한 한국은 역으로 ‘프로(Pro)세미티즘(친유대주의)’이 퍼져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이렇게 ‘무슨무슨인(人)’‘어느어느 민족’‘어디어디 사람들’의 정치사회적 차이를 넘어 ‘태생적 차이’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유전형질의 무언가를 고정시켜 말하게 되는 셈이다.



세번째, 이런 것들을 가리켜 우리 안에도 인종주의가 은연중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세상 어느 나라에나 다 있는 정도의, 이방인에 대한 낯섦과 우리끼리 뭉치려는 당연한 속성이 새어나온 것에 불과할 뿐인가? “유대인은 머리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까지 인종주의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까? “흑인은 머리가 나빠”라고 미국에서 누군가가 얘기했다면 그 나라에서는 인종주의적 발언으로 분명히 손가락질 받았겠지만 말이다.

인종주의의 문제는 참 어렵다. ‘단일민족’을 내세워 순혈주의를 자랑삼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한국은 다문화 사회에 대한 고민이 미처 무르익지도 못한 채 이런 문제들을 고민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아니, 비단 외국인 이주노동자나 ‘베트남 신부’들이 우리 사회에 많아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글로벌화된 시대에 지구촌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종 혹은 인종주의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질 기회는 아직 많지 않다. 어쩌면 진작에 고민했어야 하는 문제인데, 모르고 살아왔다는 생각도 든다.

 

인종은 무엇이고 인종주의는 무엇인가. 알리 라탄시의 책 <인종주의는 본성인가 RACISM -A Very Short Introduction>은 제목 그대로 인종 그리고 인종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주는 소개서다.

저자의 주장을 요약하면 ‘인종이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는 허구일 뿐’이며, ‘이 허구적인 인종이 실제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하고 특정 집단에 특정 인종의 틀을 씌워 차별하는 것이 인종주의’다. 

인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한국의 독자들에겐 오히려 생소할 수도 있겠다. 겉보기에 분명 피부색이 흰 사람들, 덜 흰 사람들, 검은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그렇지만 둥근 지구를 걸어서 한바퀴 돌다 보면 흰 사람과 검은 사람 뿐 아니라 흰색과 검정 사이, 수많은 ‘중간단계’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생물학자들은 이를 ‘유전적 경사(기울기)’라 부른다. 완만한 내리막길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딱 잘라 ‘언덕’이라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그 수많은 중간단계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특정 피부색으로 잘라서 구분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욱이 피부색이라는 것은, 인간의 유전자가 발현되는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표현형질 중의 하나일 뿐이다. 피부색으로 집단을 구분할 경우, 그 집단에 ‘인종’ 아닌 무어라 다른 이름을 붙인들, 의미있다 할만한 집단간 차이점이나 집단끼리의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피부색의 차이는 존재할지 몰라도, 혹은 지리적·역사적 과정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단계와 생활습관을 가진 집단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를 태생적으로 (지적·문화적 습득 수준이) 다른 ‘인종집단’이라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핵심이다.


또 한 가지, 인종주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인종주의와 ‘타자에 대한 인식’을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게 만드는 측면이 그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검은 피부의 남부 아프리카계 주민들과 자신들의 외양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잘 알려진 대로 그리스인들은 헬레니즘 세계 밖의 이방인들을 ‘야만인(barbarian)’으로 규정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스페인을 통일한 아라곤-이사벨라 왕가가 유대인들을 박해하고 내쫓았다. 저자는 서양 세계를 중심으로 설명했지만, 중국은 중화사상을 갖고 있었고 우리 역시 북방의 이민족을 ‘오랑캐’라 불렀다.

그래서 인종주의를 옹호하려는 이들은 “우리 가족, 우리 집단을 편들고 다른 사람, 다른 집단에 등돌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 혹은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성질”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는 분명 ‘근대적인 현상’이다. 근대 서구에서 민족이라는 발상이 생겨나고 민족국가들이 형성된 것이 인종주의적 사고가 발전하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과학과 병리학, (계통)분류학,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모든 것들이 합쳐진 우생학이 생겨나면서 ‘우리 집단’과 ‘다른 집단’ 사이에 위계질서를 만들어 억압·착취하는 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게 됐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논점은 인종주의라는 것이 몹시도 ‘혼란스러운’ 개념이라는 것이다.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이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은 인종주의에 대해 뭔가 ‘명료한 규정’을 원하는 독자들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인종주의라는 개념의 본질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근대 서구의 인종주의가 보여주는 모든 차별적인 요소들은, 근대 서구 사회가 갖고 있던 지배-피지배계급 간의 모순구조나 성별 억압구조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흑인, 노동자, 여자들, 원주민들’은 한무더기로 경멸과 착취의 대상이었고, ‘백인, 가진 자, 남자들, 서양인들’은 거기 대비되는 지배자였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인종적-계급적-성적-지리적 개념이 혼재해 있는 다층적인 구조다. 그 중에서 어느 한 단면만을 딱 잘라내 “이것이 인종주의”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 모호성과 혼란을 이해하고 있어야지만 인종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이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인종/인종주의를 짧게 소개하는 것이다보니, 책이 그리 친절하지는 않다. 책이 쓰여진 것이 2007년이어서 조금의 시차도 있다. 또한 이 책은 국내에는 생소한 영국의 인종주의 관련 충돌 사례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어서 영국사회의 다문화 구조에 대해 사전지식이 없는 이들에겐 때론 지나치게 지엽적인 사건을 설명하는 듯 비칠 수도 있다. 

영국 사회에서 논란이 되었던 ‘제도적 인종주의(institutional racism)’라든가 중남미(특히 브라질)에서 한때를 풍미한 ‘인종민주주의’(racial democracy) 등의 개념을 던지듯 언급하면서 지나친 것은 아쉽다. 하지만 인종주의와 관련된 다양한 논점들을 최대한 폭넓게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 진전된 공부로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로서는 아주 훌륭한 교재가 될 것 같다.



최근 유럽에서는 “다문화사회는 불가능한 꿈”이라며 로마족(집시)과 무슬림 등 이주자들을 내몰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배경엔 유럽의 경제침체가 자리잡고 있지만 이번에도 그 타깃은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가난한 이방인’들이며 그 형태는 다분히 인종주의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제야 비로소 나와 다른 사람들, 우리 것과 다른 문화를 돌아보려 하는 우리에게 다른 사회의 선례들이 타산지석이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