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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내일을 가다/ (8) 과거사 청산은 '현재진행형'

딸기21 2010. 5. 18.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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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오전 르완다 수도 키갈리. 가탱가 지역 주민센터 앞에서 한 여성이 16년 전 일어난 ‘대학살’을 증언하기 위해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는 마을 사람들이 죽어갔던 과정을 똑똑히 지켜봤다”며 “오늘 증인으로서 당시 벌어졌던 일을 그대로 밝히겠다”고 말했다.
재판의 격식은 따지지 않는 듯했다. 이날 열린 항소심 재판에선 법복 입은 판사 대신 옆 마을 주민들 중 명망 있는 이들이 법관 역할을 맡았다. 재판 장소도 주민센터 내 30㎡ 정도 크기의 소강당이었다. 이웃 마을에서는 이날 판사가 배탈이 나서 재판이 미뤄졌다고 했다. 이것이 르완다의 지역사회별로 이루어지는 1994년 제노사이드(인종말살) 전범재판 ‘가차차’의 모습이었다.



지난달 19일 르완다의 가탱가 지역 주민센터 밖에서 수의를 입은 가차차 재판 피고인들이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키갈리 | 이청솔 기자



르완다는 당시 후투족 정부와 투치족 반군 사이의 내전으로 인구 1000여만명 중 80만명 이상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사망자는 대부분 소수민족인 투치족이었다. 누구든지 가족이나 친척 가운데 1명 이상은 당시 내전의 희생자가 됐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전날까지도 이웃에 살던 사람들, 친구, 직장 동료들이 하루 아침에 적이 되어 죽고죽이는 살인극을 벌였다. 내전에서 이겨 정권을 잡은 투치족 정부는 두 민족의 화해 없이는 르완다를 다시 세울 수 없다고 보고 과거사 청산에 매진하고 있다. 아프리카 곳곳에서 내전과 학살, 인종차별의 아픈 과거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옛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하는 일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이 안고 있는 과제다.

인종말살 이후 16년, 화해는 먼 길

가차차 재판은 반인도범죄자 수가 너무 많아 보통의 법정에는 그들 모두를 세울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도입됐다. 1999년까지 체포된 종족살해 가해자만 12만명이었다.
정부는 9000개 마을에 전통적 재판제도에서 빌어온 가차차를 설치하고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이 참여하게 했다. 인종말살을 계획적으로 주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가해자들을 모두 법정에 세워 진실을 밝혀야 진정한 화해가 가능하다다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가차차 재판에서 징역형을 받은 이들은 모두 형량대로 복역을 해야 한다. 과거사 청산의 모범 케이스로 꼽히는 가차차는 2008년까지 대부분의 재판이 마무리되고 현재는 항소심만 진행중이다.
르완다에는 교육과 분쟁조정을 담당하는 ‘통합화해위원회’라는 것도 있다. 대학 입학을 앞둔 모든 학생들은 이 위원회에서 여는 ‘인간도(연대) 캠프’에 들어가 1~2달 동안 르완다 현대사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2005년에는 성인들을 위한 교육 과정인 ‘이토레로(부족식 집단교육)’도 생겨 이미 16만명이 이 과정을 거쳐갔다. 르완다는 또 해마다 4월 초 2주를 ‘제노사이드 추모주간’으로 지정해 각종 행사를 치른다. 마을 주민들은 이 기간 한 자리에 모여 당시 벌어졌던 일들을 회고하고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지 말자’는 의지를 다진다.

내전에서 밀려난 후투족 강경파들은 여전히 이웃 콩고민주공화국 등에서 반군 활동을 하고 있지만 르완다의 과거사 청산은 성공적이다. 이 나라에서는 “투치족이냐, 후투족이냐”를 묻는 것이 금지됐다. 외국인이 궁금증으로 그런 질문을 던지면 “우리는 모두 친구”라는 답이 돌아온다. 정부도 민족에 따른 차별대우를 헌법으로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니코데메 부과바리 르완다국립대학 정치학과 교수는 “투치족인 폴 카가메 대통령이 후투족도 적절히 기용했기 때문에 사회가 안정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과거사 청산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에는 16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부과바리 교수는 “정부가 많은 노력을 했지만 정신적으로 완전한 화해를 이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며 “매년 제노사이드를 회고한다는 것 자체가 여전히 문제가 많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르완다 통합화해위는 임시기구가 아닌 상설기구로 창설됐다. 통합화해위의 찰스 무치사는 “화해는 ‘과정’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오늘로 모두 끝’이라며 위원회의 문을 닫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금지하자 ‘프랑스어 사용층’(후투족), ‘영어 사용층’(투치족) 등 종족을 가리키는 일종의 ‘암호’가 등장하는 등 진정한 화해는 도리어 늦어지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백인정권 무너져도 사회 모순 여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94년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 체제가 무너진 뒤 ‘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라는 과거사 청산 모델을 만들었다. 백인 정권에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와 가해자들을 불러내 증언을 듣고 가해자가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힌다고 판단되는 경우 죄를 ‘사면’해주는 것이다. 이 모델은 이후 아르헨티나, 칠레, 동티모르, 가나, 한국 등으로 퍼져나갔다. 진실화해위는 사면을 신청한 7112명 중 849명을 대상자로 선정하고 98년 임무를 마쳤다. 남아공은 13%의 백인이 나머지 인종 전체를 통제하는 억압적 구조에서 내전이나 보복 등의 큰 후유증 없이 민주적 체제로 옮겨간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진실화해위가 화해에 초점을 두고 사면권을 남용하는 바람에 반인권 범죄자들을 너무 쉽게 용서했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넬슨 만델라 등의 흑인 지도자들이 수감됐던 케이프타운 앞바다 로벤섬 감옥은 이제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백인이지만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해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을 벌였던 리처드 화이팅은 지금 로벤섬 박물관에서 일하고 있다. 화이팅은 백인정권 때 징집을 피해 보츠와나로 망명했다. ANC는 이제 집권당이 됐고 화이팅은 아파르트헤이트 자료 수집과 조사·정리를 맡고 있다. 그는 “남아공 진실화해위의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반면 과거사 청산이 형식에 그치면서 모순된 사회구조를 개선하는 데 실패했다는 지적도 있다. 케이프타운대학 사회학과의 멜리사 스테인 교수는 최근 백인 농장주 외젠 테르블랑슈가 농장 노동자들에게 살해된 일을 예로 들었다. 그는 “대농장을 소유한 백인 농장주가 흑인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구조는 그대로다”라며 “남아공 사회가 지난 16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과거사와의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르완다와 남아공 사람들은 모두 ‘정치인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벨기에 식민정권이 떠난 후 후투족과 투치족의 갈등이 본격화됐던 르완다를 비롯해, 아프리카 대부분 나라의 내전 뒤에는 오랜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다. 그 갈등의 골을 메우는 것이 쉽지 않지만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정치인들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르완다 통합화해위의 찰스 무치사는 “지도자들이 특정 집단이 부를 독점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갈등을 해소하려 애쓰면 문제는 사라진다”고 말했다. 남아공에서는 백인정권이 무너진지 16년이 지났지만 흑백 정치인들이 여전히 인종갈등을 권력 강화에 이용한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요하네스버그대학에서 만난 흑인 여학생은 “흑백간 통합의 정도는 여전히 별로 높지 않다”며 “서로를 증오하게 해 입지를 강화하려는 정치인들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키갈리·케이프타운·요하네스버그|이청솔 기자 taiyang@kyunghyang.com


 

정치기반 허약, 자국서 전범재판 못해


서아프리카의 최빈국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은 2000년대 초 내전이 모두 끝나자 과거사 청산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내전의 상처가 너무 깊었던 탓에 실제로는 전범재판도 자기네 나라에서 치르지 못할 정도로 정부의 정치·경제적 기반이 허약하다.
라이베리아 내전의 장본인인 찰스 테일러는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1989년 코트디부아르에서 반군을 창설했다. 이듬해 사무엘 도에 대통령이 살해당하면서 라이베리아는 내전에 들어갔고, 결국 15만명의 사망자를 남기고 96년에야 끝났다. 97년 대선에서, 국민들은 테일러가 낙선하면 다시 내전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에게 표를 던졌다. 당시 테일러의 선거 슬로건은 “그는 내 부모를 죽였지만 나는 그에게 표를 준다”였다. 결국 테일러는 국민들의 두려움에 기대어 압도적 표차로 당선됐다.
테일러는 다이아몬드를 노리고 이웃 시에라리온의 내전도 부추겼다. 그의 지원을 받은 시에라리온 반군은 다이아몬드 광산 대부분을 점령했다. 92년 쿠데타로 시작된 시에라리온 내전은 10년동안 이어졌다. 반군은 내전 기간 집단 강간·학살·아동살해 등 끔찍한 범죄들을 자행했다. 특히 소년병들에게 마약을 줘가며 민간인들의 팔을 절단하도록 한 만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2000년대 들어 라이베리아에서 테일러에 맞선 내전이 다시 일어났다. 테일러는 물러난 뒤 나이지리아로 도망쳤다가 2006년 체포됐다. 같은 해 라이베리아에서는 아프리카 첫 여성 국가원수인 엘렌 존슨-설리프 대통령이 당선돼 재건의 희망이 고조됐다. 그러나 라이베리아 민주 정부는 테일러의 귀국이 몰고올 정치적 불안을 이유로 테일러를 시에라리온으로 이송했다. 시에라리온특별법정에서 재판을 받아도 역내 불안이 고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자 유엔은 그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형사재판소(ICC) 형무소로 이감했다. 2007년 이후 특별법정은 ICC에서 테일러를 재판하고 있다.
라이베리아나 시에라리온은 반인도범죄를 재판할 전문적인 역량과 재원이 모자라, 유엔과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아 과거사 청산을 하고 있다. 르완다의 경우도 일급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는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는 자국 내에 설치하지 않고 이웃 탄자니아에 두고 있다. 

이청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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