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대로 세계사

사하라 땅밑에서 핵폭발이 일어난 날

딸기21 2017. 3. 16. 14:53

1950~60년대 미국, 소련, 프랑스 등 열강은 잇달아 대기권과 해상, 지하에서 핵실험을 하며 핵무기 개발 경쟁을 가속화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비판을 받고 국제사회의 이슈가 된 것은 프랑스가 1960년대 사하라 사막에서 수행한 핵실험들이다. 식민지 주민들의 생명에는 아랑곳없이 대기권, 지하, 바다를 가리지 않고 핵폭발을 일으킨 반인도적 행위였기 때문이다. 


1960년부터 4차례 대기중 핵실험을 했던 프랑스는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군인·주민 피해에 대한 비판이 일자 실험을 중단했다. 그러고는 사하라 사막에서 지하 핵실험을 강행했다. 

The site of Gerboise Bleue, the first French nuclear bomb test, on Feb. 20, 1960, a week after detonation.STF/AFP/Getty Images



총 14회에 걸친 사하라 지하 핵실험을 포함, 프랑스령 폴리네시아 등지에서 210회에 걸쳐 핵실험을 벌였다. 특히 알제리가 독립한 뒤에는 남태평양 섬과 산호초들이 프랑스의 핵실험실이 됐다. 1974년 프랑스 군은 대기중 핵실험을 완전히 중단한다고 밝혔으나 타히티 남동부 무루로아섬 등지에서 1996년까지 지하와 해저에서 핵실험을 계속했다.

1960년 2월 13일 오늘날의 말리와 인접한 곳에서 프랑스가 최초로 지하 핵실험을 했을 때 작전명은 제르부아 블뢰(Gerboise Bleue)였다. 제르부아는 땅굴을 파고 살아가는 들쥐를 가리킨다. 

핵실험으로 군인들은 물론이고, 주민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다. 방사능이 누출돼 알제리와 폴리네시아 주민들과 군인 15만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산된다. 프랑스 잡지 르파리지앵은 사하라사막 핵실험에 대한 비밀보고서를 입수, 프랑스 군이 자국 군인들까지도 핵폭발 피해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도구로 썼다는 사실을 폭로한 적 있다.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핵폭발 현장에 병사들을 도보로, 혹은 장갑차량으로 근접하게 해 피해 정도를 측정했다는 것이다.

유전질환을 앓는 피폭자 2세들과 낙진 피해자, 핵실험으로 인한 부상자들은 수십년 동안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했지만 파리의 반응은 냉담했다. 2003년 타히티를 방문한 자크 시라크 당시 대통령은 “핵실험이 주민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핵실험이 옛 식민지와 남태평양에 미친 영향에 대해 국제적인 관심이 쏠리고 반인도적 범죄라는 비난이 빗발치자 결국 프랑스 정부도 손을 들고 보상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프랑스 의회는 2009년 핵 실험 피해자 보상법을 만들었다. 당시 알제리 시민단체 조사에 따르면 1960~66년의 핵 실험에 따른 피해자 중 생존자가 2만7000명이지만 프랑스 정부는 500명만 피해자로 인정했다. 보상 내용 또한 야박하기 그지없다는 비판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