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위조여권 규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22일 파리를 방문한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자치정부 수반)과 회담한 뒤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달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두바이에서 일어난 하마스 간부 암살사건을 “명백한 살인행위”라고 강력 비난했습니다. 사르코지는 “프랑스는 모든 종류의 처형에 반대한다”면서 “어떤 것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사르코지의 발언은 하마스 간부 암살을 범죄로 지목, 공개적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입니다. 유럽연합(EU)도 이날 이스라엘 측이 암살계획에 유럽국들의 위조 여권을 사용한 것을 비난하는 성명을 냈지만 이스라엘이나 이스라엘 대외정보기관 모사드를 지목하지는 않았습니다.
EU는 브뤼셀에서 열린 외무장관회의에서 “용의자들이 EU 주민의 신상정보를 도용, 위조여권과 신용카드를 만든 것을 강력 규탄한다”는 성명을 채택했으나 하마스 지도자에 대한 암살을 거론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사건이 일어난지 한달이 넘게 지났고 영국과 아일랜드가 이스라엘 대사를 불러 여권문제를 추궁하기까지 했지만, 이스라엘의 악명높은 표적살해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않고 위조여권만 건드리고 만 셈이죠. 하마스의 ‘테러행위’들을 줄곧 비난해온 미국도 물론 이 사건에 대해선 함구하고 있네요.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이스라엘 외무장관은 EU가 성명을 내는 걸 막기 위해 브뤼셀을 찾아가 영국·아일랜드 외무장관과 회담했지만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습니다. 유럽은 이스라엘을 비난하지 않을수도, 그렇다고 내놓고 비난하지도 못한 채 눈치를 보는 상황입니다.
유럽과 이스라엘의 복잡한 관계
두바이 사건에 대한 유럽 측의 어정쩡한 태도 뒤에는 양측의 복잡한 관계가 숨어있습니다.
유대인 학살이라는 ‘원죄’를 안고 있는 유럽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원했고, 이후에도 미국과 함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해주는 역할을 해왔지요. 유럽 15개국은 1975년 이스라엘과 협력협정을 맺었고, EU 출범 뒤 이 협정은 2000년 ‘EU-이스라엘 협력협정’으로 대체됐습니다. 이 밖에도 유럽권과 지중해권 나라들의 자유무역협정인 ‘유로-지중해협정’ 등으로 묶여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이스라엘은 유럽에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EU와 유럽간 교역량은 2007년 257억유로 규모로, EU에는 25번째 교역상대국에 불과합니다.
반면 이스라엘 입장에서 유럽은 매우 중요하지요. 이스라엘 전체 수출액의 33%, 농산물 수출량의 70%가 유럽으로 갑니다. 또한 유럽에서 오는 물량은 이스라엘 수입액의 40%를 차지합니다. 2007년의 경우 EU는 이스라엘에 2억유로 어치의 무기를 판매했습니다.
밀접한 관계인 동시에, 이스라엘은 유럽에는 골칫거리입니다. EU는 유엔, 미국, 러시아와 함께 ‘중동평화 콰르텟(4자기구)’을 만들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협상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유럽의 역할은 딱히 없다고 봐야겠죠.
공식적으로 EU는 이-팔 양측이 평화공존하는 ‘두 국가 방안’을 지지하지만, 이스라엘 우파 정권이 합의를 틀어버려도 제재 한번 하는 일이 없습니다. 2008년말~09년초 이스라엘의 가자침공 때에도 중재력을 못 보여 오히려 위신이 하락했고요.
EU는 이스라엘을 유럽 내 모든 스포츠행사에 참여시켜 사실상 멤버로 대접하고 있고, 하비에르 솔라나 EU 외교정책 고위대표도 지난해 “이스라엘은 사실상 EU의 일원”이라 인정한 바 있습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이달초 이스라엘 방문 때 EU 가입신청을 하지도 않은 이스라엘을 향해 “EU 멤버가 되면 환영할 것”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습니다.
‘반이스라엘’ 양산하는 이스라엘
EU 각국 정부들은 과거에 대한 부채감 때문에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걸 꺼려하지만, 국민들 사이에선 반이스라엘 정서가 만만찮습니다. 특히 국제법과 유엔 결의를 위반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분리장벽’ 건설과 점령지 확대정책, 가자지구 공격, 표적살해 행위 등이 불거질 때마다 반감이 고조됩니다.
유럽의회는 2008년 말 가자지구 봉쇄와 요르단강 서안 유대인정착촌 확대에 항의, 협력협정 연장을 미뤘습니다. EU는 유엔에서 이스라엘의 무법행위를 규탄하는 결의안들이 나올 때마다 지지와 반대 사이를 왔다갔다합니다(한국은 세계에서 미국과 함께 이스라엘을 편드는 두어개 나라 중 하나죠). 지난해 EU 재판소는 “이스라엘의 불법점령지에서 생산된 물품에는 비관세 혜택을 줄 수 없다”는 판결을 했습니다.
지난해에는 가자 침공에 항의해 유럽 전역에서 이스라엘 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번 두바이 사건도 반유대 정서를 부추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미국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이스라엘 정부가 대외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공들여 캠페인을 벌여왔지만 두바이 사건 때문에 무위로 돌아갈 판”이라고 보도했습니다.
* 이 사건과는 상관이 없지만...
독일에서 하인리히 뵐 재단과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이 공동개최할 예정이던 저명한 유대인 학자 노만 핀켈슈타인의 강연회가 취소됐다고 합니다. 핀켈슈타인은 일란 파페와 함께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존재와 행위를 비난해온 대표적인 유대인 지식인이죠.
유럽, 특히 독일인들이 '반유대주의'라는 욕을 먹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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