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잠보! 아프리카

넬슨 만델라에게 평화란 없다

딸기21 2003. 3. 30. 16:45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영혼이 있다면, 그건 넬슨 만델라일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두말할 나위없이 만델라다.

영국 BBC 방송 인터넷판에 넬슨 만델라의 일상 생활을 담은 기사가 실렸다. 내가 지금 기분이 몹시 좋다면 몽땅 번역을 해서 올려놓겠지만...방금 전 번역하다가 날려먹었다. 언젠가 '만델라' 코너를 만들게될 그 날을 기약하며, 자료 삼아 올려놓는다.


(만델라에 대해서는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만델라 재임 시절의 '아프리카 르네상스'와 아프리카의 위상이 달라졌었던 일, 만델라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의 오랜 우정, 그리고 만델라가 최근에 에이즈 퇴치 운동 하고 있는 것, 로커비사건 재판받는 리비아인 '테러용의자'들의 인권 위해 애쓰는 것, 첫째 부인 위니 이야기, 모잠비크 대통령 미망인에서 만델라 세번째 부인 된 그라샤 이야기, 정치적 후계자이자 '마음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 현 대통령과의 관계, 최근의 인간방패 이야기까지. 아직도 사람들은, 만델라가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워커홀릭 만델라에게 평화는 없다
   By the BBC's David Dimbleby  


넬슨 만델라는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아침 운동을 하고, 시큼한 우유랑 신선한 과일로 아침을 먹고, 하루의 일과를 준비한다. 오랫동안 그의 곁을 지켰던 젤다(화이트 아프리카너)가 여기저기 전화를 때리기 시작한다.

"나를 교황에게든, 푸틴에게든 데려다달라"

만델라는 최근에 토니 블레어를, "영연방의 지도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부시의 '외국인 비서' 꼴로 전락했다"고 맹비난했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만델라는 블레어를 '친구'라고 부른다. 자끄 시라크, 게르하르트 슈로더, 피델 카스트로 같은 세계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의 친구인 것처럼.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그들도 나를 '위협'으로 보지 않거든요. 그들이 내 말을 듣느냐고요? 어떤 이들은, 들어주지요."

만델라, 여든 네 살. 쉼 없이 걷는다. 오랜 감옥생활로 무릎이 상했지만 "은퇴생활에서 또 은퇴할" 생각은 전혀 없다.(만델라는 아들이나 마찬가지인 타보 음베키가 자기 뒤를 이어 대통령직에 오른 뒤로는 내정에 전혀 관여 안 하고 세계를 돌며 '인권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인권지킴이 몫에서는 결코 은퇴할 수 없다는 말이다)

만델라의 하루 일과표는 뒤죽박죽(chaotic)이다. 우리 같은 사람 눈으로 보기에는. 이 사람의 시간표를 이해하려면 이 사람의 눈으로 봐야 한다. 컴퓨터에 저장된 스케줄표는 주 단위, 시간 단위로 빽빽하게 짜여 있다. 뉴욕에서 인도네시아, 다시 유럽으로 종횡무진.

"그렇지만 나도 그냥 장단점 다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이라고, 그렇게들 봐줬으면 좋겠어요"
(만델라 할아버지, 그렇게는 안 되죠. 당신은 '보통의 한 사람'은 아니니까요.)

만델라의 스케줄이 뒤죽박죽일 만도 하지. 한 해에 5000개도 넘는 약속 신청이 들어오는데 그 중에 몇개를 고르려니 힘들 수 밖에. 영화배우, 백만장자, 대중가수, 모델, 정치인, 사업가들이 모두 만델라를 불러댄다. 그래서 만델라는 어떤 때는 제트기를 타고 사우디 왕자를 만나러 가기도 하고, 값비싼 옷을 입고 런던의 호텔가를 활보하기도 한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교황도, 푸틴도, 만델라의 충고를 듣고 싶어하진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물론 이 노인네를 예의바르게 접대하겠지만, 노인네의 충고를 따르려 하지는 않을 거다. 

물론 만델라의 노력이 국제사회에서 통한 적도 있었다. 작년에 만델라는 로커비사건(일군의 테러범들이 86년이었나, 팬암기 한 대를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날려버린 사건) 범인으로 체포돼 헤이그에서 재판 받고 있는 리비아인 용의자들의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그들을 아랍어가 통하는 헤이그 아닌 다른 지역으로 이감해달라고 헤이그 법원에 요구했었다. 그래서 받아들여진 적이 있다. 그렇지만 만델라가 '실패'한 경우가 더 많다.

(여담이지만, 리비아가 미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데, 명분은 '테러국가'라는 것 때문이다. 그런데 테러를 저질렀다고 테러국가가 아니라, 로커비 사건 용의자 3명을 영국에 안 넘겨줬다고 그러는 것이다. 90년대 후반에...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리비아가 용의자들을 영국에 넘겨줬다. 그런데도! 리비아는 아직 '테러국가'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이슬람권에서 리비아만큼 테러 없는 나라는 없다. 테러의 온상은 이집트 사우디 같은 친미국가들이다.)

만델라의 잘 차려진 사무실. 이 사무실은 물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나 콩고민주공화국 유혈분쟁 따위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다. 만델라의 평화노력이 그럴싸한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 효과가 없을 수도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당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할아버지, 넘 멋져요...)

우리 시대의 아이콘이자 널리 존경받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겸손하고 예의바르다. 할아버지를 만나본 사람들은 다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남자들한테는 입에 발린 칭찬을 해주고, 여자들하고는 히히덕거리면서 노닥거린다. 그렇지만 자기 감정이나 사생활을 꼬치꼬치 캐묻는 질문에는 넌지시 화제를 바꾸는 노회한 정치인이다.

만델라의 오랜 친구 데 클레르크 전 대통령은 두 사람 사이에 가끔씩은 묘한 회한이나 씁쓸한 감정이 생겨나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 직전 마지막 백인정권의 대통령이었는데 만델라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정계 복귀시켰다. 그 공적으로 만델라하고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다. 또 94년 첫 '흑백 통합 대선'에서 만델라의 러닝메이트로 나와 부통령으로 '봉사'했다. 부통령 자리는 나중에 만델라의 정치적 동지로서 백인정권의 탄압으로 사망한 고반 음베키의 아들 타보 음베키에게 옮겨갔다. 데 클레르크는 만델라가 물러난 뒤 차기 대선을 꿈꾸지 않는다고 밝혔었고, 타보 음베키는 무난히 만델라의 후임자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만델라는 데클레르크 앞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에 대한 경멸을 숨기지 않는다. 

"Of course I despised them."
"온 세상이 그들을 경멸해. 아파르트헤이트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멋진 옷에 실크 셔츠에 실크 넥타이를 매고 다녔지. 겉모양은 아름다웠지만, 뱃속에는 악마가 들어차 있었어요."

만델라가 감옥에 있을 때 가장 괴로왔던 것은, 백인정권이 가족을 교묘하게, 계획적으로 괴롭히며 파괴했던 사실이었다. 만델라의 자식들은 16살이 될 때까지는 아버지 면회도 할 수 없었다. 모친이 죽었을 때에도,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장례식에 갈 수 없었다. 간수들은 아내 위니가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고 그의 귀에 속닥거렸다. 볼 수 있는 신문이라고는, 간수들이 오려내 던져주는 악담 섞인 기사들 뿐이었다.

위니.

만델라는 위니가 불륜 사실을 떠벌이고 다니는 걸 알면서도 위니한테 관대하게 대했었다. 이미 만델라가 감옥에 있던 시절에 ANC는 만델라더러 이혼하라고 권했었다. 만델라는 거절했다. 위니는 ANC의 주요 활동가였다. 그가 옥중에 있는 동안에도 ANC에서 '만델라'라는 명성이 살아있을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위니였다.

"위니가 바람피운 사실을 알고난 뒤에, 난 내 마누라가 젊은 여자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썼어요."
"매력적인 소녀였습니다. 내가 집을 떠나고(감옥에 가고) 한 3년 지나면서부터는 유혹도 많았을 것이고, 그걸 뿌리치기도 힘들었을 거예요"

인생은 80부터

지금 만델라의 곁에는 새 동반자 그라사가 있다. 혈기왕성하고 생동감 넘치는 여인. 그라사는 고(故) 사모라 마샬 모잠비크 대통령의 부인이었다. 만델라는 80세 생일날 그녀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라사도 남편만큼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녀와 함께 하는 건 대단한 행복이죠." 

(둘이는 재혼 전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97년이었나, 만델라는 그녀와 사귀는 걸 실토하면서 "사랑에 빠지면서 내 삶은 꽃처럼 피어나고 있다"고 말했었다)

재혼하면서 인격적으로 많이 성숙했다고 만델라는 말한다. 아이들과 손자손녀들에게 예전처럼 엄격하게 하지 않고 자상하게 대하게 된 것이 그 예. 그라사 자신도, 만델라에게 예전에 가져보지 못한 가족 안에서의 행복을 주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

그여자의 이야기. 

만델라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처음으로 무언가 느낌이 왔다고 한다. 

"누군가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존경과는 조금 다른, 그렇다고 지적인 교류만도 아닌, 그보다 중요한 무언가, 약간은 당황스러운, 따뜻함을 느낀 거예요. 나 자신에게 말했죠. 아니야, 그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요."

그남자가 한 일.

그라사에게 전화하고, 주말이면 모잠비크를 들락거리기 시작하다. 그리고, 신중하고 사려깊은 프로포즈...

"섬세한 남자랍니다." 
(그라사의 평가)

"He thinks how to touch you and I must say I just melted(오우, 예!). He did it very, very well," 

프로포즈 1차 시기 실패. 2차 시기, 성공. 그여자는 더이상 그남자의 사랑을 말릴 수 없었다나, 뭐라나.

같이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던 두 노인네, 드디어 사랑에 빠지다. 매일매일 전화 통화. 만델라의 측근들은 "그녀가 찾아올 때면 미스터 만델라는 좋아죽겠다는 표정이었다"고 증언한다.

교육과 에이즈 구호활동

그러나 그라샤는 모잠비크에서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고 있었고,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에서 어린이 구호재단과 만델라기금 일을 돌보고 있었다. 자선기금을 모으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눈코뜰 시간이 없었다. 

만델라는 기금을 조성해 주로 교육과 에이즈 관련 부문에 투입했다. 만델라가 보기에 에이즈는 복잡한 문제였다. 대통령 재직시에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남아공에서는 성인 인구의 10% 이상이 에이즈 환자이고,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에이즈 고아'가 수백만명에 이른다) 이슈를 환기시키려 했지만 번번이 난항에 부딪쳤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섹스 문제에서는 아주 보수적입니다. 그 문제를 입밖에 꺼내어 얘기하는 걸 싫어해요."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리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에이즈가 나라를 몽땅 휩쓸어버릴 거라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세요. 섹스를 경험하는 시기를 되도록 늦추라고. 그리고, 섹스를 할 나이가 되면 파트너 한 명 하고만 하라고, 할 때는 꼭 콘돔을 쓰라고 말입니다."  

만델라는 이런 연설을 해야 할 처지에 있었다.

대통령 할아버지가 이런 얘기를 해야 했으니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흑백차별 철폐투쟁의 상징, 아프리카가 낳은 세계적인 정치인, 콘돔 선전가가 되다! 그러니까 이 할아버지가 대단하다는 거다. 


90년대 중반 남아공에는 희망이 넘쳐흘렀다고 한다. 요하네스 스피스 한국 주재 남아공 대사를 97년에 만났었다. 스피스 대사는 남아공이 아프리카 르네상스를 꿈꾸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만델라 할아버지가 보츠와나에서 남아공을 잇는 '남아프리카경제회랑'을 만들 꿈에 부풀어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동남부 아프리카의 몇몇 국가들은 남아공을 중심으로 해서 '아시아의 4룡'과 같은 '아프리카의 용들'이 될 찰나였다. 


그런데 흑백 문제가 물밑으로 가라앉은 남아공에 철퇴가 날아들었다. 에이즈. 이 전염병은 원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풍토병이다. 전쟁보다도, 인종차별보다도, IMF보다도 무서운 것이 에이즈였다. 남아공은 에이즈 때문에 경제발전은 고사하고 국가가 붕괴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남아공 문제의 '본질' 중 하나라는 걸 깨달은 할아버지는 反에이즈 투사로 변신해 싸움을 벌이고 있다. 지지난해 남아공 정부가 글락소스미스웰컴, 보슈, 파이자, 머크 같은 다국적 제약회사들을 약값을 내리라는 내용의 소송을 걸었는데, 그 뒤에는 할아버지가 떡! 하니 앉아계셨다. 올초 유명한 스타들 불러서 에이즈 구호기금 마련 음악회 열었는데, 그런 거야 장난이지, 뭐.

에이즈 얘기를 하는 것은 물론 쉽지 않았다. 대통령 재직시절에 만델라도 에이즈 문제는 사실 포기하다시피 했었다. 


"아프리카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인신공격이나 다름없는 거였어요. 청중들은 충격어린 시선을 서로 교환하더군요." 


섹스 얘기를 하면 대통령에 재선될 수 없다고, 보좌관들이 충고를 했다. 


"나는 선거에서 당선되기 위해 에이즈 얘기를 안 하기로 했어요."

"199가지 점에서 그는 우리나라의 구세주다. 그런데 200번째 방법에서는, 아니다"
-남아공의 법관 에드윈 카메론

지금은 에이즈 구호활동가로 더 이름높은 남아공의 법관 출신 구호활동가 에드윈 카메론은, 다름 아닌 만델라만이 에이즈를 남아공의 제1 이슈로 부각시킬 수 있었는데 만델라가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만델라만이, 그런 위상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기에, 젊은 사람들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었을 거예요. 성자(聖者)같은 인물에게서 나온 메시지라면 효과가 있었을 수도 있죠. 그런데 만델라는 그 역할을 하지 않았어요. 199가지를 잘했지만, 200번째에서는 실수를 한 겁니다."


물론 만델라 자신은, 에이즈 문제에 집중할 여력이 없었다고 변명한다. 집권 초기 사회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내전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엎질러진 물인데, 후회해도 소용없다"면서 카메론의 지적을 수용하는 것이다.


만델라는 권좌에서 물러난 순간부터, 에이즈라는 대재앙을 파헤쳐 들어가기 시작했다. 후임자인 타보 음베키 대통령에게는 아주 껄끄러운 문제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일그러질 수도 있었다. 음베키는 에이즈 운동가들 때문에 종종 곤욕을 치러야 했다. 에이즈 확산의 원인 규명과 대처법을 놓고 정부와 활동가들이 부딪치는 일도 많았다.


만델라는 음베키와 정면충돌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제3세계에서 의약품 수급체계의 효율성 문제라는 이슈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다른 활동가들이 사회안전망 차원의 예방 문제와 치료약의 가격 합리화 문제를 집중 거론한 것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혼돈에서 해방되다

과거 백인정권 시절 만델라의 적이었던 사람들도 "만델라는 배신자에서 우상으로 변신했다"고 인정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사보타쥬를 주도하고 테러리즘을 은근히 지원하고 게릴라전술을 구사해서 27년간 감옥에 처박혀 있어야 했던 이 사람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만델라 때문에 무너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악명높은 그 제도가 붕괴의 갈림길에 서 있었을 때 백인정권은 카오스 앞에 내던져진 나라를 만델라에게 맡겼다. 만델라는 카오스에서 나라를 구출할 유일한 대안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신적인 존재로 생각한다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나 역시 장점과 단점을 가진 보통 사람이라는 걸 이해해줬으면 하고 바랬어요."


트란스케이에 있는 할아버지의 마을에는 감옥을 본떠 만든 방갈로(할아버지네 집)가 있다. 여기는 할아버지가 '은퇴'한 뒤에 지낼 곳이자, 할아버지가 묻힐 곳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마을에 흙먼지가 일면서, 공군 헬리콥터가 광장에 착륙한다. 헬리콥터에서 아이들이 쏟아져나온다. 만델라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고,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요하네스버그로 돌아간다. 살아있는 전설에게, 오늘도 평화란 없다.



만델라 연표

1918 - Eastern Cape 출생
1943 - ANC(아프리카민족회의) 가입
1956 - Charged with high treason, but charges are dropped
1958 - 두번째 부인 위니 마디키제바(지금 인간방패로 이라크 가 있답니다)와 결혼
1960 - ANC 불법화 조치
1964 - 종신형 선고받다
1990 - 드디어, 세상 속으로
1992 - 위니와 이혼(세상 시끄러웠죠)
1993 - 노벨평화상 수상
1994 -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 첫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
1997 - ANC 의장직 사퇴
1999 - 대통령 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