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구정은의 '현실지구'

[구정은의 '현실지구']엑스포 유치, 사우디 '오일머니'에 밀렸다고?

딸기21 2023. 12. 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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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 리야드가 이탈리아 로마와 부산을 제치고 2030년 세계 엑스포 개최지로 선정됐다. 119표 대 29표를 '석패' '졌잘싸'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국 언론들은 아무튼 "오일머니에 밀렸다"는 점을 일제히 부각시켰다. 정말 그것 때문이었을까? 경제의 사활을 걸고 엑스포를 유치해야 할 만큼 한국의 사정이 절박하냐는 일단 제쳐두고, 사우디에 밀린 것이 과연 오일머니 때문이었을까를 생각해보자. 지금보다 훨씬 경제력이 약했던 시절에도 올림픽과 월드컵을 유치한 한국이었는데 말이다.
 

Members of Saudi Arabia’s Royal Commission for Riyadh City, celebrating at the Palais des Congrès in Issy-les-Moulineaux, after winning the vote to host the 2030 World Expo. /AFP

 
 
파이살 빈 파르한 외교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파트너들의 이야기를 듣고, 엑스포에서 뭘 기대하는지 이해하고, 신뢰를 얻기 위해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지"에 집중했다고 했다. 의례적인 말 같지만, 그의 표현대로 엑스포 유치는 "국제사회가 사우디에 보여준 신뢰의 표현"일 수 있다. '비전 2030' 등등 탈석유 시대로 나아가겠다는 사우디의 야심찬 비전이 호소력을 얻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AP통신은 “번영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제시하는 데 초점을 둔 캠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사우디는 표결이 실시되는 파리 에펠탑 근처에 '리야드 2030' 전시관을 만들고 도시 전역에서 대대적인 광고를 했다. 경제다각화와 국제적 위상 강화, 이 두 가지는 엑스포 유치전에서 사우디가 내세운 성취인 동시에 엑스포를 통해 가속화하려는 목표이기도 하다. 파이살 장관은 "리야드 엑스포의 유산은 건물을 넘어설 것"이라며 “더 밝고 번영된 미래를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 유산이 될 것”이라고 했다. 유럽연합 주재 사우디 대사 하이파 알제데아는 "오늘날의 사우디는 5년 전의 사우디가 아니며 2030년의 사우디는 오늘의 사우디와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사우디의 화려한 캠페인과 외교공세를 분석한 폴리티코는 사우디가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에 '투자 기회'를 제시한 것을  득표의 가장 큰 요인으로 꼽았다. 이탈리아는 사우디가 투표를 대가로 각국에 경제적 제안을 했다고 툴툴거렸다. 그런데 사우디가 표방한 것은 "세계를 위해 세계가 건설하는 엑스포"다. 석유 팔아 번 돈으로 당근을 약속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투자하라, 돈 벌 기회를 주겠다'는 제안으로 각국을 움직였다.
 

A photograph released by Saudi Arabian state media showing Crown Prince Mohammed bin Salman at the Kingdom’s official reception for Riyadh’s candidacy to host Expo 2030, in Paris, in June. / Saudi Press Agency,

 
 
‘오일머니에 밀렸다’고 하기엔 멋적은 것이, 경제규모도 재정도 한국이 사우디보다 우위다.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전망을 보면 사우디의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2조2500억달러, 한국은 3조1000억달러로 추산된다. 올해 한국의 예산은 640조원인데 사우디는 380조원이다. 사우디는 생각보다 돈이 없다. 재정은 늘 적자다. 지난해 7년만에 흑자로 돌아섰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고유가 덕이 컸다.  올해는 기름값이 다시 떨어졌고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산유량을 줄여야 했다. 지출은 대규모 인프라 투자 때문에 줄이기 힘든 형편이라 올해 다시 적자로 돌아섰다. 사우디 재무부가 9월 30일 발표한 예산 예비성명을 보면 올해 재정 적자는 GDP의 2%로 추정된다.

방만한 왕실, 부패와 관료주의, 낮은 기술수준에 꽉 막힌 사회 등등 사우디의 문제로 지적되는 것들은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변화’가 두드러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모티브로 사우디는 위상을 높였다. 2015년 살만 국왕이 즉위하고 2017년 무하마드 왕세자가 실권자로 득세한 이후의 변화는 눈이 핑 돌 정도다. '앞으로 100년'을 내다보고 왕국을 개조하겠다며 내놓은 계획들은 성과 여부를 넘어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Fiscal deficit and surplus in Saudi Arabia from 2016 to 2021 with a forecast of 2022 / www.statista.com

 
 
일례로, 5년 전까지 외국 관광객들은 들어갈 수 없었고 여성은 운전조차 할 수 없던 나라가 지금은 자동차 산업을 키우려 한다. 사우디 국부펀드인 공공투자기금(PIF)은 규모가 7000억달러에 이른다. 하지만 오일머니를 펑펑 쓰는 과는 거리가 멀다. 현대자동차와 함께 공장을 짓는데, 합작회사의 지분 70%를 사우디 국부펀드가 갖고 현대가 30%를 갖기로 했다. 공장 짓는 돈은 누가 낼까. 국부펀드가 '한국 돈을 빌려서' 낸다. 28일 국부펀드는 한국무역보험공사(K-SURE)가 지원하는 금융 신디케이트로부터 최대 50억 달러의 텀론(분할상환 대출)을 받기로 했다. 사우디가 각국에 내미는 ‘투자 제안’은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알아서 돈을 들고 와서 공장을 짓고 이윤을 내라는 것이다. 

중동 최대 경제국, 세계 17위 경제규모.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주축이자 주요20국(G20 멤버). 석유매장량 2600억 배럴(추정치)로 세계 2위, 천연가스 매장량 4위. 세계 2위 산유국, 세계 1위 석유수출국. 그런 사우디가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경제를 다각화하겠다고 한 지는 오래됐다. 무려 50여년 전, 1970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할 때부터다. 그후 10년 동안 고속도로와 발전소와 항구를 지었다. 1980년대에는 초점이 인프라에서  교육, 보건, 사회서비스로 이동했다. 하지만 사막에 지은 산업도시들은 활발히 움직이지 않았고 교육과 사회서비스도 원활치 않았다. 전문직이든 허드렛일이든 외국인 이주자들이 대거 떠맡았다. 민간투자는 정부 재정지원이나 인센티브에 의존했다. 5차 계획이 시작된 1990년대부터 사회서비스 개선, 지역개발과 국방능력 강화, 이주노동자를 줄이는 ‘고용의 사우디화(Saudize)’를 내세웠으나 성과는 그저 그랬다.
 

 
 
2000년대에 외부에서 경제 동력이 등장했다. 이라크전쟁 뒤의 고유가와 중국의 석유 수요가 성장의 기둥이 된 것이다. 2005년 세계무역기구(WTO)에 들어간 뒤 나름 글로벌 스탠다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 환경이 개선됐고, 인프라가 늘었고, 금융시스템도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예산과 수출 모두에서 석유부문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2016년부터 탈석유 시대를 대비한 개발계획을 본격화했다. 이번엔 성과가 가시적이었다. GDP에서 석유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2000년대 중반 40%대에서 2017년 이후 20%대로 떨어졌다.

미심쩍게 보던 바깥의 시선도 달라졌다.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UAE)가 먼저 걸어간 ‘개혁군주’와 경제 혁신의 길에 사우디도 동참하자, 바야흐로 ‘걸프의 순간’이 왔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무하마드 왕세자는 성명에서 "사우디는 엑스포를 비롯한 주요 국제 행사를 열기에 이상적인 장소가 됐다"고 했다. 작년 카타르 월드컵 때 서방 미디어는 노동문제 등을 제기하며 헐뜯기 바빴지만 카타르는 세계의 예상보다 훨씬 수준 높은 이벤트를 선보였다. 2021년에 엑스포를 개최한 두바이는 올해엔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로 손님들을 불러모았다. 사우디는 엑스포로 리야드에 4000만 명이 찾아오길 기대한다. 2034년 월드컵 개최는 거의 정해졌고, 올림픽 유치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이번 엑스포 외교전은 사우디의 역량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줬다. 얼마 전만 해도 인권문제로 비판받는 사우디가 엑스포를 열겠다는 것에 유럽 국가들 반응은 좋지 않았다. 2018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를 참혹하게 살해한 배후에 무하마드 왕세자가 있다는 비판이 무성했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반전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사우디 지지 선언이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사우디를 찾아가 유가를 낮추자며  저자세를 취했을 때부터 이미 인권 이슈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거기에 엘리제궁이 도장을 찍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사우디와의 관계 개선에 힘을 기울여왔다. 힘 빠진 미국, 전쟁으로 지탄받는 러시아, 정치적 위상이 경제규모를 못 따라가는 중국의 틈새를 비집고 중동 외교에 한발 걸치기 위해서다. 사우디 역시 오랜 정체에서 벗어나려는 참에 우군이 생기는 걸 꺼릴 리 없다. 무하마드 왕세자의 엘리제궁 방문을 비롯해 양측 지도자의 친밀한 행보가 이어졌다. 프랑스 기업들이 사우디 시장을 노리고 있는 것도 물론 중요한 요인이다. 6월 왕세자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에어버스는 리야드항공과 초대형 계약을 맺고 싶어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우디는 프랑스의 라팔 전투기를 살까 말까 저울질하며 밀당 기술을 발휘했다. 독일이 인권 문제를 들며 사우디에 유로파이터 타이푼 전투기를 파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데, 프랑스를 끼워넣어 독일을 설득하려는 것으로 해석됐다. 38세 왕세자가 엑스포 외교를 알차게 활용해 몸값을 높인 것이다.
 

French President Emmanuel Macron shakes hands with Saudi Arabia's Crown Prince Mohammed bin Salman Al-Saud at the Elysee Palace in Paris, France, June 16, 2023. (Reuters)

 

부산에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캠페인 자체에서도 사우디가 앞서 나갔다. 6월 방문 때 무하마드 왕세자는 대규모 수행단을 벤츠와 레인지로버에 태워 에펠탑 옆 전시장을 찾았다. 거기서 그는 국제박람회기구(BIE) 측 인사들, 각국 대표들과 2시간 동안 만났다. 레바논계 이민자 출신인 리마 압둘 말락 외교장관과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 등 프랑스 엘리트들과 대화를 나누며 지적이고 개방적인 이미지를 선보였다. 프랑스 홍보회사의 조언을 받아 거한 파티를 열고 코트디부아르 출신인 축구스타 디디에 드록바를 깜짝 초빙해 아프리카 대사들을 즐겁게 해줬다고 한다.
 
유네스코 주재 여성 대사, 유럽연합 주재 여성 대사 등 ‘사우디의 변화’를 보여주는 여성 관료들의 활약도 여기저기 보도됐다. 뉴욕타임스는 한 해 동안 사우디가 이전에는 관계가 없던 나라들과 투자를 논의하고 외교관계를 만든 것에 주목했다. 사우디 대표단이 5월 콜롬비아를 방문해 대사관 개설을 약속하자 콜롬비아는 엑스포 유치에서 리야드 지지를 선언해버렸다. 이달 들어 열린 사우디와 카리브해 국가들 간 첫 정상회의도 눈길을 끌었다. 
 

Promoting the Riyadh Expo 2030 in Paris on Tuesday. /Associated Press

 
 
반면 대통령과 장관들이 대거 나섰던 한국의 캠페인에 대해서는 외국 언론들의 보도가 많지 않아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표결 전부터 사우디의 전략을 자세히 분석한 폴리티코는 한국에 대해서는 “케이팝 스타 싸이와 방탄소년단이 부산을 홍보했고, 윤석열 대통령이 삼성과 LG 등 한국 대기업 경영진의 호위 속에 파리를 찾았다”고만 적었다. 뉴욕타임스는 “한국은 '오징어 게임' 스타 이정재와 방탄소년단을 홍보대사로 임명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다”고 소개했다. 

홍보 동영상에서 사우디는 네옴시티 등 미래형 메가프로젝트에 초점을 맞춰 ‘미래 비전’을 강조했다. 사우디를 "진보와 지속가능성의 등대"로 묘사한 대목은 비판적인 이들에게서는 실소를 자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검투사 차림을 한 배우 러셀 크로를 내세운 로마, 싸이와 방탄소년단을 계속 불러낸 부산보다 메시지는 더 효과적이었을 수 있다. ‘K컬처’가 세계를 휩쓰는데 홍보에서조차 사우디에 밀린 것은 그저 기술적인 문제였을까, 국가의 비전이 있고 없음에 따른 근본적인 문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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