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hic Rhodus, hic salta). 이솝우화에 나온 유명한 구절이다. “내가 왕년에 로도스에서 열린 멀리뛰기 대회에서 우승을 했다”고 잘난척하는 사람에게, 어떤 이가 저렇게 일침을 놨단다. 에게해 남부에 있는 그리스의 섬 로도스는 고대 올림픽의 최고 스타였다는 기원전 2세기 육상 선수 레오니다스의 고향인데, 스포츠가 꽤나 유명했던 모양이다. 이솝우화의 허풍선이가 진짜로 뛰어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야기 속 구절은 허세 부리는 사람을 일갈하는 관용어로 자리잡았다.
진짜로 로도스에서 바다로 뛰어든 가족이 있다. 우화가 아닌 긴박한 현실의 스토리다. 아들 둘을 데리고 로도스로 휴가를 떠난 한 영국 가족은 지난 주말 불길을 피해 바닷가를 달려, 군용 보트에 몸을 실었다. 지중해를 건너 유럽으로 가려는 북아프리카와 중동 난민들이 흔히 타는 고무보트 ‘딩기’에 올라타고 간신히 대피를 할 수 있었다. 그리스 곳곳이 초대형 산불에 휩싸이면서 벌어진 일이다.
‘올여름 유럽은/아시아는/북미는 기록적인 고온’이라는 뉴스가 해마다 되풀이되고, 지중해 일대의 산불도 해마다 커져만 간다. 이제는 초대형 산불 즉 ‘메가파이어’가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올여름에도 그리스는 화마에 휩싸였는데 특히 로도스와 코르푸 등 지중해 섬들의 피해가 크다고 한다. 영국인들이 이 지역에 여름 휴가 여행을 많이 가는데 항공사들과 여행사들이 로도스를 비롯한 그리스 여행상품들을 대거 취소했다면서 BBC는 딩기로 대피한 가족의 이야기를 전했다.
로도스는 그리스 본토에서 360km 떨어져 있고, 지중해성 기후답게 여름에는 고온에 몹시 건조하다. 면적 1400km2, 주민은 12만5000명인데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구성이 다채롭다. 기나긴 세월 동안 여러 제국이 거쳐간 지역인 까닭이다.
로도스의 역사는 기원전 16세기 미노아인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 미케네인이 도래했고, 도리아인의 시대를 지나, 마케도니아의 지배를 거쳐, 로마에 복속됐다. 고대에 태양신 헬리오스를 섬겼고 거대한 태양신의 석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태양의 섬’이라는 별명이 있다. 하지만 ‘로도스의 석상’으로 불렸던 거대한 조각상은 이미 기원전 226년 대지진으로 파괴됐고 후대 사람들이 그린 상상도로만 남았다.
로마 제국이 동과 서로 갈라진 4세기 이후로는 비잔틴 땅이었다. 하지만 7세기 중반부터 무슬림들이 발을 딛기 시작했고, 이슬람과 비잔틴 양대 세력이 맞부딪치는 곳이 됐다. 14세기 초반부터 200여년 동안은 ‘성요한 기사단’이라는 기독교 세력이 섬을 지배했기 때문에 ‘기사들의 섬’이라는 또 다른 별명이 생겨났다. 그러다 결국 1522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함락됐다. 투르크의 위대한 황제로 꼽히는 술레이만 대제는 이 섬을 차지하기 위해 군함 400척과 10만 명이 넘는 군대를 보냈다고 한다.
19세기에 그리스가 독립하면서 400년 간 이어진 투르크의 지배에서 벗어났지만 현대사도 순탄치는 않았다. 20세기 초반 오스만과 이탈리아의 전쟁에 휘말렸고, 이어 그리스와 튀르키예의 ‘주민교환’을 겪었다. 두 나라에 수백년 동안 주민들이 섞여서 살아왔는데, 나라가 갈라졌다는 이유로 튀르키예에 살던 그리스계와 그리스에 살아온 튀르키예계 주민들을 ‘교환’했던 것이다. 두 나라 모두에 상처로 남은 이 강제이주의 역사는 프랑스 작가 루이스 드 베르니에의 <코렐리의 만돌린> 같은 작품에 잘 묘사돼 있다.
이탈리아가 잠시 섬을 장악하면서 로도스는 영국과 파시스트 세력 간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자동차 브랜드로 더 유명한 엔지니어 페루치오 람보르기니도 이탈리아 점령기에 로도스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독일군까지 끼어들어 영국과 ‘로도스 전투’로 알려진 싸움을 벌이고 한동안 섬을 점령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나치 수용소에 끌려갈 뻔한 유대인 42가족 200여명을 구한 ‘로도스의 쉰들러’인 튀르키예 영사의 미담이 전해져 온다. 나치의 패망과 함께 ‘보호령’이라는 이름의 영국 점령통치를 거쳐 섬은 그리스로 통합돼 현재에 이르렀다.
곡절 많은 역사만큼이나 유적도 많아, 로도스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에게해의 푸른 바다와 유적지 덕에 유럽의 관광 명소로 손꼽히는데 올해 불길의 습격을 받았다. 이달 중순부터 시작된 산불이 갈수록 커져서 26일(현지시간)까지 섬 주민과 관광객 2만명 이상에게 대피령이 내려졌고 3개 지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이웃한 에비아 섬에서는 소방 헬기가 떨어져 조종사들이 숨지는 사고도 있었다. 본토도 곳곳이 화염에 휩싸였다. 성서 속 ‘고린도’로 유명한 코린트는 주요 도로가 봉쇄됐고, 당국은 아테네 쪽으로도 불길이 번질까 걱정하고 있다.
점점 잦아지는 그리스의 대형 산불은 기후변화에 따른 고온현상과 무관치 않다. 2007년 여름 몇 건의 방화와 자연발화로 시작된 화재는 그리스 국토의 4%를 태웠다. 올리브밭과 숲이 시커먼 재가 되어 사라졌다. 2009년에도 대화재로 유럽국들의 소방 지원과 원조를 받아야 했다. 2012년에는 튀르키예와 마주한 키오스 섬에서 8000헥타르가 불탔고, 유럽 전역이 열파에 휩싸인 2018년 여름에는 ‘아티카 화재’로 불리는 산불이 휩쓸었다. 2021년, 2022년, 그리고 올해에도 어김없이 메가파이어가 들이닥쳤다. 정부는 산불이 급속도로 번지게 만드는 낙엽더미와 덤불 등을 치우는 삼림 청소 프로그램을 지난해 시작했지만 2200만 유로(약 310억원)를 들여 7700헥타르를 정비하는 데에 그쳤다.
State of emergency declared in three areas in Rhodes as wildfire rages
그리스만이 아니다. ‘그리스 산불’에서 ‘남유럽 산불’로 영역이 확장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곳곳이 재난을 당하더니 몇 년 새 ‘지중해 산불’로 화재 범위가 더 넓어졌다. 2021년에는 튀르키예와 키프로스 등 지중해 동쪽 나라들에도 산불이 번졌고 레바논에서는 국기에도 들어가 있는 유명한 백향목 숲들이 타들어갔다. 올해에는 지중해 남쪽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와 튀니지 상황이 남유럽 못잖게 심각하다. 알제리 북부에서는 3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로도스를 덮친 산불은 ‘성서에 나올 법한 재앙’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인공위성이 찍은 섬의 사진에는 불길이 붉게 치솟은 숲의 모습이 생생히 보인다. AFP, 로이터 등이 전송한 사진에는 길가에 불타 죽은 염소들과 시커멓게 줄기만 남은 바닷가 나무들의 모습이 찍혔다. 천막은 타버리고 앙상한 철골만 남은 서핑 센터 앞 모래밭에는 서핑보드들만 뒹굴고 있다. 당국은 힘겨운 진화작업이 며칠 간 더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임시 대피소로 몸을 피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문을 연 로도스 섬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려온다. 로도스 북부 일리소스 마을의 경기장에 관광객들이 모여들었다. 생필품도 없이 스타디움 바닥에 몸을 뉘어야 하는 이방인들을 위해 주민들이 먹을거리를 모아 전해주고, 일부는 집으로 데려와 방을 내줬다고 현지 언론 카티메리니는 전했다. 그 곳뿐 아니라 여러 마을의 대피소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People of Rhodes open up their homes to evacuee tourists
재난 속에서 빛을 발하는 따뜻한 도움의 손길이 느닷없이 이번에 나타난 것은 아니다. “2015년에도 우리는 그렇게 했다.” 자원봉사자로 나선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그 해 내전을 피해 도망쳐 나온 시리아 난민들이 대거 유럽으로 향했고, 유럽의 첫번째 기착지가 그리스였다. 그 중에서도 로도스는 난민들이 밀려들어와 대규모 캠프가 설치된 곳이었다. 난민 체류가 길어지자 열악한 환경 속에 불이 나거나 폭력사태가 벌어지고 일부 주민들이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주민들은 전란을 피해온 이들을 집에 받아들여 보호하고 새 삶을 찾게 도왔다. 로도스 사람들은 산불 속에서 그 때의 경험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뭐라도 해야 했다.” 카티메리니와의 인터뷰에서 한 주민이 한 말은 따뜻하면서도 서글프다. “이번에도 우리는 의무감을 느낀다. 재난을 만난 것은 관광객들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슬프다. 그들은 모두 떠나겠지만 우리는 잿더미 속에 남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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