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북쪽, 항구도시 탕헤르. 초록빛 지붕에 흰 벽을 이은 지중해식 집들, 유럽풍 건물과 모스크가 공존하는 곳.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에서 창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내민 젊은이들이 붉은 국기를 흔들며 함성을 지른다. 유튜브와 틱톡에 올라온 모습이다. 프랑스와의 대결은 패배로 끝났지만 카타르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킨 모로코는 축제 분위기다.
모로칸월드뉴스, 'Morocco’s Honorable World Cup Journey Ends Despite Brilliant Performance Against France'
스페인식으로는 탕헤르, 프랑스어로는 탄지에르, 토착민 베르베르족과 아랍의 언어로는 탄자. 복잡한 역사가 복잡한 이름에 새겨져 있는 도시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스페인 남단 알헤시라스와 마주보고 있다. 두 항구 사이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페리가 오간다. 1시간이면 배 안에서 입국 도장을 찍고 두 나라를 넘나들 수 있다.
3000년 전부터 여러 문명이 스쳐간 곳이고,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지중해를 건너온 페니키아인들이 정착지를 세웠고 카르타고인들이 항구를 발전시켰다고 한다. 거인 아틀라스의 딸인 팅기스와 헤라클레스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 이 도시를 건설했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이 도시를 팅기스라고 불렀다. 로마제국의 속주 도시였다가 5세기 반달 족에 점령당했다. 한때는 비잔틴 세력이 차지했고, 그 뒤에는 아랍 우마이야 왕조 밑으로 들어갔다. 점령군으로 들어온 아랍인들은 베르베르족을 복속시키고 이슬람을 전파했다.
이베리아반도를 장악한 칼리프 국가 알모라비 왕조의 중심지였다가 다시 오스만 술탄의 총독에게 넘어갔다가 영국과 스페인과 프랑스의 각축전이 벌어졌던 기나긴 역사를 다 설명하기는 힘들다. 훌쩍 뛰어넘어 20세기, 유럽 열강들은 '국제지구'라는 이름으로 탕헤르를 모로코로부터 떼어내 조차지들의 모자이크로 만들었다. 프랑스와 스페인과 영국이 1923년부터 탕헤르를 '공동통치'하기 시작했다. 벨기에, 이탈리아,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웨덴, 심지어 미국도 조차지를 두고 발을 걸쳤다. 마치 이번 월드컵 본선진출국 명단을 보는 듯하다. 2차 대전 뒤 공동통치 기한은 끝났지만 스페인이 덜커덕 탕헤르를 점령했다. 도시가 모로코로 돌아온 것은 1956년에 이르러서였다.
두 차례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외교관과 스파이들, 작가와 보헤미안들이 이 도시에 머물며 아랍-베르베르 문화와 뒤섞인 독특한 크레올(혼성) 문화를 만들어냈다. 지금도 프랑스 시절의 흔적인 ‘시네마떼끄’와 크루아상을 파는 카페들, 유럽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게스트하우스가 줄지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중세 아랍의 여행가 이븐 바투타의 고향,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백악질의 야산에 층층이 쌓아올려진 도시”로 묘사했던 곳,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류의 <연금술사>에서 목동 산티아고가 자아와 마주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바로 탕헤르였다.
탕헤르뿐일까.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4강에 오른 아프리카 국가이자 아랍국이 됐다는 것을 넘어서서, 모로코인들 모두에게 이번 월드컵은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벨기에와 스페인, 포르투갈을 이기고 프랑스와 맞붙으면서 모로코는 옛 지배자들과 축구장의 적으로 만났다. 미국의 아랍전문가 할레드 베이둔은 “역사는 현재다”라는 인용구로 시작되는 CNN 논평에서 이렇게 말한다. “프랑스는 많은 부분에서 스스로가 만든 어두운 역사에 갇혀 있는 반면, 모로코는 스스로의 역사를 다시 만들고 있다.” 프랑스 국가대표팀에는 푸른색 유니폼에서 나온 ‘레블뢰(푸른색)’라는 애칭이 있다.“레블뢰가 모로코와 맞붙을 때, 아프리카와 아랍의 뿌리를 가진 프랑스의 많은 이주민들은 스크린을 보면서 프랑스의 푸른 역사와 검은 역사를 함께 볼 것이다.”
CNN, ‘Opinion: When Morocco faces off against France, the word ‘history’ won’t be enough’
2011년 프랑스팀 공격수 카림 벤제마는 "나는 득점할 때에는 프랑스인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아랍인"이라며 프랑스의 이중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고 있다. 1998년 월드컵에서 모로코의 이웃 알제리 이민자 가정 출신인 지단은 프랑스의 정체성을 선택했고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했다. 하지만 2022년 하킴 지예시와 아슈라프 하키미, 소피안 부팔은 조상들의 나라 모로코를 택했다. 프랑스의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들에게 이들의 선전은 말 그대로 꿈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키미의 골이 스페인을 무너뜨리고 8강행을 결정지었을 때 “마라케시에서 탕헤르까지 함성이 모로코 전역을 흔들었다”고 르몽드는 썼다. 유로뉴스는 “탕헤르에서 파리까지, 모로코 팬들이 거리로 나와 환호성을 질렀다”고 적었다. 무함마드6세 국왕도 수도 라바트의 도심에서 승리를 축하했다.
르몽드, ‘World Cup 2022: Scenes of jubilation in Casablanca after Morocco's victory against Spain’
반면에 프랑스의 한 극우 정치인은 “모로코 깃발들이 우리 나라를 점령하는 건 참을 수 없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이런 반응을 보는 모로코의 시선은 싸늘하다. 현지언론 모로칸월드뉴스는 “어떤 프랑스 정치인들은 모로코인들이 승리를 축하하는 방식을 비난하면서 인종주의적인 반이민자 레토릭의 연료로 쓰고 있다”고 했다.
모로칸월드뉴스, ‘French Politicians Disapprove of Moroccans’ World Cup Celebrations’
이 신문은 스페인도 꼬집었다. 모로코 팀이 포르투갈을 이긴 날 북부 지중해 도시 세우타에서 모로코계 축구팬들이 거리로 나오자 스페인 경찰들이 강제로 해산시켰다는 것이다. 세우타는 모로코 안에 있지만 스페인령이다. 스페인으로선 축구로 부각된 역사적 감정이 폭력사태를 부르거나, 세우타를 내놓으라는 요구로 이어질까 경계할 법하다.
근거 없는 걱정은 아니다. 파리에서는 월드컵이 진행되는 동안 이민자 청년들이 거리로 뛰쳐 나와 소동을 벌였고 경찰에 무더기로 체포됐다. 모로코 팀을 이끄는 왈리드 레그라기 감독도 우려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모로코에서 프랑스의 식민통치가 반세기 가까이 계속됐지만, 알제리에서만큼 야만적이지는 않았다.” 두 나라 관계를 조명한 뉴욕타임스의 기사다. 모로코인들이 그걸 고맙게 생각할까? 프랑스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가며 차별받는 모로코인들이 고마워할까?
모로코가 프랑스의 공식 보호령이 된 것은 1912년이었다. 식민지가 아닌 보호령이었다지만 농지를 빼앗기고 항구 관할권을 빼앗기고 치안과 납세도 프랑스에 넘겨야 했다. 1차 대전때 프랑스는 모로코에서 4만명을 징집해 전쟁터로 보냈다. 이런 과정은 당연히 프랑스의 폭력, 학살과 함께 진행됐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모로코가 독립할 때에도 카사블랑카에서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고 당시 국왕은 대륙 반대편 마다가스카르로 쫓겨나야 했다.
미들이스트아이, ‘Morocco vs France: A history of pirate raids and brutal colonialism’
두 나라 관계가 과거에만 매겨있는 것은 아니다. 독립 뒤 하산5세 국왕은 프랑스 색깔을 지우고 ‘모로코화’를 추진했다. 그럼에도 양국은 대체로 우호적 관계를 맺어왔다. 한때의 점령자였던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양대 교역국으로, 모로코 수출액의 20% 이상씩을 각각 차지한다. 프랑스는 모로코에 가장 많이 투자한 나라다. 두번째 투자국 아랍에미리트(UAE)가 투자한 돈의 4배에 이르는 프랑스 돈이 들어가 있다.
미들이스트아이에 따르면 프랑스 CAC40 지수에 들어가 있는 기업 중 33개 기업이 모로코에 지사를 두고 있다. 모로코의 대도시마다 프랑스계 학교가 있고 중상류층 아이들은 거기서 공부한다. 인구 3분의1은 프랑스어를 말할 수 있다. 프랑스에 사는 모로코계는 150만명에 이르며 그 중 절반은 여전히 모로코 국적이다. 알제리 다음으로 프랑스에 이주자를 많이 보낸 비유럽국이다. 모로코 축구의 자부심을 한껏 드높인 레그라기 감독과 부팔 선수도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양국은 여전히 업종별 비자 쿼터를 놓고 다투는 사이다.
경기에서는 프랑스가 이겼지만 역사를 되새기는 모든 이들의 머리에는 모로코가 각인됐다. 카타르에서 빨강에 초록이 섞인 모로코 팀 유니폼과 국기가 최고 인기상품이 됐다고 한다. 모로코 대표팀, 일명 ‘아틀라스의 사자들’은 중동과 아프리카 전역에서 영웅이 됐다. 이미 아프리카 네이션스컵과 아랍컵 대회 우승 전력이 있지만 월컵 4강은 차원이 다르다. 유럽과 중남미에 속하지 않은 나라가 4강에 오른 것은 1930년 미국, 2002 한국과 이번 모로코 세 나라뿐이라고 한다.
알자지라, ‘Morocco shirts sell out as World Cup fever grows’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물론 아니다. 원체 축구 열기가 뜨겁다 못해 과격한 나라다. 코로나19가 수그러들고 2년만에 관중들이 스타디움에 들어갈 수 있게 된 지난 2월, 남서부 아가디르에서 현지 팀과 수도 라바트 팀 경기 때 팬들이 충돌해 수십명이 체포됐다. 얼마 안 가 옛 수도였던 유서깊은 도시 페스와 라바트 팀 사이에 다시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2016년 3월에는 카사블랑카에서 역시 축구장 충돌이 일어났다.
모로코 사회는 억압적이고 보수적이라고들 한다. 프랑스 점령 시절, 다른 지역의 기득권 엘리트들과 달리 모로코 왕실은 식민지배에 맞서며 국민들 편에 섰다. 이 때문에 독립의 상징이 됐고 지금도 국가적 구심점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전근대적인 절대왕정이 지금껏 이어져오면서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뒤쳐졌다. 딱히 자원도 없고 1인당 연간 실질GDP는 7000달러 수준에 그치고 있다. 낙후된 사회에서 미래를 보지 못하는 청년들은 바다 건너 유럽으로 가거나 축구장에서 폭력적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식민지배의 역사를 뒤집은 축구장 쾌거에 환호하면서, 정작 그들 내부의 소수는 억압한다. ‘서사하라’라고 불리는 지역에 사흐라위라는 소수민족이 산다. 이들은 분리독립을 외치며 모로코 정부에 맞서 무장 투쟁을 한 까닭에 가혹한 탄압을 받고 있다. 2019년 서사하라에서 모로코 군경이 대규모 체포작전을 벌여 사망자까지 나왔다. 아프리카컵 대회에서 알제리 대표팀의 승리를 축하한 것이 빌미가 돼 벌어진 일이었다.
‘아틀라스 사자들’의 도전은 끝났지만 모로코에는 진짜 도전들이 산적해 있다. 참, ‘베르베르 사자’ ‘북아프리카 사자’ 등으로 불리던 진짜 아틀라스 사자는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1960년대에 멸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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