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가 보는 세상/구정은의 '현실지구'

[구정은의 '현실지구'] USB로 애플 때린 유럽

딸기21 2022. 10. 8.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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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회가 4일(현지시각) 스마트폰을 비롯한 전자기기 충전 포트와 커넥터를 USB-C 타입으로 통일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4년부터 애플 제품에만 쓰이던 독자적인 충전장치는 유럽에서 팔지 못하게 됐다. 애플은 2년 안에 제품 디자인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랩톱은 2026년까지 충전 포트를 통일하면 된다고 유예기간을 좀 더 줬지만 결국 2024년 시한에 맞춰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다른 형태의 충전장치가 ‘불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전 모델을 다 폐기해버리면 환경적으로도 나쁘다. 그래서 다른 장치들의 ‘단계적 퇴출’을 유도하기로 했다. 어쨌든 디지털 기기마다 충전장치가 달라서 C타입, B타입, 애플 타입 전선줄을 줄줄이 늘어놓고 살아야 했던 소비자들에겐 반가운 소리다. 유럽에서 ‘강제 통일’이 시행되면 다른 지역도 결국 뒤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의 표준이 미국 전역의 변화를 이끌어내듯, 유럽의 새 조치는 세계의 휴대용 가전제품에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지역별 기기를 만드는 것은 기업들로서는 현실성이 없다.

An AirPower wireless charger is displayed along with other products during an Apple launch event in Cupertino, California, U.S. September 12, 2017. REUTERS


작고 납작한 B타입 커넥터는 지금 거의 사라졌고 새로 생산되는 것이 없다지만 C타입과 애플 타입의 공존은 소비자들을 은근히 짜증나게 만들곤 했다. 유럽의회는 이번 조치가 "유럽연합의 제품을 더 지속가능하게 만들고, 전자 폐기물을 줄이고, 소비자들의 삶을 더 쉽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초 EU 집행위원회가 내놓은 ‘통일’ 대상 디지털 장치는 7종이었는데 유럽의회는 13종으로 늘렸다. 유럽의회는 충전기 타입을 통일하는 것이 2억5000만 유로의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봤다. 시장조사 사이트 카운터포인트에 따르면 독일의 경우 인기 1~3위 스마트폰이 모두 아이폰 모델이다. C 타입을 사용하는 삼성 갤럭시폰은 4위와 5위다. 프랑스에서는 아이폰이 상위 4위에 랭크됐다. 애플의 인기가 높다지만 애플 제품을 쓰는 이들조차도 기기마다 제각각인 포트에는 불만이 많았다.

[로이터] Apple forced to change charger in Europe as EU approves overhaul

물론 유럽의 조치에 칭찬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무선 충전장치로 이동해가길 원했던 쪽에서는 이번 조치로 그런 혁신 노력이 줄어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라이트닝'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커넥터를 고수해온 애플은 지난달 유럽의회에 법안이 올라왔을 때 “한 가지 커넥터만 의무화하는 규제는 혁신을 억압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애플도 유럽의 움직임이 '어차피 닥칠 일'임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이미 라이트닝 대신 C타입을 도입한 아이폰 모델을 개발했고 내년에 시장에 내놓을 예정이라고 블룸버그 통신은 보도했다.

USB-C to Lightning Cable adapters are seen at a new Apple store in Chicago, Illinois, U.S., October 19, 2017. REUTERS


유럽의회의 법안은 당장 주가에 영향을 미쳤다. 애플에 충전 포트를 공급하는 ST마이크로와 인피니온 등 유럽 기업들의 주가가 올랐다. 이번 조치는 전자책 리더와 이어폰 등 여러 기기에 적용되기 때문에 삼성이나 화웨이 등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로이터는 예상했다.

C타입 진영은 당연히 환영했다. “C타입은 기기를 빠르게 충전할 수 있는 견고한 기술이고 이미 많은 기기에 채택된 장치다.” USB 기술표준을 만드는 USB임플리멘터스포럼(USB-IF)의 제프 레이븐크래프트 회장은 뉴욕타임스에 “열차는 이미 역을 떠났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 What Europe’s Universal Charger Mandate Means for You

지금은 충전용으로 많이 쓰이지만 당초 USB는 컴퓨터와 주변기기를 연결해 데이터를 전송할 목적으로 1996년 개발됐다. 케이블, 커넥터 등의 규격을 정한 일종의 산업표준으로서 USB-IF가 규격을 점검해 통일된 기준을 만든다. 커넥터 유형에는 지금까지 14가지가 있었으나 최신형인 C타입 말고는 모두 생산이 중단됐다. USB 버전 3.0은 2008년 11월에 공개됐고, 2019년 8월에는 버전 4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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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타입의 시대가 시작된 것은 2017년 9월에 출시된 버전 3.2 때부터다. 데이터 전송 속도를 높였고 대역폭도 증가시켰다. 기와에도 암키와, 수키와가 있고 너트와 볼트가 암수로 표현되듯 USB의 끝자락에도 암수가 있다. 컴퓨터 등에 장착된 콘센트, 혹은 '리셉터클'을 암컷으로 표현하고 케이블에 달린 수컷은 '플러그'라고들 부른다. 예전의 플러그들은 콘센트에 꽂는 방향이 정해져 있었지만 C타입은 위아래를 뒤집어 꽂아도 된다. 굳이 업계의 어려운 말을 쓰자면 ‘가역적 플러그’다.

USB - History & Timeline

전선으로 연결된 작은 ‘꼬다리’일 뿐이지만 전자기기의 생명 유지장치라고 할 수 있는 USB에는 장비회사들의 역사가 숨어 있다. USB를 만들려고 처음 머리를 맞댄 것은 IBM, 인텔, 마이크로소프트, NEC, 컴팩, DEC, 노텔의 7개 회사였다. 컴퓨터 ‘종가’로 불리던 IBM은 2005년 개인용컴퓨터(PC) 시장을 포기하고 장비업체로 살아남았다.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도 건재하다. 일본 회사인 NEC의 공식 명칭은 '니폰전기주식회사'로, 한때는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PC 회사였다. 반도체로 주전공을 바꿨다가 나중에 분사시켰고 전자제품 시장에서도 십수년 새 거의 손을 뗐지만 클라우드 컴퓨팅과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플랫폼 등으로 방향을 돌려 생존에 성공했다.

반면 1990년대에 PC 시장의 최강자였던 컴팩은 델과 치열한 시장 경쟁을 벌이다가 2002년 HP에 인수됐다. 다만 브라질과 인도에서는 제3자 라이선스 방식으로 여전히 컴팩 브랜드가 붙은 제품이 생산된다. 1957년 설립된 DEC는 컴퓨터 시장의 원조 중 하나였으나 기술발전을 못 따라가 1998년 컴팩에 먹혔다. 당시로선 컴퓨터 산업 역사상 가장 큰 합병이었다. 하지만 이 인수는 컴팩에도 독이 됐고, 결국 두 회사는 몇 년 차이로 운명을 같이 하고 말았다.

An overview of new naming scheme for USB 3.2. WIKIPEDIA


캐나다 회사 노텔의 역사는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창립된 '노던 전기회사'가 그 모체로, 한때는 토론토 증시에 상장된 모든 기업 평가액의 3분의1을 이 회사가 차지했다. 하지만 IT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내리막을 걷다가 2009년 파산했다. 캐나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 사건이었고, 2017년에야 법적 절차가 끝났다.

이 회사들의 명운이 엇갈리는 동안 애플은 뭘 하고 있었을까. USB의 전신 격인 ‘IEEE 1394’라는 것이 있었다. 고속통신과 실시간 데이터 전송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은 똑같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애플이 주축이 돼 일본의 소니, 파나소닉 등과 협력해 개발했다. 애플은 이 표준을 쓰는 인터페이스에 ‘파이어와이어’라는 이름을 붙였더랬다. 하지만 나중에 개발된 USB에 밀려 시장을 빼앗겼다. 결국 USB로 옮겨간 애플은 몽니를 부리듯 독자적인 커넥터를 고집했으나 이마저 퇴출될 판이다.

[EU 집행위] Antitrust: Commission sends Statement of Objections to Apple over practices regarding Apple Pay

사실 애플과 유럽 사이엔 그 말고도 갈등이 많았다. EU는 2016년 애플과 130억 유로의 거액이 걸린 법정 싸움을 시작했다. 아일랜드는 세금을 깎아주고 기업을 유치하는 것으로 EU 회원국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는데, 그 혜택을 고스란히 누린 것이 애플이었다. EU는 부당하게 세금을 면제해줬다면서 아일랜드가 130억 유로를 환수하도록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액수가 큰 만큼이나 관심도 컸다. 투자를 받는다며 기업들 세금을 깎아줘 사실상 자국민 납세자들 돈으로 기업을 먹여살리는 관행에 제동을 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역내 법인세율이 이익의 1%인데 아일랜드에서 애플은 2014년 이익의 0.005%에 해당되는 세금만 냈다. 4년을 끈 이 소송에서 2020년 7월 애플이 승소했으나 EU 측이 항소를 한 상태다.

Margrethe Vestager, the European Commission executive vice president in charge of antitrust enforcement, speaking about the charges against Apple, May 2, 2022. AP


2020년 6월 EU 집행위는 거대 테크기업들의 독점을 막아야 한다며 아이폰의 '애플페이'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올 5월에 애플을 제소했다. 아이폰의 결제서비스 방식이 애플페이를 쓸 수밖에 없도록 유도하고 있어, 경쟁 서비스에 불이익을 준다는 것이었다. 명분은 반독점이지만 유럽 대 미국의 고질적인 경쟁 속에서 불거진 분쟁이었다. 애플페이의 최대 라이벌은 미국 서비스인 페이팔이지만 유럽에서는 덴마크의 모바일페이, 스웨덴 회사가 만든 스위시, 벨기에의 페이코닉 같은 결제서비스들이 경쟁하고 있다. 애플페이를 둘러싼 소송은 수십억 유로의 벌금과 애플의 사업방식을 바꾸라는 명령으로 이어질 수 있다.

2019년 스웨덴의 스트리밍 서비스회사 스포티파이는 애플의 앱스토어 정책이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며 반독점 규정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4월 EU는 스포티파이의 손을 들어주며 애플을 제소했다. 인앱 결제에서 수수로 인하 같은 방식을 동원, 소비자들을 애플뮤직으로 유도하고 시장을 왜곡했다는 것이었다. 법원 판결에 따라 애플은 연간 매출의 10%, 최대 270억유로에 이르는 벌금을 물게 될 수 있다.


당시 집행위는 제소 방침을 발표하면서 애플의 ‘게임 정책’도 들여다보고 있다고 했다. 앱스토어를 무대로 한 애플과의 싸움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애플의 ‘앱스토어 횡포’에는 미국 기업들도 눈총을 보내던 차였다. ‘포트나이트’로 유명한 게임회사 에픽게임즈가 EU 법원에 애플을 반독점법 위반으로 제소했던 것이다.

[메가트렌즈] Apple Revenue 2010-2022 | AAPL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브랜드라는 애플의 지난해 매출액은 3660억달러, 약 520조원에 이르렀다. 그중 41%를 미국에서, 24%를 유럽에서 벌었다. USB 통일이라는 문제에서만큼은 애플에 명분이 없어 보인다. 꼬리를 문 소송과 신경전, 유럽과 애플의 싸움은 다음엔 어디로 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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