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마이클 돕스, '1991'

딸기21 2021. 6. 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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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작을 이제 다 읽었다!

 

 

1991 - 공산주의 붕괴와 소련 해체의 결정적 순간들 
마이클 돕스. 허승철 옮김. 모던아카이브.

 

저자의 집필은 <1991> <1962> <1945>인데 나는 시대순으로 읽었다. <1945>는 지겨웠다. 언젯적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이렇게 상세하게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1962>는 어떤 면에서는 더 재미있기도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저 그랬다. 아무리 저자가 '그 해가 중요했다'고 강조한들, 1962년을 '전후 세계가 형성된 해'나 '냉전 체제가 무너진 해'와 비슷한 비중으로 평가할 수는 없잖아? 극적인 요소들을 집어넣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이렇게 상세하게 알 필요까지야2'가 되었다.

 

반면 <1991>은 셋 중에서 가장 재미있고, 셋 중에서가 아니더라도 그냥 재미있었다. 첫째, 이 또한 30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는 점. 둘째, 다른 두 권은 역사적 기록들을 중심으로 복원한 것이지만 이 책은 저자가 직접 현장에서 취재하고 경험한 것들을 많이 담았다. 셋째, 내가 그냥 개인적으로 아프간 침공 등등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ㅎㅎ 다만 이 책은 냉전이 붕괴되고 몇 년 지나지 않은 1997년에 나온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의 상황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그 점이 재미를 더해주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1997년의 저자가 보았던 것과 실제 그 뒤에 일어난 것들의 차이랄까.

 

브레즈네프의 말과 행동은 신문의 1면을 장식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대개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 막강한 강대국이 된 소련의 국사를 돌보는 것은 둘째 치고 자기 몸도 추스르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브레즈네프는 모스크바에 있는 자택이나 크렘린 집무실에 거의 들르지 않았다.
가족 관계는 브레즈네프에게 짐이 되었다. 불량기 많은 딸 갈리나는 홍청망청한 생활과 미심쩍은 서커스 단원들과의 스캔들로 모스크바를 떠들썩하게 했다. 사위인 유리 추르바노프는 우즈베키스탄 목화 마피아의 얼굴마담이 되었다. 브레즈네프의 정확한 건강 상태는 크렘린이 가장 철저하게 감추는 비밀이었다. 비틀거리며 걷거나 발음이 새거나 멍한 표정을 짓는 걸 본 사람은 중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23쪽)

 

이 구절을 굳이 스크랩해놓는 이유는, 역시나 목화 때문. 우즈베키스탄의 목화..... 정말 할 말 많은 주제.

 

씨족 중심의 정치 구조, 거의 중세와 같은 생활양식, 90퍼센트에 달하는 문맹률을 가진 아프가니스탄은 노동자 천국으로 적당한 후보국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수도 카불에 붉은 기를 올린 지 18개월 만에 “혁명”은 좌초될 상황에 처했다. 이슬람 성직자들은 무신론자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항해 “성전”을 선언했다. 반정부 게릴라가 농촌과 일부 대도시를 장악했고 정부군은 와해되었다.
스스로 “4월 혁명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선언한 이상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는 여러 차례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 브레즈네프는 전차, 헬리콥터, 군사고문단 등 타라키가 원하는 대부분을 지원했지만 아프간 내전에 직접 관여하는 일에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얼마 안 가 타라키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쿠데타로 실각하고 테러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0월 9일 브레즈네프가 동베를린을 방문하고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훨씬 괴로운 소식을 듣게 된다. 타라키가 살해된 것이다.
1978년 11월 무렵 카불 주재 KGB 본부는 타라키를 살해한 하피줄라 아민을 권좌에서 강제적으로 끌어내려야 “혁명”을 살릴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결국 소련의 군사적 개입이 필요했다. 
(30-31쪽)
소련군은 국가적 자부심의 근원이고, 거대한 다민족 제국을 유지하는 도구였다. 100만 명이 넘는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리투아니아, 조지아의 18세 청년이 매년 2년간 의무 복무를 하기 위해 인종적 용광로에 들어갔다. 군대는 신병들을 훌륭한 군인으로 만드는 동시에 충성스러운 소련 인민으로 만드는 과업을 수행했다.
엔지니어 출신인 우스티노프는 군산복합체의 화신이었다. 33세에 스탈린에 의해 발탁된 그는 나치 독일군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무기를 소련군에 공급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군비 담당 인민위원으로서 군수시설을 유럽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로 옮기는 일을 감독한 것이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지 6개월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군수공장 1500개의 설비가 화물 기차 약 150만 량에 실려 약 1600킬로미터 동쪽으로 옮겨졌다. 이 일은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놀랄만한 조직적 위업이었고, 소련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우스티노프는 소련의 핵폭탄 운송체계 구축 임무를 감독했다. 한마디로 기병 시대에 머물러 있던 붉은군대를 핵무기 시대에 맞게 탈바꿈시킨 것이다. 1976년 우스티노프가 국방부 장관이 되었을 때 소련의 군수공장은 하루에 전투기 5대, 전차 8대. 대포 8문, 대륙간탄도미사일 1기를 찍어내듯 생산했다.
정치국 회의에서 우스티노프는 늘 군대에 더 많은 재원을 할당할 것을 요구했고, 원하는 것을 대부분 얻었다. 군비 지출로 소련 경제 자원이 바닥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도부에 있는 사람은 다 알았지만, 여기에 제동을 걸만큼 용기 있는 사람은 없었다.
(34쪽)
1980년 10월 자유노조가 창립된지 3개월 만에 쿠클린스키는 계엄령 선포를 위한 기초 작업을 위해 국방부 내에 편성된 비밀 실무단에 참가했고, 폴란드 정부를 겁박하려는 소련군 작전에 관한 최신 정보를 CIA에 상세하게 제공할 수 있었다.
12월 8일 자정 소련군 15개 사단, 체코군 2개 사단, 동독군 1개 사단으로 편성된 바르샤바조약군 18개 사단이 폴란드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큰 충격을 받은 야루젤스키는 집무실 문을 걸어 잠근 채 최측근도 만나지 않았다. 동독 병력이 작전에 동참한다는 사실이 특히 충격적이었다. 이 최후통첩이 실행되면 소련군이 독일군과 함께 반세기 만에 폴란드를 두 번이나 나누는 셈이었다.
폴란드를 재분할하려는 위협에 브레진스키는 화들짝 놀라 행동에 나섰다. 나치의 폴란드 침공 직전인 10세 때 폴란드를 떠난 브레진스키는 한때 고국이었던 나라와의 연을 대부분 끊었다. 그림에도 그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카톨 보이티와, 미국 국무부 장관 에드먼드 머스키, 이스라엘 수상 메나힘 베긴, 1980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체스와프 미워시 등으로 대표되는 눈에 띄는 폴란드 이민사회의 일원이었다. (자유노조 위기 내내 폴란드 이민 사회는 폴란드 문제에 대해 강력한 권한을 가진 국제적 싱크탱크 역할을 했다. 긴장이 아주 고조된 어느 한 시점에 요한 바오로 2세와 브레진스키는 폴란드어로 통화를 하며 의견을 주고받기도 했다.)
(93쪽)
서방 전문가들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같은 사람이 어떻게 러시아 지방의 무명 인사에서 벗어났는지 신기해했다. 잇따라 늙은이들이 서기장 자리를 차지한 뒤에 원고 없이 연설하고 부축을 받지 않고 걷는 소련 지도자의 모습 자체가 놀라웠다. 새 지도자가 60년 이상 공산주의 전통으로 신성하게 여겨온 생각과 관습에 도전하려 한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20세기 가장 지속성이 강한 전체주의 체제인 소련에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나왔을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엄청난 독재자의 그늘에서 자라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생을 보낸 정치인의 한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이 심각하게 시험받았지만 완전히 훼손되지는 않은 세대였고, 끝없는 정치적 도덕적 타협에 익숙한 세대였으며, 전임자들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끈기 있게 기다린 세대였다. 소련 공산당의 새 서기장은 “60년대” 세대의 꿈과 악몽, 힘과 실패, 믿음과 환상을 공유했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 2일 캅카스산맥에서 북쪽으로 뻗은 비옥한 스텝 지대에 있는 프리볼노예에서 태어났다. 러시아어로 “프리볼노예”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넓고 열린 공간과 자유였다. 북캅카스에는 두 가지가 다 있었다.
(177쪽)
레이건은 공산주의가 본질적으로 사악하다는 믿음을 절대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을 지지하는 보수파에게는 실망스럽게도 소련 지도부를 다루는 전술에는 변화가 있었다. 소련을 두고 세계 지배를 향한 광적인 열망으로 움직이는 “악의 제국”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레이건은 1984년 초에 이미, 모스크바에 대한 계산된 연설에서 “이반과 아냐”가 “짐과 샐리”와 함께 비를 피할 피난처를 같이 사용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생각했다. 레이건은 “공포 없는 세상” 만들기라는 보통 사람이 가진 “공동의 관심사”가 “모든 국경"을 초월하는 현상이라고 결론지었다.
레이건의 내적 갈등은 행정부 내의 균열로 나타났다. 한쪽에는 조지 슐츠 국무부 장관이 이끄는 실용파가 있었는데, 이들은 고르바초프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고 소련의 새로운 정치적 분위기를 이용하려 했다. 다른 한쪽은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부 장관으로 대표되는 이념파로, 모스크바의 변화를 대체로 허울뿐이라고 보고 군축협상의 실효성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었다. 레이건은 가슴으로는 이념파 편을 들었지만, 정치적 본능과 할리우드에서 숙달한 협상 기술에 대한 확신에 따라 진지한 대화의 시간이 왔다고 느꼈다.
(210쪽)

로널드 레이건은 비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거나 세부사항에 무관심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그런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 정적들은 레이건을 여러 번 과소평가했다. 레이건의 보좌관들은 평범한 정치인이 달성하거나 상상도 못할 것으로 보이는 목표를 겉보기에 큰 노력도 없이 달성하며 승승장구한 레이건의 능력에 몹시 놀랐다.
레이건과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이런 점은 설명하기 어려운 역설이었다. 1984년 세부사항에 집착하는 성격인 맥팔레인은 안보보좌관 자리에서 내려온 직후 감탄하며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은 아는 것이 거의 없지만 아주 많은 걸 이뤘다."
레이건이 소련을 상대하는 데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미국 정부 체제의 강점을 확고히 믿었기 때문이었다. 레이건은 소련이 의기양양한 상태라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전체주의에 비해 민주주의는 다원성으로 인해 훨씬 강한 정부 형태라는 사실을 육감적으로 알았다.
레이건은 공산주의의 종말을 알리는 곡소리가 이미 들린다고 본능적으로 믿었고, 그런 확신을 1982년 6월 영국 의회 연설에 표현했다. “역설적이게도 카를 마르크스가 옳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대하고 혁명적인 위기, 경제 질서의 요구가 정치 질서의 요구와 직접 충돌하는 거대한 혁명적 위기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마르크스주의를 택하지 않은 자유진영이 아니라,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고향인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216-217쪽)

 

어느 책에서 봤더라, 레이건은 '어깨를 으쓱'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무력화하는 재주가 있었다던 구절이 생각남.

 

볼셰비키 혁명 초기부터 소련의 권력은 공산당, 붉은군대, 보안 기관에 의존했다. 이 세 기둥 중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된 격동의 5년이 지나자 '보안 기관'만이 상대적으로 건재했다.
공산당은 소련 헌법 제4조가 보장한 정치 권력의 독점을 포기해야 했다. 스탈린 시대의 잔학성이 드러나자 낙담한 공산당 평당원들은 당에서 발을 뺐다. 한때 거대 단일체였던 통치 엘리트는 옐친 같은 개혁파가 이탈한 뒤 결집력을 상실했다. 군도 과거에 비하면 이름뿐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대실패, 대규모 징집 회피, 소련 변방 지역에서의 연이은 민족분쟁으로 군의 사기도 흔들렸다. 예산 삭감으로 크게 힘이 빠졌고 외부의 군사적 위협을 방어하는 일보다 폴란드와 동독에서 철수한 장교들의 주택 마련에 더 신경 쓰며 퇴각하는 군대가 된 것이다.
그에 반해 KGB는 국가의 “방패이자 칼”로서 거의 온전히 살아남았다. 안드로포프가 반체제 운동 탄압 임무를 맡긴 악명 높은 제5국은 헌법수호국으로 이름을 바꿨다.
(476쪽)

1991년 봄 모스크바에는 정권 말기라는 분위기가 있었고, 당관료들은 늦기 전에 배에서 뛰어내리려고 줄을 서고 있었다. 중앙위원회 조직에서 일하던 베셀롭스키의 동료 다수도 새로 부상하는 민간 영역에서 '전문가'나 '컨설턴트'로 새 직업을 찾았다. 1991년 4월 이후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모든 고위 간부는 각종 상업 활동에 관여했다.
이때가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과거에 공산주의 이념은 소련 엘리트의 권력과 특권을 정당화시켜주는 최후의 보루였다. 하지만 엘리트 다수가 이제 이념이 없어도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리하고 기민하기만 하면 낡은 공산주의 정권에서 누리던 지위를 새로 싹을 피우는 자본주의 질서에서의 편안한 위치와 바꿀 수 있었다.
(509쪽)
결연한 표정을 지은 노인이 계속 고함치는 소리가 왁자지껄한 소리를 뚫고 나왔다.
“옐친을 만나야 해.”
결국 침입자의 정체가 밝혀졌다. 노인은 세계적인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였다. 그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의 친분 때문에 브레즈네프 시대인 1978년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에서 첼로를 연주한 로스트로포비치는 조국 러시아의 자유라는 명분을 지키기로 했고 파리에서 쿠데타 소식을 듣고 가장 빠른 에어프랑스 비행기로 모스크바로 날아왔다.
입국비자 없이 도착한 그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재외 교포 회의에 참석하러 왔다고 국경경비대를 속여서 현장에서 입국비자를 발급받았다. 공항에서는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벨르이돔으로 달려왔다. 나중에 러시아공화국 의원들은 쿠데타 기간 중 벨르이돔을 공격하는 데 성공한 인물은 로스트로포비치 뿐이라는 농담을 했다.
옐친은 유명 인사가 자기 곁에 있는 상황의 상징적 의미를 금방 깨달았다. 그래서 64세의 첼리스트인 로스트로포비치에게 AK-47 돌격소총을 빌려줘서 5층 집무실 밖에서 당분간 경비를 서는 것을 허락했다.
(568쪽)

 

오옷... 대단한 음악가일세...

 

1989년 베를린 장벽에서 연주하는 로스트로포비치. Reuters

 

Mstislav Rostropovich At A Pro-Yeltsin Rally After The Failed Putsch In Moscow, Russia On August 22, 1991. Getty Images

 

첼리스트들에 관한(?) 옛날 글 하나 링크.

 

분쟁 속의 첼리스트 카림 와스피, 그리고 '전쟁 속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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