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불태우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촉발된 미국의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몇 달 째 이어지고 있다. 근래 그 중심이 되고 있는 곳은 오리건주 포틀랜드다. 그런데 이 시위를 향한 백인 기독교 보수파의 반감을 자극하는 동영상이 최근 퍼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도 ‘안티파’ 극좌 진영을 비난하며 이달 초 트위터로 문제의 영상을 공유했다. 테드 크루즈 등 공화당 극우파들이 가세하면서 논란은 더욱 확산됐다.
12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는 이 영상이 퍼지는 과정이 석연찮다면서 ‘러시아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다. 현장에서 그런 행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포틀랜드 시위대의 요구와는 관련없는 돌발행동이었는데 마치 그것이 시위의 핵심인 양 ‘편집’돼 퍼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언론들 대부분은 시위가 평화적이었다고 보도해왔다.
영상을 편집해 올린 것은 럽틀리(Ruptly)TV라는 영상뉴스 전문 매체다. 미국 CBS, 일본 NHK, 알자지라 등 세계 1400여개 매체에 동영상을 공급하고 있다고 회사측은 밝히고 있다. ‘성경 태우기 동영상’처럼 뉴스 라이브 영상을 찍고 편집해 대형 미디어들에 팔거나 개인 유료회원들에게 서비스한다.
2012년 독일에서 사업체 등록을 했고 2013년 4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2018년부터는 ‘럽틀리 패스’라는 이름으로 소규모 미디어나 기관들, 개인에게도 싼 값에 동영상을 공급하고 있다. 국제우주정거장(ISS)의 우주인 유영, 이란 핵협상 당시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과 독일의 ‘P5+1’ 대화 영상 등이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4월에는 영국 런던 주재 에콰도르대사관에서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안 어산지가 체포될 때 무려 엿새 동안 현장을 지키며 생중계를 했다.
베를린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럽틀리는 실제론 러시아 미디어 RT의 동영상 부문을 모체로 만들어진 것이다. 2017년부터 럽틀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디나라 톡토수노바는 RT의 영어뉴스 프로듀서 출신이다. 톡토수노바가 경영을 맡은 뒤 럽틀리는 ‘360도 파노라마 영상’에 스페인어, 아랍어 채널을 만들며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사실상 럽틀리의 모회사인 RT는 러시아 정부 돈으로 운영되는 국영 TV네트워크다. 2005년 ‘러시아투데이’라는 이름으로 창립됐고 2009년 RT로 이름을 바꿨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의 국내외 정책을 선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2012년 푸틴의 재집권에 반대하던 인권변호사 알렉세이 나발니가 시민들의 지지를 얻자 RT는 “미국 대사가 유학을 보내준 사람”이라며 가짜뉴스를 퍼뜨렸다. 그래서 당시 미국 대사가 트위터에서 RT의 보도를 공개적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뉴스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이 많이 제기돼왔음에도 RT는 계속 커지고 있다. 시청자는 대개 러시아인이지만 영어, 스페인어, 불어, 독어, 아랍어 웹사이트도 운영한다. 2014년에는 영국에서 RT-UK를 만들었고, 2018년부터는 ‘심층 풀뿌리 저널리즘’을 촉진한다며 베를린에 ‘레드피시 미디어’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영국, 독일 등은 유럽의 극우파를 부추기고 지원하는 러시아의 선거개입과 미디어 왜곡을 우려하고 있다.
럽틀리와 RT의 소유주는 ‘ANO TV-노보스티(Novosti)’라는 재단이다. ‘비영리기구’라고 주장하지만 러시아 정부가 만든 사실상의 국영 언론 관리기관이다. 푸틴은 대통령 3연임 제한에 걸려 총리로 내려온 2008년 이 재단을 러시아의 ‘전략적 핵심 기구’로 분류했다. ANO TV-노보스티의 존재와 운영방식은 푸틴 시대 러시아의 언론들이 어떻게 물고 물리는 소유관계 속에 크렘린의 뜻대로 움직이는지를 보여준다. 지난해 영국의 방송 규제당국인 오프컴(Ofcom)은 RT 보도가 공정성 기준을 위반했다며 소유주인 이 재단에 벌금을 부과했다.
푸틴은 7년전 유서 깊은 리아(RIA)노보스티도 해체하고 측근 인사들을 내세워 재편했다. 리아노보스티는 소련이 나치와 싸우던 1941년 만든 통신사다. 노보스티통신(APN)을 거쳐 노보스티정보국(IAN)으로, 리아노보스티로 이름이 바뀌면서 70년 넘게 존속해왔다. 소련이 무너진 뒤 공산당 통신사였던 이 매체는 정부 소유임에도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으로 부상했다. 그런데 2013년 12월 갑자기 해체됐다. 당시 리아노보스티는 웹사이트 톱기사에 “우리는 해체된다”며 스스로의 종말을 비통하게 보도했다. 그날 곧바로 크렘린 포고령에 따라 ‘러시아의 소리’ 라디오방송과 리아노보스티가 함께 해체됐으며 ‘로시야세고드냐’라는 회사가 두 미디어를 인계받았다.
이와 함께 리아노보스티는 러시아 국내뉴스를 전하는 통신사로 축소됐고, 해외 부문과 ‘러시아의 소리’가 합쳐져서 ‘스푸트니크’로 확장 개편됐다. 옛소련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푸틴 대통령의 의도가 담긴 이름으로 해석됐다. 푸틴 대통령은 스푸트니크와 RT 두 매체가 “앵글로색슨의 글로벌 정보 독점을 깨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사가 해체된다는 사실을 알리며 리아노보스티 기자들은 “국가의 미디어 통제 강도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려했던 대로 스푸트니크는 크렘린의 선전매체가 돼버렸다. 지난해 초 페이스북은 뉴스 페이지 수백개를 삭제했다. CNN 보도에 따르면 독립적인 뉴스사이트들인 척하고 있지만 이 사이트들을 실제 운영한 것은 스푸트니크 직원들이었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근거 없이 비방하며 트럼프 후보에 유리한 가짜뉴스들을 퍼뜨린 게 러시아의 이런 유령매체들이라는 지적이 많이 나왔다. 미국 온라인매체 데일리비스트에 따르면 스푸트니크가 유통시킨 뉴스 중에는 “버락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이 이슬람국가(IS)를 만들었다”는 것도 있었다.
러시아 선전매체들과 트럼프 대통령의 관계는 늘 의혹의 대상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후보를 맹렬히 지지한 온라인 매체 브레이트바트 출신의 극우 저널리스트 리 스트래너헌이 2017년 스푸트니크로 자리를 옮겼다고 보도했다. 그 해 스푸트니크 소속 백악관 출입기자였던 앤드루 파인버그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스푸트니크는 백악관 기자회견에서 계속 민주당을 둘러싼 음모론을 제기하도록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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