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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먼 다이슨, '과학은 반역이다'

딸기21 2018. 5. 2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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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 영국에서 수학을 공부할 때, 훌륭한 수학자인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는 나의 스승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어느 수학자의 변명>에서 일반인에게 수학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한 작가로도 유명하다. 하디는 응용할 데도 없는 아주 쓸모없는 추상적인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데 인생을 허비했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부의 분배에 불평등을 강화하는 쪽으로 기술이 발전하거나 삶의 파괴를 더 노골적으로 조장할 때, 흔히들 과학이 쓸모 있다고 말한다.' 사방에서 전쟁의 포성이 귀청을 찢고 있을 때, 하디는 이 말을 썼다." (42쪽)



다시, 프리먼 다이슨. 이번 책은 <과학은 반역이다>(김학영 옮김. 반니)인데, 서평과 에세이가 적당히 섞여 있다. 이전 책들에서 이미 읽은 에피소드들이 좀 겹쳐 있고, 내가 접한 적 없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책에 대한 리뷰가 많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다이슨 특유의 '신중한 낙관론'을 듣다 보면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긴다고나 할까.


가뭄이 들 때처럼 수분 공급에 제한을 받는 경우에는 이산화탄소량이 증가할수록 식물에게 유익하다. 식물은 잎에 있는 작은 기공들을 열어두고 이산화탄소를 포집한다. 이산화탄소 분자 하나가 기공으로 들어올 때마다 물 분자 100여 개를 잃어버린다. 따라서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충분하면 기공들을 다 열어둘 필요가 없기 때문에 수분의 손실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다.

태양빛이 내리쬐는 밭의 옥수수는 지상 1미터 이내의 이산화탄소를 5분 만에 모두 소비한다. 공기가 대류와 바람을 타고 계속 순환하지 않는다면 옥수수는 성장할 수 없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약 1/10이 해마다 여름에 생물량으로 전환되고, 가을에 대기 중으로 되돌아간다.

단기간에 생물학적으로 이용 가능한 탄소를 저장하고 공급하는 저장고는 다섯 가지가 있다. 수천 년이 걸려야 접근이 가능한 탄산염암과 심해는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겠다. 다석 가지의 저장고는 대기, 지상식물, 표층토, 해양식물이 성장하는 해수면, 마지막으로 화석연료 매장지다. 이중 최대 저장고는 화석연료 매장지이고 최소 저장고는 대기다. 하지만 실제로 다섯 가지의 저장고는 저장량에서 큰 차이가 없다. 모든 저장고는 서로 강력하게 상호작용한다. (89쪽)


전쟁에 동원됐던 다이슨의 책에는 늘 전쟁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영웅담도, 극적인 반전평화 운동도 아닌 담담한 전쟁 반대론.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영국이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철학적 바탕을 단적으로 표현했다. '젊은 시절에 매우 탁월한 미학적 환경에 압도된 적이 있는 소수의 사람과 박애주의자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영국인들은 해군 제독이나 프로 권투선수를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다.' 

이것이 군인으로서 명예를 추구하면서 결코 넘어서는 안 될 한계다. 훌륭한 장군이든 제독이든 더도 덜도 말고 뛰어난 권투선수만큼만 존경받아야 한다. 군인의 복종을 숭배하고 대량살상무기를 맹신하는 것은, 근대가 낳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다. 

...결국 영국은 전략폭격 시대의 문을 열었고, 미국이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1930년대에 이미 영국과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하시킬 길을 열어둔 것이다. 공군사령관들은 파괴를 열렬히 숭배했고, 그들이 활약한 대가로 우리는 지금까지도 파멸의 불안감 속에서 살고 있다.

전략작전 지휘관들과 그들에게 전략이론을 제공하는 민간 전략가들은 모두 잊지 말아야 한다. 제 3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날, 뉘른베르크의 피고석에서 바로 자신들이 최후변론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126-127쪽)


위에 스크랩해놓은 부분은 1984년 다이스의 책 <무기와 희망>에 실렸던 것이라고 한다. 아직 냉전 경쟁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 쓰인 것이라, 또 다른 세계대전을 불러올 무기의 공포를 언급하고 있다.


'정치강령으로서 평화주의가 나아갈 길'이라는 제목의 챕터에는 퀘이커 교도 얘기가 나온다.


퀘이커교가 이룬 불멸의 위업은 노예제 폐지였다. 18세기 내내 퀘이커교는 영국과 미국에서 이 힘든 싸움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아프리카 노예 수입에 종지부를 찍고 나중에는 모든 곳에서 노예 착취를 금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퀘이커교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첫째로 그들에게는 도덕적 확신이 있었다. 노예제가 도덕적 범죄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고, 그 확신으로 노예제에 반대했다. 그 다음은 인내심이다. 퀘이커 교도들은 실패와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할 일을 묵묵히 했다. 셋째는 객관성이다. 그들은 이 갈등에서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확한 자료와 객관적인 통계수치들을 신중하게 수집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에게는 타협의 의지가 있었다. 퀘이커교의 관심은 노예해방이지, 노예주의 처벌이 아니었다. 노예주들에게 굴욕감을 안길 이유가 없었다. 노예주들은 결국 자존심을 누르고 조용히 합의금을 챙겼다. 영국 정부는 서인도 제도의 노예주들에게 2000만 파운드를 보상했다.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치른 비용은 그보다 훨씬 더 컸다. (146-147쪽)


갑자기 퀘이커교를 거론하는 건, 다이슨이 늘 말하는 핵무기 폐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핵무기 폐지도 노예제 폐지와 맞먹는 규모의 일이다. 진짜 우려해야 할 일은 테러리스트의 수중에 들어간 한두 개의 핵폭탄이 아니다. 다수의 국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수천 개의 핵무기다.

반전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노예제 폐지를 성공시킨 사람들의 속성을 기억해야 한다. 노예제에 대항했던 사람들은 200년 전에 역사적 타협을 이뤄쟀고, 그 타협이 그들에게 승리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노예무역 금지에 모든 노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했고, 노예제의 전면적인 폐지는 다음 세대에게 양보했다. 노예제의 완전폐지 합의는 이끌어낼 수 없었지만 노예무역에 대해서는 도덕적, 경제적으로 이해를 같이 하는 세력들을 모을 수 있었다. 오늘날 평화운동에 필요한 교훈도 이것이다. 평화운동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쟁의 완전한 금지다. 모든 전쟁이 악이지만, 핵무기 사용은 더 악랄한 악이다. 핵무기 폐지가 전쟁을 금지하는 것보다 정략적 목표로서 실현 가능성이 더 크다. (148-149쪽)


쟁쟁한 과학자들을 둘러싼 얘기는 언제 읽어도 재미있음. 다이슨이 이전 책에서도 언급했던 아실로마 회의에 대한 부러움과 회한이 이 책에도.


조지워싱턴 대학의 물리학자 회의는 핵분열이 발견되기 오래 전에 조지 가모프의 제안으로 만들어졌다. 1939년 1월의 회의가 있기 두 주 전에 닐스 보어는 우연히 미국에 도착했다. 그는 유럽에서 핵분열을 발견했다는 최신 뉴스를 전했다. 가모프는 신속하게 회의를 개편해 핵분열을 주요 의제로 상정했다.
보어와 엔리코 페르미가 주요 연설자로 나섰다. 역사상 최초로 원자의 핵분열이 공개 석상에서 설명되었고, 원자폭탄이 야기할 수 있는 결과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나 실상은 회의에서 원자폭탄에 대해 그리 많은 이야기가 오가지 않았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 모두 원자폭탄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지만, 용기 있게 윤리적 책임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하자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의 후 몇 달 만에 미국에서는 보어와 존 휠러가 핵분열 이론을 밝혀냈고, 핵분열 연쇄반응의 가능성을 실험으로 입증한 국가들이 속속 등장했다. 폴란드에서는 요제프 로트블라트가, 러시아에서는 야코프 젤도비치와 유리 하리톤이 핵분열 연쇄반응이론을 알아냈다. 이 일련의 연구들은 모두 공개적으로 논의되었고 즉시 출판, 공개되었다.
1939년 여름은 핵무기 제작의 기선을 잡느냐 마느냐를 결정한 중요한 시기였다. 그때는 공식적인 비밀이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 페르미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표트르 카피차, 유리 하리톤, 이고르 쿠르차토프, 프레데리크 졸리오, 루돌프 파이얼스, 그리고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같은 각국의 주연급 과학자들은 공동의 행동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눴다. 

공동 행동방침의 첫 걸음은 보어와 아인슈타인이 맡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왜 행동하지 않았을까? 왜 두 사람은 너무 늦기 전에, 적어도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만이라도 핵무기 반대 여론을 모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만약 로트블라트가 두 사람을 다그쳤다면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36년 후, 비슷한 상황이 생물학계에서도 일어났다. DNA 재조합기술이 별안간 발견된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곧바로 아실로마에 모여서 이 위험한 신기술의 이용을 제한하고 규제하는 데 합의했다. 이 합의를 공식화하는 데는 맥신 싱어를 필두로, 몇 안 되는 과학자들의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1939년에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벌어진 일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169-171쪽)


아실로마 회의 이야기를 다이슨의 책 말고 싯다르타 무케르지의 <유전자의 내밀한 역사>에서 더 자세하게 읽은 것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스크랩을 해놓지 않으면 이렇게 사라지고야 만다.


1918년 6월, 제 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여름이었다. 69세의 펠릭스 클라인은 괴팅겐 대학에서 독일 산업계의 지도자들과 프로이센 정부 인사들을 상대로 강연하고 있었다. 그 강연은 '응용물리학과 수학의 진흥을 위한 괴팅겐 학회'의 본 회의에서 이뤄졌다. 클라인은 독일의 과학과 산업, 군이 조화롭게 협력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는 이 강연에서 현대적인 방식의 군산복합체가 처음으로 만개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프로이센 교육부 장관은 클라인에게 수학연구소 설립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5개월이 채 되지 않아 영광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독일 제국은 철저히 무너졌으며, 수학연구소 설립은 무기한 연기되었다. 1918년 11월부터 패배와 비통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정밀과학은 군산복합체와 함께 신망을 잃었다. 어찌어찌하여 마침내 괴팅겐 수학연구소는 문을 열었지만 클라인이 죽은 후였고, 독일 정부의 기금이 아닌 록펠러 재단의 달러로 설립되었다. (200쪽)


책과는 상관 없지만... 아이젠하워의 군산복합체 연설을 다시 떠올렸다. 프로이센의 '영광의 꿈'은 오래 지나지 않아 되살아났고, 군산복합체는 미국에서 꽃을 피웠으니.


뒤쪽에는 서평이 집중돼 있다. 피터 갤리슨의 <아인슈타인의 시계, 푸앵카레의 지도>(김재영, 이희은 옮김. 동아시아)를 엊그제 다 읽었는데 내겐 생각보다 많이 재미가 없었다. 



브라이언 그린의 <엘러건트 유니버스>와 <우주의 구조>에 대한 다이슨의 독후감은 눈길을 끈다. 


과학의 역사에는 항상 혁명론자와 보수주의자, 즉 단번에 웅장한 성을 지으려는 사람들과 탄탄한 땅 위에 벽돌을 하나씩하나씩 쌓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긴장관계가 있어왔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이 긴장관계는 대개 젊은 혁명론자와 늙은 보수주의자 사이에 형성된다. 현재에도 그렇고, 80년 전 양자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 나는 전형적인 늙은 보수주의자인데다 새로운 개념들에도 어두운 편이다. 내 주위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젊은 끈이론가들이 많다. 

1920년대는 양자이론의 황금기였고, 당시의 젊은 혁명가는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발견들을 이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폴 디랙이었다. 대표적인 늙은 보수주의자는 어니스트 러더퍼드였다. 그는 '저들은 기호로 게임을 하지만, 자연의 참모습은 우리가 밝힌다'는 유명한 말로 젊은 혁명가들의 사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50년 전, 내가 지금의 그린보다 대단히 젊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 초까지의 무렵에는 늙은이들이 혁명을 주창했고, 젊은이들은 보수를 자처했다. 아인슈타인, 디랙, 하이젠베르크, 보른, 슈뢰딩거가 늙은 혁명론자였다. 이들은 저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열쇠라고 생각하는 미친 이론을 하나씩 갖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통일장이론을, 하이젠베르크는 기본파이론을, 보른은 상호의존성이라고 명명한 새로운 버전의 양자이론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통일장이론의 새로운 버전인 최종아핀장법칙을 고안했다. 디랙은 기묘한 버전의 양자이론을 갖고 있었는데, 양전하만 두 개 또는 음전하만 두 개인 상태가 모두 존재할 확률이 있다는 이론이었다. 이들 다섯 명의 늙은이들은 25년 전쯤 자신들이 일으켰던 양자혁명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혁명이 물리학에 또 한 번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젊은이들은 저 유명한 늙은 학자들이 웃음거리가 되길 자처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우리의 대장은 미국의 줄리언 슈윙거와 리처드 파인만, 일본의 도모나가 신이치로였다.

파인만과 슈윙거 그리고 도모나가는 양자혁명으로부터 물려받은 물리학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그 물리학 개념들은 근본적으로 옳았다. 또 다른 혁명을 시작할 필요도 없었다. 세부적인 부분들을 말끔히 손만 보면 되었다. 나는 그 손보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가 빛(복사)과 물질(원자)의 상호작용을 설명한 양자전기역학이론이다. 그 이론은 한마디로 보수주의의 승리였다. 

이제 나의 세대는 현역에서 물러나고 있다. 과연 다음 세대는 무엇을 가지고 등장할 지 자못 궁금하다. 끈이론의 혁명가들이 늙은이가 된 후, 그 다음 세대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262-265쪽)


노과학자가 '젊은 혁명론자' 그린을 향해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과학에는 언제나 열린 채로 남아 있는 세 분야의 변경이 있다. 하나는 괴델이 열어놓은 수학의 변경이고, 또 하나는 복잡성의 변경이다. 분자와 세포, 동물과 뇌, 인간, 사회처럼 갈수록 복잡성이 더 커지는 대상을 연구하는 이 변경 역시 언제나 열려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리적 변경이다. 이 변경은 시공간의 팽창으로 점점 더 확장되는 미지의 우주를 뜻하며, 끝없이 열린 상태로 있을 것이다. 나는 결코 '우리는 다 이룬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될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 또 그러리라고 믿는다. (274쪽)


정작 책의 타이틀인 '과학의 반역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네. 너무 신동이라 아버지의 압박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노버트 위너 ㅇ야기 한 토막.


2차 대전 중에 위너는 공학자 동료 줄리언 비글로와 함께 대공포 제어 시스템을 설계했다. 위너는 전쟁의 승리에 보탬이 되는 일에 기꺼이 참여했다. 항공기 격추율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제어 시스템이 항공기가 날아갈 수 있는 구불구불한 여러 경로들을 계산해내야만 했다. 위너측도 개념은 최적의 예측 경로를 찾아야 하는 문제를 수학적 언어로 번역해주는 도구였다. 안타깝게도 미군은 위너-비글로 하드웨어를 제작하고 검증할 때까지 기다려줄 수가 없었다. 미군은 정교함에서는 조금 떨어지더라도 즉각 활용가능한 벨연구소 공학자 팀의 시스템을 선택했다.

1945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감행한 핵공격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위너는 격분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정부는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렀고, 핵폭탄을 제작한 과학자들도 재능을 부도덕한 목적으로 쓰도록 허락한 만큼 죄를 면키 어려웠다. 핵공격은 수년간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온 의심을 확증해주었다. 자신이 개발에 일조한 통신과 제어기술이 근본적으로 위험할 수도 있다는 의심이었다.

그때부터 위너는 정부나 기업과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주로 대중을 교육하고 신기술을 현명하게 다루는 방법을 알리는 데 전념하리라고 마음먹었다. 1947년 1월 위너는 '애틀랜틱 먼슬리'에 발표한 '과학의 반역자들 A Scientist Rebels'이라는 논평에서 정부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견해를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나는 앞으로 무책임한 군사전문가들의 손에서 훼손될 우려가 있는 연구는 발표하지 않을 것이다.' (312-3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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