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중동의 평화에 중동은 없다 - 촘스키의 젊은 시절 글들

딸기21 2005. 7. 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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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평화에 중동은 없다 Middle East Illusions (2003) 

아브람 노엄 촘스키 (지은이) | 송은경 (옮긴이) | 북폴리오 | 2005-03-07




책은 촘스키에 대한 책이 아니라 '촘스키가 쓴 책'인데 내 눈에는 책의 내용보다 촘스키가 더 많이 눈에 들어왔다. 1960년대부터 2002년까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촘스키의 글들을 묶었다. 

이-팔 문제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이 책을 찾아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의 내용 중 절반 이상은 오래전에 쓰인 것들이고, 심지어 1979년 이란 혁명 이전의 상황을 담고 있다. ‘미국의 대테러 정책에 대한 촘스키 보고서’라는 부제는 잘못된 것이다. 이 책은 이-팔 문제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다. 두루두루 미국이 세계에서 저지른 짓들을 고발해온 촘스키의 다른 책들과 비교해볼 때에도, 주제가 딱 한정되어 있는 ‘드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이 값어치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팔 분쟁, 혹은 시오니즘 자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꽤 내밀한 얘기들을 들을 수 있다. 내게 가장 큰 소득이었다면 이른바 ‘좌파 시온주의’(시오니즘 앞에 ‘좌파’라는 말을 붙이는 것에 뜨악해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혹은 초창기 시오니즘의 이상에 상당 부분 동조했던 촘스키의 젊은 시절 생각을 엿볼 수 있다는 것. 촘스키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키부츠 생활에까지 뛰어들었던 줄은 몰랐었다. 


책에서 나는 촘스키가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 '촘스키가 말하는 방식'에 더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비단 생각의 문제 뿐 아니라, ‘문체의 문제’ 다시말하면 '태도의 문제'와도 통한다. 앞뒤로 오래전 글들과 최근의 글들이 묶여 있기 때문에 그의 ‘문체’ 혹은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볼 수 있었다. 


과거의 촘스키가 던진 말들 중에는 이-팔 갈등에 대한 ‘우울한 예언’이 많이 눈에 띈다. 이것들이 눈에 띄는 것은 촘스키의 시각 속에 비관론과 회의주의가 배어있을지언정 열정 혹은 한가닥 희망 같은 것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그의 희망 대신 비관적인 전망이 들어맞았고, 우울한 예언이 현실화됐지만 말이다. 촘스키가 '열정에서 냉정으로' 바뀌어간 것은 자기 나라인 미국과 자기 민족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서 너무나 거대한 벽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촘스키의 '문체의 변화'는 그 자체가 이스라엘-팔레스타인-미국 '숙명의 트라이앵글'(이것 또한 촘스키 책의 제목)의 과거와 현재를 반영하는 것일 터이다. 


굳이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더라도, 희망과 열정을 안고 있던 한 지식인 청년이 패권국가의 횡포를 지켜보면서 실망하고 시니컬해지는 모습을 그대로 관찰할 수 있었고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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