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우붕잡억- 문혁과 지식인의 초상

딸기21 2004. 12. 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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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붕잡억 (1998)
계선림 .김승룡, 이정선 옮김. 미다스북스


'좋은 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다 읽고난 뒤 "아, 재밌었다!" 하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책장을 덮은 뒤에도 생각할거리가 뒤통수에 달라붙은듯 마음이 묵지근해지는 그런 책도 있다.  


이 책은 분명히 후자 쪽이다. 책을 집어들었던 초반에는 '지지부진한 노인네 잔소리같으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요점만 간단히' 하지 않고서 질질 끄는 것이 맘에 안들기도 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 '노인네 잔소리'가 마음에 걸려서 읽는 속도는 오히려 느려졌다. 다 읽은 뒤에는 뒤통수에 달라붙은 '생각거리'의 무게가 제법 무거워서 주체를 못하게 됐다.


우붕잡억(牛棚雜億). 문혁때 지식인을 잡아가두고 이른바 '노동개조'를 시켰던 헛간(외양간)을 우붕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붕에 갇혔던 저자가 우붕시절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낱낱이 드러내보이는 것이 이 책이다.


책에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 지식인의 회고'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문화대혁명, 그리고 '지식인'. 책의 화두는 이 두 가지다. 둘 중 어느 하나도 가벼운 것이 아닐진대, 아흔을 넘긴 '노지식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정제되고 또 정제되어, 천근의 무게를 가진다. 독일에서 인도학을 공부하고 베이징대에서 동양학부 교수로 평생을 보낸 저자 계선림은 중국에선 꽤 유명한 '지식인'이다. 자꾸만 '지식인'에 작은따옴표를 치게 되는데, 책의 3분의2 정도는 문혁 당시의 '인간 학대'를 서술하지만 뒷부분 3분의1은 '지식인론'에 촛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문혁 당시 사냥감이 됐던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잔혹함만을 보자면, '사람아 아 사람아' 같은 소설을 읽는 편이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보이듯이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시시콜콜한 우붕의 기억을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고, 또 거의 모든 단락이 반어법으로 구성돼 있어서 보다가 질리기 십상이다. 저자의 진면목, 그러니까 '노인네 잔소리'가 가슴을 치며 머리속에 들어오는 것은 뒷부분에 가서다.

저자는 '중국의 지식인'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지식인의 존재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체 지식인이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체면'과 '기개'같은 개념을 들어 중국 지식인의 역사적 기능을 소개한다. 노학자 스스로는 '정치적 감각이 없고 아둔했다'고 하면서도 지식인과 정치/사회를 분리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지식인의 존재의미 중에 '저항'이라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베이징대 부총장과 이러저러한 학술단체의 우두머리를 맡았다고 하는데, 저자의 글은 다분히 고전적이다. 문장도 고전적이고, 생각도 고전적이다. 일종의 '선비정신'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격랑의 세월 속에서도 아흔이 넘도록 그런 정신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의 글이기에 책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벼운 글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이의 글이 묶여 나온다는 것만 해도 반가운 일이다. 문혁에 대한 회고도 회고이지만, 뒷부분에 실린 저자의 '지식인론'은 학문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 법한 글이고, 더불어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띤 역자들의 '후기'도 읽어볼 만하다. 번역이건 편집이건 몹시 꼼꼼하게 성의를 기울인 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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