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근본주의의 충돌-지식인의 목소리

딸기21 2003. 8. 2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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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의 충돌 The clash of fundamentalisms (2002)
타리크 알리 (지은이) | 정철수 (옮긴이) | 미토 | 2003-03-08




타리크 알리, 라는 이름 때문에 책을 사놓았던 것인데 어째 표지나 제목이 주는 느낌이 좀 그랬다. 쿨 하게 보이지가 않아서 그냥 놓아두고만 있었다. 요사이 다시 '이슬람 주간'이라서 책장을 열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타리크 알리는 영국의 유명한 좌파 저널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장을 지낸 지식인이다. 그런데 그의 인생이란 것은 거의 '정체성의 충돌'로 점철돼 있는 듯하다. 

그는 누가 뭐래도 '이슬람권 사람'이다. 인도의 명문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무슬림이 아니다. 명문가의 좌파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무신론자 아들. 또 그는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에서 출생했지만 명문가의 아들답게 영국에 가서 공부한, 즉 식민통치의 아픔과 수탈보다는 특혜와 서구화의 혜택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사람이다(그는 어떻게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파키스탄이라는 나라가 독립을 했다. 알리네 집은 아마도 대단한 명문이었던 모양이다. 파키스탄 독립의 아버지 무하마드 알리 진나, 인도의 인디라 간디, 자와할랄 네루, 파키스탄의 군부독재자 지아 울 하크, 줄피카르 부토와 그 딸 베나지르 같은 당대의 정치가들이 모두 그의 '지인'에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알리는 이슬람세계에 속해있는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랍인은 아니다. 그의 가문의 토양인 인도-파키스탄은 무굴의 이슬람 문화와 인도 고유의 것들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므로, 이슬람 세계에서는 변방이라 할만하다. 어쨌든 그는 다양한 정체성의 갭들 사이를 넘나들었고, 이슬람세계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아주 폭넓고 냉정한 시각을 보여준다.

지적했듯, 알리는 무슬림이 아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은 세계 대부분이 이 제국(미국)을 '착한 나라'로 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작정이다"라고 밝힌다. 그는 종교적 근본주의 자체를 '근대성의 산물'로 정의하면서, "두 근본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아메리카 제국의 횡포를 비판하고, 또 이슬람 근본주의의 광기를 비판한다. 그 광기에 몸을 내던지고도 반성하지 않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 쪽이 워낙 신랄해서, 전세계의 무지한 친미주의자들보다는 '이슬람 동포'들에게 읽히기 위해 책을 쓴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내용에서 좋았던 것은, 앞서 지적한 알리의 독특한 내력 덕분에 '안에서 보는 바깥의 시선'으로 이슬람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점. 이슬람 주요 국가들의 지나온 사정을 구체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지적을 해놨기 때문에 도움이 많이 됐다. 덕택에 니자르 카바니의 시들을 읽게 됐으니, 그건 덤으로 얻은 수확. 

짧은 이야기 한 토막.

1920년대 카슈미르 지식인들이 농민들의 참상을 부각시킨 이야기 중 하나는 마하라자(왕)가 캐딜락을 구입한 일을 주제로 삼은 것이었다. 전하가 페할감으로 차를 몰고 갔을때, 감탄한 농민들이 자동차 주위로 몰려들어서 그 앞에 신선한 풀을 흩뿌려놓았다. 마하라자는 농부들이 자동차를 만지도록 내버려두었다. 몇몇 농부가 울기 시작했다. "왜 울고 있느냐?" 통치자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농부 한 명이 대답했다. "전하의 새로운 동물이 도대체 풀을 먹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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