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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딸기21 2003. 2. 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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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You Can't be Neutral on a Moving Train 
하워드 진 (지은이) | 유강은 (옮긴이) | 이후 | 2002-09-13


◆나는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객관성을 가장하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학생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아챘다. 이미 사태가 치명적인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여기서 중립적이라 함은 그 방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역사적 관점을 바꿔야만 우리의 어둠을 밝힐 수 있다. 금세기에 우리가 얼마나 자주 놀랐는지 유념해 보라. 민중운동이 갑자기 등장하고, 폭정이 뜻밖에 몰락하고, 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불씨가 돌연 되살아나기도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놀라는 까닭은 끓어오르는 조용한 분노나 최초로 들려오는 희미한 항의의 소리, 우리가 절망하는 와중에도 변화의 자극을 예시하는 곳곳에 산재한 저항의 조짐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놀라는 까닭은 억압된 표면 아래에는 언제나 변화를 가져오는 인간적 재료- 억압된 분노, 상식, 공동체의 필요성, 아이들에 대한 사랑, 다른 이들과 조화를 이루어 행동할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는 인내심-가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운동이 역사에 등장할 때 표면으로 튀어오르는 요소들이다.
사람들은 경험이 풍부하다. 그들은 변화를 바라지만 무력하고 고독하다고 느끼며, 다른 것들보다 웃자란 잔디 잎사귀가 되어 잘려나가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누군가가 첫번째나 두번째로 움직여 신호를 보내길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어떤 시기에서는, 대담한 사람들이 나타나 위험을 무릅쓰고 첫번째로 움직이고 다른 이들이 그들이 잘려나가지 않도록 신속하게 뒤따르게 된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러한 첫번째 움직임을 만들 수도 있다.

◆사건(Incident)
-카운티 컬린

한번은 옛 도시 볼티모어를 구경 다니며
가슴 가득, 머리 가득 기쁨에 넘쳤죠
그러다 볼티모어 토박이 하나 만났는데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더군요
전 여덟 살이었고 아주 작았어요
그 애 역시 더 크진 않았고요
그래 웃어 보였더니 아이가 혀를
날름 내밀고 나더러 "깜둥아" 하더군요
전 볼티모어를 샅샅이 구경했어요
5월부터 12월까지
그런데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 가운데
기억나는 건 단 하나, 그것뿐이예요

◆기차역에서 만나 함께 도쿄에서 교토로 고속열차를 타고 가면서 안내를 해준 이는 상냥한 얼굴에 온화한 매너를 지닌 츠루미 슌스케라는 철학자였다. 그는 하버드에서 수학했는데 진주만이 폭격당했을 때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경찰은 그를 거류 적국인으로 체포하여 보스턴의 찰스스트리트 교도소에 수감했다.
츠루미는 조사를 받았다. "일본 정부에 충성합니까?" 그는 대답했다. "아니오." "미국 정부에 충성합니까?" 그는 다시 대답했다. "아니오." 그러자 그들은 말했다. 무정부주의자로군. 당신은 계속 감옥에 있어야 할 것이오"

◆운동은 삶의 활기를 주는 힘이었다. 행진과 집회에서 십만 명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정부의 힘 앞에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낄 때에도 그러한 느낌조차 혼자만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말을 넘어서 전해졌다. 밥 딜런과 존 바에즈, 컨트리 조와 비틀즈를 듣고, 화가나 작가들과 같은 편에 서고, 백악관 야외파티에서 어사 키트가 전쟁에 반대하여 목소리를 높였다는 기사를 보고, 무하마드 알리가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하면서까지 당국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전쟁에 반대하는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을 듣고, 어린아이들이 피켓을 들고 부모와 함께 행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인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 자신의 대의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적들에게 포위된 소수에 불과했을 때, 운동에서 조우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아름다운 인간성이 미래를 표상한다고 상상하는 것은 피가 끓는 경험이었다. 언젠가 그러한 사람들의 세상이, 함께 일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으며 즐겁게 놀 수 있고 인생을 걸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도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인생의 첫 33년 동안 나를 둘러싼 세계는 이런 모습이었다. 실업과 열악한 일자리의 세계, 대부분이 시간을 비좁고 지저분한 곳에서 살면서 두살 세살 짜리를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기고 학교나 직장에 나가야 했고, 아이들이 아파도 돈이 넉넉하지 않아서 개인의사에게 데려가지 못하고 시간을 끌다 결국은 종합병원 인턴들의 손에 맡겨야만 했던 나와 아내의 세계.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이 나라에서조차 절대 다수의 국민들은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적절한 학위를 갖추고 나서 그 세계를 빠져나와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나는 결코 그 세계를 잊지 않았다. 나는 한번도 계급의식을 버리지 않았다.

◆좋지 않은 시대에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단지 어리석은 낭만주의만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역사가 잔혹함의 역사만이 아니라 공감, 희생, 용기, 우애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 복잡한 역사에서 우리가 강조하는 쪽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최악의 것들만을 본다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파괴될 것이다. 사람들이 훌륭하게 행동한 시대와 장소들을 기억한다면 행동할 수 있는 에너지, 그리고 적어도 이 팽이 같은 세계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가능성을 얻을 수 있다.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행동을 한다면, 어떤 거대한 유토피아적 미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미래는 현재들의 무한한 연속이며 인간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우리를 둘러싼 모든 나쁜 것들에 도전하며 현재를 산다면, 그것 자체로 훌륭한 승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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