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네 책방

스탠리 월퍼트, '인디아, 그 역사와 문화'

딸기21 2001. 11. 26. 11:53



인디아, 그 역사와 문화 - 역사명저시리즈 2 | 원제 India
스탠리 월퍼트 (지은이), 신현승, 이창식 (옮긴이) | 가람기획

   

대학교 2학년 때, 인도미술사를 한 학기 배웠었다. 우리 과의 교과과정 중에는 '동양미술사'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 있는데, 그 중 '동미 1'은 중국미술사이고 '동미 2'는 인도미술사이다. 그 해에 바로 임용되어 우리 과에 왔던 젊은 교수님은 국내에서는 가장 유명한 종교학자(이 분은 몇년 전에 돌아가셨다)의 아드님으로, 인도미술사를 가르치면서 미국에서 배워온 '다원주의'를 학생들에게 맛보이려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인도미술사 시간에 데이비드 린 감독의 '인도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를 봤다. 인도에 대해서도, 미술에 대해서도, 영화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별로 없었던 나는 거의...이해를 할 수 없었다. 마침 그 때 기숙사에서 나와 함께 지내던 룸메이트 언니가 인도종교-즉, 요가를 전공한 종교학과 대학원생이었는데 인도인 혼혈이라 해도 될 정도로 외관상 인도인과 비슷하고 인도에 푹 빠져있던 사람이었다. 이 언니(지나언니)는 방안에서도 인도 향을 피우고, 인도 그림(천에 그린 총천연색의 세밀화)과 인도 사진을 붙여두고, 거꾸로 서서 요가 수행을 하는 분이었는데 과연 그 학기의 나의 생활은 '인도의 香과 함께'라고 해도 될 만했다.

가끔 학교에 사리를 입고 갈 만큼 인도인이나 진배없는-틀림없이 전생에 인도인이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지나언니가 영화 '인도로 가는 길'에 대한 해석을 해주었는데, 풀이가 그럴듯했다. 영국 장교의 약혼자인 여주인공이 식민지 인도에 와서 인도의 미술(성애를 묘사한 카주라호의 사원조각 등)을 보고 자기 내면의 성적인 욕구를 느끼는 장면이 나오는데, 서양인들에게는 당시 인도의 저런 미술품을 통해서 性과 욕망의 분출을 느끼는 것이 곧 '인도를 발견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강석경을 비롯해서(지나 언니가 인도에서 강석경을 만났는데 이 작가는 인도의 '더러움'과 '메스꺼움'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돌아와서는 인도에 대한 소설이니 에세이나 동화책이니 쏟아내는 걸 보고 놀랐다) 인도에 대한 책이 여럿 나오고 인도 바람이 불고 또 주변에 인도에 다녀온 사람들이 제법 있지만, 나는 인도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나 궁금증을 가져본 적은 사실 없다.

'인도학'에 있어서는 석학 대접을 받는다는 미국 학자 스탠리 월퍼트가 낸 '인디아, 그 역사와 문화'라는 책을 최근에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며칠이 지났는데 서평을 올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막상 그러지를 못했다. 아주 맘에 드는 책이었는데, 생각이 정리가 안 됐다고나 할까.
아직 한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나는 '인도'라는 말을 들으면 사진에서본 갠지스강물에 몸을 담근 사람들이나 타지마할의 하얀 대리석이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라마야나를 소재로 한 총천연색의 그림이나 크리슈나를 그린 라지스탄의 그림들이 생각난다. 미술사 시간에 슬라이드로 본 그림이 머리 속에 너무 강하게 틀어박혀서 그런 걸까. 그 때 라마야나 요약본을 찾아읽었는데, 줄거리는 잘 생각 안 나지만 아주 재미있었다는 것은 기억한다. 까무잡잡한 남자와 여자, 나무 그늘, 원숭이, '브라흐마 다다 왕이 비나레스를 다스릴 적에'로 시작하는 인도의 민담들.
월퍼트가 들려주는 인도이야기는 그런 단편적인 이미지들을 쭉 꿰는 실과 같다. 인도의 자연과 신화, 종교, 사회상, 현대까지의 역사를 줄줄이 읊는데 쉬우면서도 재미있어서 노학자로부터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특히 이 사람은 인디라 간디, 네루, 진나 같은 인도의 대표 인물들을 직접 만났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인물평을 듣는 것도 재미있다. '네루의 얌전한 딸'에서 유능한 정치가로, 독재자로, 다시 '인도의 어머니'가 된 인디라 간디 이야기라든가 신념을 가진 지도자 네루 이야기 따위는 다른 역사책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증언이나 마찬가지여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또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의 분쟁을 다루면서도 몇년에 몇 명이 죽었네 하는 사실들만 나열해놓은 것이 아니라 배경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해놨다. 다만 90년 정도까지의 상황만이 담겨져 있어 그 이후 10년간의 역사는 업데이트 되지 않은 것이 아쉽긴 하다.

어느 한 나라, 그것도 인도처럼 거대하고 깊은 나라에 대해 저자가 보여주는 통찰력도 놀랍다. 통찰력은 기본적으로 식견에 비례하겠지만 월퍼트의 경우에는 인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또 하나의 바탕이 되는 것 같다. 애정과 거리두기를 동시에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저자의 뛰어난 문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