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는 최근 러시아 당국자들과 가즈프롬 관계자들의 말을 인용, 지나친 확대경영으로 덩치를 키운 가즈프롬이 정부와 구제금융 협상을 벌이는 처지로 전락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경제침체라는 혹한을 만나 기업 구제금융 예산으로 500억 달러 가량을 책정해놨는데, 그 중 90억 달러가 에너지회사들에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가즈프롬은 55억 달러를 지원해달라며 손을 벌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 구제금융이 미국과 유럽 등 세계 각국 정부의 주요 사업이 되고 있지만, 거대 에너지 기업이 이번 경제위기로 구제금융을 받은 사례는 없었다.
러시아 경제의 상징, 가즈프롬
한때 엑손모빌과 제너럴일렉트릭에 이어 시가총액 기준 세계 3위 기업에 등극했던 가즈프롬의 성패는 러시아 경제의 오르내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즈프롬은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회사이자 러시아 최대 기업이다.
그러나 이 회사는 단순히 ‘러시아 최대기업’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10여년 전 부채의 늪에서 허덕이던 러시아를 다시 강대국으로 부활시킨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의 정치 도구이자 외교 수단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20003년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가즈프롬은 러시아에 오일달러, 아니 ‘가스 달러’를 모아들이는 돈줄이었다.
가즈프롬은 푸틴이 대통령이던 8년 동안 러시아 경제를 살린 공로자였고, 러시아 경제의 부활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옛소련 붕괴 이후 연방 재산을 거덜낸 올리가르히(과두재벌)들을 몰아내고 민영화됐던 기업들을 재국유화한 푸틴은 국부의 원천인 에너지 산업을 가즈프롬 밑으로 통합시켰다. 가즈프롬(천연가스 생산)-로스네프트(석유 생산)-트란스네프트(가스·석유 수송) 등 부문별로 대략적인 역할분담이 되어있기는 하지만 그 핵심은 가즈프롬이다.
러시아는 석유매장량과 생산량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밀리지만, 천연가스 매장량에서는 47조5700억㎥로 단연 1위다. 2위 이란(26조8500㎥), 3위 카타르(25조6300억㎥)의 매장량을 합친 것과 거의 맞먹는다.
가즈프롬은 러시아 최대 산업인 천연가스 생산의 90% 이상을 맡고 있는 거대기업이다. 천연가스 외에도 석유회사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다. 특히 2005년 석유회사 시브네프트의 지분 72%를 매입해 ‘가즈프롬네프트’라는 계열사로 만들면서 세계 에너지업계의 강자로 떠올랐다. 에너지 뿐 아니라 은행·보험·언론·건설·농업 등 곳곳에 발을 뻗치고 있다. 불가리아 에너지회사 토페네르고, 독일의 아그로가스, 스위스의 발틱LNG, 터키의 보스포러스가스, 벨로루시의 벨가즈프롬방크 등 유럽권 160여개 회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
푸틴의, 푸틴에 의한, 푸틴을 위한
1989년7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옛소련의 석유-가스 부문을 통합해 가즈프롬을 만들었다. 가즈프롬이라는 이름은 ‘가조바야 프로미슐레노스트(가스산업)’의 약어에서 나왔다. 93년 보리스 옐친 정부는 국영기업들을 내다팔면서 가즈프롬도 민영화했다. 그리고 가즈프롬이 뒷주머니라도 되는 양 정치자금을 뜯어냈다. 뒤를 이어 집권한 푸틴은 경제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가즈프롬 옛 경영진을 숙청하고, 이사회를 자기 측근들로 물갈이했다.
2001년11월 Novyi Urengoy 의 가즈프롬 생산현장을 시찰하고 있는 푸틴/사진 GAZPROM 웹사이트
이 회사가 푸틴에게 어떤 의미를 띄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바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현 대통령이다. 메드베데프는 제1부총리였던 2006년부터 가즈프롬의 이사회장을 지내면서 푸틴의 뜻을 관철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2008년 5월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이 되자 푸틴은 총리로 내려앉았고, 푸틴 직전에 총리를 지냈던, 역시 푸틴의 수하 격인 빅토르 주브코프가 가즈프롬 이사회장으로 옮겨갔다. 알렉세이 밀러 부회장 겸 최고경영자는 푸틴이 상트페테르스부르크 시에 근무하던 시절부터의 측근이다.
가즈프롬은 직접적으로 푸틴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복무했다. 가즈프롬 계열사인 가즈프롬미디어는 민영 언론사 지분을 매입해 러시아 미디어산업을 장악했다. 2001년에는 푸틴에 밉보여 구속됐다 망명한 미디어재벌 블라디미르 구신스키의 NTV를 사들여 푸틴에 안겨줬다. 이즈베스티야, 코메르산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 러시아의 유명 일간지들은 모두 가즈프롬 수하에 들어갔고, 이들 신문들은 지난 대선에서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또 가즈프롬은 러시아가 유럽을 상대로 에너지 위협을 가하는 도구로도 쓰였다. 동유럽 옛 공산국가들과 중앙아시아 국가들, 그리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은 러시아산 가스에 에너지의 25~100%를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가즈프롬 빌딩
가즈프롬에 돌아온 부메랑
가즈프롬은 이처럼 푸틴의 기업이기에, 크렘린이 정략적으로 이용해온 도구이기에 10여년 동안 덩치를 부풀릴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그 때문에 역풍을 맡고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가즈프롬의 시가총액은 2008년 한 해 동안 67%나 하락, 850억 달러로 내려앉았다. 회사 규모는 세계 35위로 떨어졌다.
가장 큰 문제는 495억 달러에 이르는 부채다. 부채가 이렇게 늘어난 것은, 푸틴이 대통령이던 시절에 기업들 사들이면서 막대한 돈을 썼기 때문이다. 시브네프트를 매입할 때 들인 돈만 해도 130억 달러였다. 2006년에는 셸로부터 사할린 2광구 원유·가스전 채굴권 지분을 70억 달러에 사들였다.
이듬해에는 부도난 민간 에너지회사 유코스 자산을 매입하는데 수십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원래 유코스는 신흥 석유재벌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가 세운 사기업이었다. 그러나 호도르코프스키가 푸틴에 맞서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나서자 크렘린을 곧바로 그를 탈세혐의로 구속하고 유코스를 공중분해했다. 그 뒤처리를 가즈프롬이 떠맡은 것이었다. 이처럼 푸틴의 정치적 이익에 동원되었던 결과가 경제위기 시대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세계 경제침체로 인해 내년 에너지·원자재 값은 하락세를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가즈프롬은 올해 서유럽에 1000㎥당 평균 420달러에 가스를 수출했다.
하지만 내년엔 수출가격이 260~300달러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최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함께 천연가스 카르텔 성격의 가스수출국포럼(GECF)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천연가스 값이 당장 올라갈 것 같지는 않다. 에너지 수출로 번 돈 중 상당액을 정권 유지에 써온 푸틴이 이번 위기를 어떻게 이겨낼지, 가즈프롬은 어떻게 위기를 헤쳐나갈지 주목된다.
'딸기가 보는 세상 > 유럽이라는 곳'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일군, 프랑스 주둔... 2차 대전 이래 처음 (0) | 2009.02.03 |
---|---|
러시아 반정부 인사들 잇달아 피살 (0) | 2009.01.20 |
'부조리극의 대가' 해럴드 핀터 사망 (0) | 2008.12.26 |
'왕의 귀환'과 사르코지의 미래 (0) | 2008.12.17 |
러시아 "시위 안돼" (0) | 2008.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