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보르네오라 부르는 동남아시아의 거대한 섬에는 세 나라가 존재한다. 이 섬의 북부는 말레이시아 영토이고, 말레이시아로 둘러싸인 해안에 점처럼 박힌 소국 브루나이가 있다. 그 밖에 남부 대부분 지역은 인도네시아 땅이다. 이곳을 가리켜 깔리만탄이라고 부른다. 아마존과 함께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열대우림이 있는 곳이다.
밀림을 찾아 깔리만탄 남쪽 작은 도시 빵깔람분으로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여러번 갈아타야 했다. 지난달 말 인도네시아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자와(자바)섬 중부 스마랑에 내려 덜덜거리는 작은 비행기를 이용해 해협을 건넜다. 비행기 안에서 혹시나 깔리만탄의 밀림을 내려다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보았지만, 빵깔란분 공항에 내리는 순간 기대는 사그라들었다.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남부 빵깔란분 일대에서는 화전과 목재채취, 플랜테이션에 밀려 숲이 베어져나간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나무를 불태워 없애고 팜오일(야자유) 농장을 만들어 묘목을 심어놓은 모습.
검은땅의 모자이크
깔리만탄의 웬만한 지역들은 밀림이 다 베어져 거대한 잡초들이 자라는 덩굴숲이 되었거나, 팜오일(야자유)을 생산하기 위한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나마 푸른 빛깔이 살아있는 곳은 다행이고, 화전으로 불태워진 검은 땅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지난해 태운 땅과 새로 태운 땅, 숯처럼 검은 땅과 눈이 번쩍 뜨일만큼 유난히 붉은 땅, 표백을 한듯 흰 백토지대, 잡목과 덤불의 푸른 빛깔이 섞여 빵깔란분 주변은 색색깔 모자이크처럼 보였다.
빵깔란분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유명한 보르네오의 밀림이 어디에 있냐고 물으면 "밀림은 말레이시아 국경 근처 산지로 가야 한다", "이젠 내륙에서 수백 ㎞를 가야만 밀림이 나온다", "이제 여기서 원시림, 처녀림을 보는건 힘든 일이다"라는 대답들만 돌아왔다.
깔리만탄 일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토탄(Peat) 지대다. 이탄(泥炭)이라고도 부르는 토탄은 나뭇잎들이 오랜 세월동안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숯덩어리 흙을 말한다. 주민들은 이 가연성 토탄지대에서 나무와 풀을 태워없애고 화전 농사를 짓는다. 빵깔란분 주변에 있는 까랑안냐르 마을을 찾아갔다. 곳곳에서 시커멓게 그을린 땅 위에 덤불들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흙길 가엔 `토지관리부 관할지역'이라는 표지판이 선명했지만 화전과 불법 벌목을 관청에서도 눈감아주고 있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곳곳에 저렇게 불탄 땅 투성이.
아룻강변의 수상가옥들.
물에 터전을 두고 사는 사람들.
토탄지대에 솟아오르는 연기
토탄지대에서 화전을 하면 대규모 산불로 번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 지역에서는 비가 와도 땅 속 1m 깊이에까지 불씨가 숨어있어 잡히지를 않는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토탄층 화전을 주지사령으로 금지시켰다지만 사실상 통제 불능 상태인 것으로 보였다. 한국 교민 김준형(29)씨는 "여기서 깔리만탄 내륙 중심지 빨랑까라야까지 이르는 길에는 건기만 되면 길섶에 뻘건 불씨들이 깔려있는 걸 볼 수 있다"고 말했다.
1999년 이후 해마다 반복되는 연무사태는 화전과 자연 산불 두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 때문에 산림의 자연 발화(發化)가 많아진데다 화전도 줄어들지 않으면서 화재 규모가 커지는 것. 인도네시아 국제임업연구센터(CIFOR)에 따르면 깔리만탄의 토탄 지대는 지구 지질에 내장된 탄소량의 21%를 갖고 있다. 이 탄소덩어리의 두께는 최대 깊이 20m에 이른다. 숲을 베어내거나 태워없애면 토탄 흙의 탄소가 대기 중으로 방출돼 지구온난화를 일으킨다.
비가 오자 잿물 섞인 시커먼 웅덩이들이 곳곳에 파였다. 예전에 길 역할을 했다는 수로가 집들 사이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자카르타는 개발붐에 마천루가 솟아올라 선진세계 어느 도시 못지않지만, 깔리만딴으로 넘어오면 시간의 흐름은 역류해버린다. 국내선 공항이 있는 빵깔란분도 크기가 시골 읍내 수준이고, 큰길을 벗어나면 나룻배로 수로를 오가는 사람들 투성이다. 전력 공급이 턱없이 부족해 밤이면 불빛이 사라져버린다.
강우 패턴 달라지고 바닷물 역류
이 일대의 밀림이 중요한 것은, 말 그대로 `지구의 허파'이기 때문이다. 허파가 상하면 숨을 쉴수 없듯 아마존과 보르네오의 거대한 밀림이 파괴되면 지구 전체 탄소순환체계가 무너진다. 깔리만탄의 밀림이 남벌과 화전으로 사라지면서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로 인한 기후변화의 영향을 이곳 사람들은 부메랑처럼 고스란히 돌려받고 있다.
건기와 우기의 구분이 흐려지고 강우 패턴이 바뀐 것이 가장 두드러진 변화다. 우기엔 매일 한차례씩 열대성 소나기(스콜)가 오고 건기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비가 내리는 것이 오랜 패턴이었다. 하지만 지난해엔 비가 아예 오지않는 초(超)건기가 왔고, 올해엔 건기의 시작을 앞두고 하루에도 8시간씩 비가 내리는 이상한 우기가 찾아왔다. 빵깔란분 일대를 흐르는 아룻강에는 양쪽 강둑에 수상 가옥들이 늘어서 있다.
이곳 주민들은 수도도 전기도 없이 강물을 먹고 마시며 살고 있다. 그런데 지난해엔 가뭄 때문에 바닷물이 역류해 들어왔다. 근래엔 악어 같은 파충류가 뭍으로 자주 올라오는 것이 목격됐다고 한다. 강가에 자리잡은 붕우르 마을에서 만난 구나완(59)씨는 무너져가는 판잣집에서 자식들이 도(盜) 벌목을 해 가져오는 돈으로 살고 있다. 빗속에서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던 그는 "요샌 강에 고기가 줄고 크기가 작아졌다"며 아쉬워했다.
연례행사가 된 대(大)연무
한국계 임업회사 코린도 합판사업본부의 허광복 빵깔란분 본부장은 1980년대 초반부터 20여년간 이 일대의 변화를 지켜봐왔기 때문에 기후변화를 실감한다고 했다. 허본부장은 "작년엔 합판공장 용수를 구하러 강 상류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며 "비오는 시기와 양을 예측하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열대우림의 나무들은 바람이 세지 않아 표토층에만 뿌리를 내리는데, 몇년 새 바람이 강해져 나무가 쓰러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1979년 자와섬에서 이주해왔다는 밤방(48)씨는 "처음 왔을 땐 곳곳이 길도 없는 밀림이었는데 요샌 숲이 없다"며 "목재를 실어나르던 길에 이젠 `사윗'(야자)을 따러가는 팜오일 농장 노동자들만 다닌다"고 말했다.
엘니뇨가 극심했던 1998년 칼리만탄에서는 엄청난 화재가 일어났다. 동남아 일대를 뒤엎는 연무(燃霧) 사태는 이후 연례 행사처럼 굳어졌다. 지난해 가을에는 연무 때문에 한달 가까이 몇m 앞이 안보일 지경이었고 비행기도 모두 끊어졌다고 한다. 주민들은 몇년새 산불이 잦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삼림을 파괴하는 화재에다가 토탄 지대에 묶여 있던 탄소들까지 새어나와 지구 대기에 이중의 부담을 지우고 있는 셈이다.
인도네시아 중부깔리만탄주(州) 코타와링인바랏군(郡)의 시야흐라니(사진) 환경과장을 만나 삼림 파괴 실태와 화전 문제 등에 대해 들어봤다. 코타와링인바랏의 삼림 면적은 공식적으로는 66만1281ha로 전체 토지의 56%에 이른다. 아쉽게도 삼림 면적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공식 자료는 없었다. 현재 남아있는 삼림이 전체 땅의 절반이 넘는다는 말에, 취재를 도와준 통역은 고개를 흔들었다. 믿기 힘든 수치라는 것.
시야흐라니 과장도 삼림 파괴가 심각하다는 것은 인정했다. 숲이 줄어드는 원인으로는 팜오일(야자유) 농장이 늘어난 것과 화전을 들었다. 팜오일 농장은 이 지역 전체 토지의 20% 가까은 19만6750ha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숲을 밀어내 야자수를 심는 플랜테이션이 확대된 것은 1990년대부터. 페인트를 비롯해 수많은 식품과 공업제품에 들어가는 팜오일은 중국과 인도의 경제성장 등에 힘입어 세계적으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그 주된 공급원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즉 보르네오섬이다. 코타와링인바랏 군의 남쪽에 위치한 빵깔람분 일대에서는 다국적 생명공학기업 아스트라가 운영하는 면적 6만8600ha의 구눙 농장을 비롯한 야자수 밭들이 펼쳐진 모습을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시야흐라니 과장이 내준 자료에 따르면 화전은 정부의 금지조치를 완전히 무색하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코타와링인바랏 인구 20만5000여명 중 절반이 화전에 의존하는 저소득 농민들이다. 한 해에 1만2000ha 정도가 화전으로 파괴되는데, 돌아가며 화전을 하기 때문에 실제 화전으로 파괴돼 몇년간 복구 불가능한 면적은 그보다 훨씬 넓다. 시야흐라니 과장은 "정부는 토탄지역 화재를 막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사실 장비도 예산도 없다"며 "화재에 대비한 저수지 건설과 농민 정착프로그램도 재원이 없어 손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깔리만탄 삼림 벌목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세계적인 목재 공급처. 네덜란드 식민지가 됐던 수세기 전부터 벌목 계속돼왔다. 그러나 토탄지대 숲을 벌거숭이로 깎아내 `탄소 공장'으로 전락하게 만든 빼놓을 수 없는 주범은 수하르토 독재정권. 1970∼80년대 식량자급정책의 하나로 깔리만탄 중부 숲을 베어내고 논을 만드는 이른바 `메가 라이스(Mega-Rice) 프로젝트'를 추진한 것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수하르토 정권은 이 계획을 대대적으로 선전해 1985년에는 세계식량농업기구(FAO)로부터 공로상까지 받았다. 그러나 막대한 국가 예산을 들여 내륙의 숲을 베어내고 관개수로를 만들었지만, 중부 깔리만탄 일대는 토탄지대 땅이어서 벼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무려 50만ha의 땅이 이 어이없는 계획 때문에 벌채됐고 쓸모없는 관개수로 4600㎞가 생겨났다. 이 공사비는 인도네시아 산업계를 장악하고 있던 수하르토 족벌과 측근들 수중으로 대부분 흘러들어갔다. 전체적으로 이 계획 때문에 황폐해진 땅은 100만ha에 이른다. 열대우림은 치명상을 입었고, 그렇지 않아도 멸종 위기에 몰려 있던 오랑우탄이 이 계획 때문에 5000마리 이상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하르토 정권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인구밀도가 높은 자와섬 주민 6만명을 깔리만탄으로 이주시키기까지 했으나, 농사가 무위로 돌아가면서 이주민들은 그대로 화전민 혹은 불법 벌목꾼이 됐다. 1998년 수하르토 대통령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쫓겨난 뒤 자리를 이어받은 바하루딘 유수프 하비비 대통령은 메가라이스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현지 삼림 정책을 지방 정부들로 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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