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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딸기21 2018. 8. 2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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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읽은 책들 중 최고이고, 아프리카에 대한 책들 중에서도 손꼽을만한 책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책들 자체가 손꼽을만한 숫자이긴 하지만.


존 리더의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AFRICA: A BIOGRAPHY OF THE CONTINENT>(남경태 옮김. 휴머니스트). 읽은 지는 한 달 정도 됐는데 스크랩을 못 했다. 워낙 방대한 양이기에 그랬던 걸로 해두자. 실은 방금 전 크롬이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2시간 동안 정리한 것도 날려먹었어 ㅠㅠ 



앞부분 절반은 지구 대륙의 형성에서부터 시작해 인류의 탄생과 진화, 문명의 탄생까지 기나긴 역사를 다룬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부터 시작해 거기서 오랜 세월 살았으니, 이 대륙의 역사의 상당부분이 인류의 역사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유럽인들이 오고 그들에 조응한 노예왕국들이 생겨나고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독립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생기는 과정은 그 이후의 절반 정도에 걸쳐 소개된다. 


엄청 재미있다. 지질학과 고고학, 역사학과 정치학이 모두 들어있다. 풍성한 이야기를 들은 기분, 혹은 알차고 충실한 강의를 들은 기분. 저자는 사진기자로 아프리카에 오래 있었다고 한다. 영국 태생이지만 아프리카인들을 주체로 놓고 서술한 것이 무엇보다 눈에 띈다. 남아공의 백인들처럼 '아프리카 정체성'을 가진 것 같다. 백인들의 아프리카 정체성은 그 자체로 큰 이슈이니 이만 생략.


나는 앵글로색슨 백인 남성으로, 런던 택시 운전기사의 아들이다. 1955년 7월 흐린 월요일 오후에 나는 로열앨버트 부두에서 8000톤급 화물선을 타고 아프리카로 출발했다. (케이프타운에서 8년, 나이로비에서 10년을 보내고) 나는 사진기자로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를 두루 여행했다. 비아프라 분리주의 세력을 진압하러 진격하는 나이지리아 군대를 보았고, 톰 므보야와 크와메 은크루마가 죽는 것을 보았고, 밀턴 오보테가 축출된 다음 날 이디 아민과 악수를 나누었다. 또한 줄리어스 니에레레, 조모 케냐타, 헬렌 수즈먼, 앨런 페이턴, 스티브 비코, 가차 부텔레지, 이언 스미스를 만났다. 모부투 장군과 그의 가족을 따라 교회에도 갔다. 하일레 셀라시에의 팔순 생일잔치에 참석했고, 난민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았고, 나일 강을 따라 여행했고, 콩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오카방고 삼각주를 횡단했고, 칼라하리 사막을 건넜다. 메리 리키가 360만년 전에 살았던 인류 조상의 화석을 발굴하는 것도 보았다.

... 기록된 역사를 통틀어서 보면, 아프리카가 다른 세계로부터 심하게 오해와 학대를 받았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보다는 인류가 아프리카에 진 채무와 의무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4-6쪽)


아프리카는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육괴다. 대륙의 97%가 3억 년 동안이나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른 대륙들은 산맥이 형성되고 대규모 단층이 일어나면서 풍경이 크게 변했으나 아프리카는 변화의 폭이 적었다. 지구의 구조와 역사를 처음부터 현재까지 이렇듯 명확하게 보여주는 곳은 다른 어디에도 없다.

강괴craton라고 부르는 몇 개의 안정적인 커다란 바위 덩어리들은 36억년 전부터 현대까지 변함없이 대륙의 외형을 이루고 있다. 강괴들은 소용돌이 속을 코르크처럼 떠돌면서도 파괴되지 않고 핵을 형성했고, 그 주변에 냉각된 암석들이 달라붙어 굳어졌다. 11억년 전쯤 이 합체과정을 거쳐 세 개의 커다란 강괴가 형성됐는데 이것들이 현대 아프리카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서아프리카 강괴는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코트디부아르, 가나의 해안에서 북쪽으로 모리타니까지 뻗었다. 콩고 강괴는 중앙아프리카 대부분을 메웠고, 카프발 강괴는 지금의 아프리카 남부 거의 전역을 이루었다. 대륙의 북단과 남단에 위치한 아틀라스 산맥과 폴벨트 곶 산맥을 만들어낸 구조력을 제외하면, 아프리카의 기본적 지질구조는 늘 안정적이었다. 

카프발 강괴의 끄트머리 바버턴 산계는 '지표면의 지질학적 사건들 가운데 명확한 판독이 가능한 가장 초기 사건들의 보고'라고 간주된다. 지질학자들은 그 시기에 지구가 형성된 방식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판구조론의 출발이었다. (30-31쪽)


수십억 년 전의 일이 뭐가 중요하냐고? "훗날 바버턴 산계를 이룬 침전물은 카프발 강괴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분지에 침전됐다. 초기 분출 주기(30억년 전)에 굳어진 암석은 녹색을 띠기 때문에 녹암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금속, 금을 저장하고 있다. 다이아몬드도 고대 암석의 또 다른 산물이다. 이 원소들이 생성되는 지구화학적 과정은 오로지 강괴 아래 맨틀과 같은 환경에서만 일어난다."(33쪽) 이런 배경은 훗날의 경제적, 정치적 사건들과 만난다.


길을 잃는다. 물리적 의미만이 아니다. 숲의 내밀하고 순수한 자족성은 인간의 의지와 자부심을 어지럽힌다. 숲은 살아 있고 늘 자라고, 모든 것을 끌어안는다. 영원히 뻗어나갈 듯하고, 영원히 살아갈 듯하다. 원시림. 숲의 유익함은 영구히 순환한다. 

숲은 대단히 이기적이기도 하다. 숲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자급적이며 내주는 것이 거의 없다. 심지어 날씨도 자체로 만들어낸다. 숲의 상공으로 솟아오른 수증기는 비가 되어 다시 그 숲에 내린다. 바다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비는 열대우림에 내리는 비의 3분의 1이나 4분의 1에 불과하다.

열대우림은 가용 자원을 식물계 내부에 매우 효율적으로 보관하므로 토양에는 영양소가 거의 없다. 숲 바닥에 축적된 혼합물은 영양소의 중요한 원천이지만 얕게 박힌 뿌리가 신속하게 영양소를 식물에게 돌려보낸다. 그래서 땅에는 버려지거나 저장되는 게 거의 없다. 워낙 철저하게 처리되는 탓에 열대우림의 땅에 고인 물도 가게에서 파는 증류수보다 순수하다. 이러한 총체적인 자급자족의 결과 전체 체계의 기반이 취약해진다. 

일반적으로 열대우림을 자연계의 항구적인 설비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주된 이유는 살아 있는 숲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 아주 짧은 범위의 시간만을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열대우림은 지질학적 역사 전반을 통해 엄청난 속도로 흥망을 거듭했고, 기후와 대륙 이동에 따라서도 부침이 심했다. 아프리카의 열대우림은 영장류의 진화에 알맞은 역할을 한 좋은 사례다. (60-61쪽)


열대우림의 부침이 기후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것이 영장류의 진화와 인류의 진화와 부족 혹은 국가의 형성과 이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뒤에 틈틈이 나온다.


파이윰에서 나온 3500만년 전의 이집토피테쿠스는 최초로 알려진 원숭이와 인간 혈통의 조상 후보다. 크기는 집고양이 정도로 작았고 나무 위에서 살았으며 유연하고 굽은 등과 긴 사지를 가진 영장류였다. 

... 파이윰에서 남쪽으로 3500km 떨어진 빅토리아호의 케냐 측 연안에 가까운 루싱가 섬이다. 이 화석은 1700만년 전의 프로콘술이다. 프로콘술은 비비만 한 몸집에 나무에서 살면서 과일을 먹는 네발동물이었다. 척추는 긴팔원숭이를 닮았고, 어깨와 팔꿈치 관절은 침팬지를 닮았고, 손목은 원숭이를 닮은 프로콘술은 현존하는 어떤 원숭이와도 다르지만 원숭이 종류 전체의 조상이자 인간의 조상이기도 하다. 

1500만년 전의 케냐피테쿠스 이후 영장류 화석기록은 거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약 4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처음으로 명확한 모습을 드러냈다. 

... 라에톨리 일대에서 인간 혈통의 초기 사례들이 나오기 전까지 1000만 년. 이것이 인간 진화의 감춰진 시대다. 이때 인간은 직립보행이라는 최초의 특징을 획득했다. 이 중대한 발전의 화석 증거는 없다. (74-75쪽)


이렇게 많은 선조의 선조의 선조들이 있었구나. 프로콘술...사불상도 아니고 ㅎㅎㅎ 


왜 일어서서 걸었을까? 저자는 아마도 식량을 얻을 '틈새'를 찾다가, 즉 초식동물들을 쫓아다니면서 다른 동물들을 따돌리고 시체들을 파먹다가 걷게 됐을 거라고 말한다. 그 부분에서 재미난 얘기가 나온다. "인간이 정규적으로 먹으면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고기의 양에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 고기 단백질을 매일 섭취하는 칼로리 총량의 50% 이상으로 장기간 섭취하면 간 기능이 심각하게 저하된다. 특히 지방이 적은 고기를 섭취할 때가 문제다. 인간이 살코기만 먹으면 몇 주일 만에 죽을 수도 있다."(97쪽)


황제 다이어트는 죽음의 다이어트였구나. "일반적인 사체의 지방 함유율은 4%도 되지 않으며 그 대부분은 두뇌와 골수에 있다. 호미니드는 동물 사체를 먹을 때 살코기 못지않게 골수와 두뇌 지방을 섭취했을 것"(98쪽)이고, 동물 무리를 따라다니면서 사체를 파먹다가 직립보행을 하게 됐을 거라고.


내가 조금 관심 있는 바오밥 얘기도 나온다. 


호미니드의 주된 식단은 여전히 식물 먹이였다. 식물 가운데는 날고기보다 단백질을 더 많이 함유한 것도 있다. 바오밥 씨앗은 무게의 34.1%가 단백질인데 비해 날고기의 단백질은 21%밖에 안 된다. 쿵족 부시맨이 주식으로 먹는 몽공고라는 견과는 단백질이 28.8%나 된다. (98쪽)


몽공고... mongongo nut. 이렇게 생겼다.


WIKIPEDIA


열매는 아래처럼 생겼다.


IndiaMART

요리를 해놓으면 이렇다고 한다.


SavannaBel


맛있어 보인다.


인간의 직립보행과 피부에 털이 없는 것을 신체의 '냉각체계'와 연결지어 소개한 부분도 재미있었다. 


직립보행은 효율적인 이동의 견지에서는 별로 장점이 없다. 열의 부담과 냉각의 필요에서는 기능적으로 유리할까?
네발보행을 하면 하루 종일 햇볕에 노출되는 신체 표면이 20%가량 되는 반면, 두발보행은 처음에 신체 표면의 20%가 햇볕을 받지만 해가 더 높이 솟으면서 그 면적이 급속히 줄어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지면에서 멀어질수록 바람이 강해지고 기온이 낮아지기 때문에 직립을 하면 신체의 상당 부분에서 대류 작용으로 피부로부터 열이 방출된다. 트인 초원에서 직립 자세를 취하면 네발동물보다 33%나 더 빠르게 열을 없앨 수 있다. 

인간은 1제곱센티미터당 털의 수가 침팬지와 비슷하지만 털이 더 짧고 가늘다. 더불어 땀샘이 잘 발달한 덕분에 우리는 어느 포유동물보다도 빠른 속도로 열을 방출할 수 있다. (122-123쪽)


사바나 동물들은 긴 주둥이를 가지고 콧속의 습한 부분에서 수분을 증발시켜 체온을 식히는데, 영장류는 주둥이가 짧아지게 진화를 하다보니 그렇지 못하다고. 호미니드의 조상님이 숲에서 평원으로 나왔을 때, 낮에도 먹을 것을 찾아다니려면 저렇게 적응을 했으리라는 얘기다. 이 책의 장점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잘도 풀어놓아서 과학책 읽는 것 같은 재미마저 있다는 사실. 


아프리카는 사막이 전체 면적의 40%나 된다. 흔히 떠올리는 정글, 즉 우림은 8%에 불과하다. 가장 넓은 식생은 사바나, 트인 평원, 숲이 우거진 초원이다. 그 주변에는 사막과 숲이 펼쳐져 있고, 지질학적 융기로 형성된 평균 해발 900m에 달하는 물결 모양의 고원이 대륙 전체에 가득하다. ...식생의 부패가 전면적으로, 급속히 진행되기 때문에 부식토가 쌓일 시간이 없다. 그래서 넓고 비옥한 표토층이 드물다. (137쪽)


아무튼 인간은 아프리카의 사바나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런데 다른 대륙 사람들은 거기가 고향인 줄 모르고 오만을 떨었다. 저자는 닐 암스트롱이 1969년 달에 갔던 것을 들면서 "16년 뒤 유전학자들은 인류의 원대한 도약이 실은 케이프커내버럴이 아니라 수만년 전 열대 아프리카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꼬집는다.



어쩐지 로망을 부르는 사바나. 초원은 참 좋다. 하지만 '건조한 아프리카'에서 식생은 다른 대륙과는 다른 방식으로 진화를 했다.


전반적으로 아프리카에서는 강우량과 상주 식물의 양 사이에 직접적인 상호관계가 있다. 건조한 지역이 습한 지역으로 바뀌면 아프리카에서는 식물의 수가 증가하기보다는 개체의 크기가 커진다. 강우량이 늘면 한해살이풀이 여러해살이풀로 바뀌었다가 낮은 덤불과 삼림이 되며, 열대우림 생물종의 구조와 구성이 복잡해진다. 나무는 풀보다 수명이 길기 때문에 열대우림의 영양분은 사바나 초원의 영양분보다 순환 속도가 느리다. 일반적인 아프리카 사바나는 매년 30%의 식생을 순환시키지만 열대우림의 순환율은 8%에 불과하다. 

... 포유동물은 매년 순환되는 식물자원(이파리와 열매)만 먹을 수 있다. 나무처럼 성장과 죽음의 순환이 긴 자원에 묶여 있는 숲은 많은 동물을 부양하지 못한다. 반면 사바나는 많은 동물을 부양한다. (하지만) 과도한 열기와 건조한 조건을 견딜 수 있는 동물만을 부양한다. (138-139쪽)


식물과 동물은 함께 진화를 했고, 그래서 사바나의 어떤 풀은 뜯겨야 잘 자란다고. 


1960년대에는 수렵-채집 생활방식에 대한 견해가 또다시 크게 달라졌다. 1968마셜 살린스는 허스코비츠가 기아의 언저리까지 몰아갔던 부시맨을 오히려 풍요로운 원시사회의 구성원으로 보았다. 여기에는 당시 서구 사회 전체를 휩쓸던 사회적 가치의 재평가가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1952년 유네스코는 인종성명을 발표해 인간이 단일한 종이라고 선언했다. 그 인종성명은 전 세계 인류학자, 심기학자, 사회학자들이 진화생물학자인 줄리언 헉슬리와 테오도시우스 도브잔스키의 추론을 참고로 삼고 초안을 작성했다.

... 이제 과학은 인간을 선천적으로 단일한 종으로, 세계 자원의 상속자로서 본래 평화로이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규정해야 했다. 그러자 아프리카가 초점으로 떠올랐다. 아프리카는 인류의 기원을 밝혀주는 최초의 화석 증거가 발굴된 곳이었고, 부시맨 집단이 태곳적 환경에서 지금도 수렵-채집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곳이었다. (155-156)


이제야 드디어 사람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저자는 농경이나 쟁기를 쓰는 것 같은 '발전'은 전부 외부에서 이집트나 에티오피아를 통해 아프리카에 전파해줬다는 식의 틀을 깨기 위해 애쓴다. 이집트는 사실 아프리카 북부에 있지만 대륙 남쪽에 뭔가를 베푼 게 거의 없었고, 유럽인들이 기독교 국가라는 이유로 (그리고 이스라엘이 정치적인 이유에서)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에티오피아가 대단히 특별한 사람들의 나라였던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압박인데, 환경 악화의 압박이거나 인구가 제한된 환경의 수용 능력 이상으로 증가한 데 따른 압박일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은 더욱 식량 생산에 집중했다. 이 요인은 18000년 전 사하라 동부와 나일강 유역의 인간 집단에게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그 무렵 항구적인 생활방식으로서의 농경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신록이 무성한 나일 강 유역은 황량한 사하라 사막과 큰 대조를 보이지만, 두 가지 모두 아프리카의 농경과 정주 인간사회가 발전하는데 주요한 동력을 이루었다. 나일 강은 사막에서 온 사람들이 터전으로 삼았다가 사막의 여건이 호전되면 돌아가는 저수지와 같았다.

9000년 전 서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에서 최초로 밀, 보리, 완두콩, 렌즈콩이 재배되었고 이 농경의 원리가 나일 강 유역에 전해졌다고 한다. 5000년 전 나일 강변에서 발달한 고대 이집트 문명이 그 농작물의 특별한 생산성에 힘입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적 후대의 일이고, 더 남쪽에서는 아프리카 토착 식물들이 이미 재배되고 있었다.

예상과 달리 식량 채집이 아닌 식량 생산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게 된 변화를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는 나일 강 범람원이 아니라 사하라에서 나온다. 사하라는 원래 인간이 널리 거주하던 곳이었으나 마지막 빙하기의 정점에 이르러 대단히 건조해졌다. 동쪽으로 이동한 집단들은 나일 강변으로 가서 확실한 정주생활을 시작했다. (194-196)

 

우유가 보편적으로 좋은 식품은 아니라는 주장은 1960년대 서구의 영양학자들이 처음으로 제기했다. 1965년 존스홉킨스 의대 연구팀은 미국 흑인의 70%가 락토오스를 소화하지 못하는 반면 백인의 85%는 소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종집단의 차이는 이듬해 우간다 마케레레 대학 연구에 의해 확증되었다. 목축을 하는 투치족의 80%는 락토오스를 소화할 수 있었고 농경을 하는 바간다족의 80%는 소화할 수 없었다. 1981년 발표된 연구는 인류 대닷가 락토오스를 소화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락토오스 소화 능력을 가진 성인의 비율이 높은 것은 북유럽인과 북아메리카 백인의 90%와 아프리카 녹축민의 80% 정도다. 아프리카 비목축민은 90%가 소화하지 못하며, 나이지리아의 이그보족과 요루바족은 100%에 달한다. 대다수 북아메리카 흑인들은 서아프리카 출신 노예의 후손이다. (220-221)

 

락토오스 내성의 진화는 1만년 전 가축 사육과 더불어 시작됐다. 소와 인간의 수는 함께 증가했다. 고고학적 조사 증거는 목축이 4500년 전 나일 강 유역에서 니제르와 말리까지 사하라 일대에 널리 퍼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반적으로 사하라는 전원시대의 에덴동산처럼 보인다. 야생 자원이 풍부하고, 곡식을 재배하고, 항아리마다 젖과 꿀이 가득했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풍요롭다고 보면 좀 과장이겠지만 이 지역에서 진정한 혼합 농경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222-223)


지금도 그렇듯이 (19세기에) 스와힐리어를 쓰는 사람은 적도 이남 아프리카, 즉 잔지바르에서 대륙을 가로질러 대서양까지, 적도에서 잠베지 강까지, 칼라하리 사막을 돌아 남아프리카 남단까지 여러 언어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전부 니제르-콩고어족에서 가장 널리 퍼진 반투어의 한 갈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스와힐리어에는 외국어, 특히 아랍어에서 차용한 단어들이 많다. 스와힐리라는 명칭 자체가 연안이나 해안을 뜻하는 사힐 sahil’이라는 아랍어에서 나왔고 해안 방언으로 소통이 가능하지만 그 뿌리는 반투어에 있다.

반투는 특정한 민족이나 문화적 의미와의 연관성이 없이 오로지 언어적인 명칭일 뿐이다. 19세기 독일 언어학자인 빌헬름 블레크가 만든 용어인데, 사물이나 사람을 뜻하는 ‘ntu’라는 어간을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아프리카 언어와 방언 집단을 가리킨다.

아프리카 언어의 분류에 관한 권위 있는 연구자인 조셉 그린버그는 반투어와 서아프리카의 반데어를 니제르-콩고어족으로 묶었다. 또한 그는 코이산어, 나일-사하라어, 아프리카-아시아어 등 아프리카의 세 어족을 처음으로 정의했다. 아프리카-아시아어에는 아랍어, 에티오피아와 소말리아의 쿠시어, 북아프리카의 베르베르어, 투아레그족과 하우사의 언어로 대표되는 사하라 서부의 언어까지 포함된다. 나일-사하라어족은 사하라 중부, 사헬, 나일 강 상류를 포괄하며 코이산어는 칼라하리 사막, 콩고 분지, 동아프리카 각지에 거주하는 수렵-채집인구가 쓰는 언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언어적 친화성은 이른바 함족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듯했다. “외부에서 온 함족은 목축을 하는 유럽인이었다. 파도처럼 밀려온 그들은 아프리카 흑인들보다 무장이 뛰어났고 영리했다.” 민족학자 찰스 셀리그먼이 <아프리카의 인종>에서 한 말이다.

그린버그는 목축에 능한 함족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오늘날 거의 4억 명이 사는 광대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그런 밀접한 친화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현상이다. 반투족의 친화성은 비교적 나중에 갈라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한때 반투어를 쓰는 단일한 민족이 있었던 걸까?

여러 언어에서 동일한 형태와 의미를 취하는 어근이 얼마나 되는지가 언어적 유사성을 판단하는 척도다. 맬컴 거스리의 책에 따르면 오늘날 나이지리아 동부의 베누에 계곡과 인접한 카메룬 서부 초원 지대에서 사용하는 언어들이 가장 유사하다. 이곳은 어근이 별로 변하지 않은 형태로 존재하므로 반투어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원시 반투어를 재구성해보면 뿌리 작물과 나무 재배를 가리키는 용으들이 나온다. 원시 반투어 사용자들은 숲 가장자리에 살던 경작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5000년 전부터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는데... (229-231)


아프리카의 언어에 대해서는 <아프리카 아이덴티티>에 잘 나와 있음.


언어학자들은 악숨인이 아라비아 남부의 사바인과 접촉하기 전에도 에티오피아인이 쟁기를 사용했고 발명까지 했으리라고 추측한다. 반면 고고학자들은 대체로 기원전 8~3세기 사이에 사바인과 직접 접촉한 결과로 쟁기농경이 에티오피아 고원에 도입됐다고 본다. 문자의 경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기원전 7세기의 비문들을 보면 서체와 내용에서 사바의 영향이 역력하다.

... 유럽 중심주의는 아프리카 문명이 외부에서 도입된 것이라는 믿음을 조장하기 때문에, 악숨이 아프리카 토착 문명과 국가형성의 확고한 사례라는 것은 주목해야 할 중대한 사실이다. 그 뿌리는 토착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생태적으로 주변국들로부터 고립됐으면서도 지리적으로는 외부의 장점을 포착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위치를 점한 덕분에, 악숨은 외부의 혁신을 끌어들여 접목시키면서도 자체 체계의 활력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었다. (261)

 

왜 하필 에티오피아였을까? 에티오피아인들은 본래 아프리카 다른 지역의 주민들과 달랐던 걸까? 이런 의문들은 에티오피아의 독특한 지질 구성과 생태여건의 맥락에서 고찰해야 한다. 에티오피아는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대부분 500~1000m 이상을 넘지 않는) 아프리카의 고지와 지형이 다르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2000m 이상 고지의 50%, 3000m 이상의 80%가 에티오피아에 있따. 그런 고도에서는 기온도 적당하고 말라리아, 수면병, 주혈흡충병 등 저지대에 흔한 질병도 없다.

기후의 혜택에다 의도하지 않은 고립까지 더해졌다. 울퉁불퉁한 단층이 있어 북쪽, 동쪽, 서쪽으로부터 접근하기란 쉽지 않으며 남쪽은 넓은 사막과 척박한 초지가 통행을 어렵게 만든다. 그 덕분에 수백만 년 동안 천연의 장벽에 에워싸여 있었으며 지질 격변, 바람, 비의 침식이 아프리카에서 보기 드문 웅장한 협곡, 깎아지른 단층, 탁상형 고원을 만들어냈다.

물리적 고립은 아프리카의 대표적 동식물군에게 적절한 서식지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사라진 종들을 생존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그래서 이 고원에서만 사는 종들이 특별히 진화하게 됐다. 이 일대 포유류 219종 가운데 28종이 에티오피아에만 서식한다. 토착 식물종 중에는 대단히 유용한 것들이 많다. 커피도 그중 하나다. 1920년대 후반 러시아의 식물유전학자인 니콜라이 바빌로프는 에티오피아를 전 세계 재배식물 혈통의 8대 원산지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262-263)

 

과소비의 시대에 숲과 삼림은 철 제련과 유리, 벽돌, 토기 제작에 필요한 화덕의 연료로 소모됐다. “악숨 문명의 붕괴는 환경 악화와 급속한 인구 감소가 맞교대하는 과정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결과였다.”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에 로마 제국이 빈곤해져 사치품 시장이 위축됐다. 기원후 800년 악숨은 거의 사라졌다. 엘리트와 백성들은 에티오피아 중부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13세기에 현대 에티오피아 국가가 탄생했다.

19749월 하일레 셀라시에와 봉건 국가의 왕권이 군부 쿠데타로 타도됐으나 공산주의 성향의 새 정부는 예전 체제 못지않게 억압적이었다. 새 정부의 추한 면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교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종교가 신앙의 중추로 떠올라 이를 통해 불만과 반대가 확산되고 공고화됐다. 그 힘은 악숨에서 찾았다. 악숨이 물리적으로 고립된 시기에 신화와 현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독특하고 튼튼한 토대를 만들어냈다.

악숨은 기원후 4세기에야 그리스도교로 개종... 솔로몬, 스바, (두 사람의 아이인) 메넬리크의 전설은 역사적 근거가 없다. 솔로몬이 살아있을 때 악숨은 정치적 실체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믿음은 강력한 힘이다. 언약궤가 보관돼 있다는 성소를 지키는 수사들은 그 이야기가 전설이 아니라 역사라고 주장한다. 언약궤의 복제품은 에티오피아의 교회 2만여 곳에 소장돼 있다. 타보트 tabot라는 명칭을 가진 이 복제품들은 주요 종교행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273-275)

 

무역과 도시의 형성에 대해서도 비슷한 편견이 많았다. 


서아프리카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은 주로 8세기 북아프리카 아랍인들이 사하라를 횡단하는 금과 노예의 무역을 시작한 덕분에 가능했다는 믿음이 일반적이었다. 서아프리카 역사는 190년대에 성채 없는 도시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아라비아에 의해 촉발됐다는 패러다임으로부터 풀려났다. 팀북투에서 남서쪽으로 350km 지점, 말리의 나이저 강 삼각주 내륙에 위치한 현대 도시 젠네 부근에는 젠네-네노라는 대규모 고고학 유적이 있다. 이곳을 발굴한 결과 1600년 동안 중단없이 지속됐던 도시화의 증거가 드러났다. (279-280)

 

저자가 소개하는 나이저(니제르) 강 삼각주와 그 주변 젠네-네노 지역의 삶의 방식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강우량은 평균치에 수렴하지 않는다. 오랜 기간 많은 비가 내리다가 그 다음에는 강우량이 줄어들기도 한다. 나이저 강 내륙 삼각주의 범람 규모와 지속을 결정하는 것은 집수지의 강우다. 삼각주의 범람 양식에 영향을 미치는 메커니즘은 매우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놀랍게도 그런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주민들은 튼튼한 생존 방식을 개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젠네-네노의 도심 거주지처럼 크고 복잡하면서도 비강제적인 방식이 성립됐다. 악숨 같은 곳에서처럼 사회적 위계와 강압적 중앙집권 전략으로 나아간 것과는 다르다.

(삼각주의 경우) 다양화의 경우와 전문화의 요건이 상충하는데, 생존을 위해서는 둘 다 필요하다. 나이저 내륙 삼각주에서는 특별한 관계를 개발함으로써 그 모순을 해결했다. 각 집단이 배타적으로 자신의 분야에 전념하면서도 상호 의무의 유대를 공유하는 관계.

...비밀 지식과 환경에 대한 섬세한 대응은 삼각주의 여러 부족에게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기장과 수수를 경작하는 밤바라족, 목축을 하는 풀라니족과 투아레그족, 고기잡이를 하는 보고족과 소모노족이 모두 그렇다. 인류학적 정의에 따르면 각 집단은 활동 분야와 영역이 서로 달라야 공생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적대가 싹튼다. 이것은 나이저 내륙 삼각주와는 모순되는 정의다. 인구밀도가 임계점을 넘었을 때 집단들은 오히려 서로 정답게 살아갔다. 범람과 더불어 일하고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토지를 풍부하게 사용하는 전략이 필요했고,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삼각주는 민족집단 간 적대의 도가니가 돼야 했다. 그러나 고고학 기록이 전하는 1600년 동안 삼각주는 갈등의 현장이 아니라 평화롭고 호혜적 관계가 유지되는 곳이었다. 갈등이 발생한 경우에도 승자가 전제적이고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체제가 자리 잡지는 않았다(287-290)


저자는 "환경이 대단히 예측 불가능하고 그것을 이용하는 전문가들의 전략이 상충하는 냉엄한 생존의 현실을 믿음의 체계로 조화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전문화의 요구가 집단들을 분열시키지만 다른 한편으로 통합적인 경제의 요구가 집단들을 한데 묶어준다. 이것은 소수가 전제적 권력으로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적 위계와 강압적 중앙집권으로 빠지지 않으면서 농촌 사회가 도시 사회로 이행하는 전범이 된다. 삼각주와 젠네-네노는 중앙화가 아니라 복합화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뒤이어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소금, 낙타를 비롯한 여러 동식물 얘기가 나온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플랜틴 이야기. 나는 처음 들었을 때 불어권인 토고에서 쁠랭땅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플랜틴이라는 말이 영 어색하다 ㅎㅎ


바나나와 플랜틴은 약 2000년 전에 원산지인 동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 수입되었다. 새로운 작물이 한 지역의 인구 변동과 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바나나와 플랜틴은 다른 뿌리작물에 비해 월등히 우수한 에너지 식품이다. 그러나 칼륨과 비타민C는 풍부하지만 철분과 칼슘 함유량은 아주 낮고 단백질과 지방은 거의 없다. 바나나는 재배하는 데 적은 노동이 든다는 것도 중요한 점이다. 바나나는 여러해살이 작물이다. 바나나가 특히 많이 생산되는 우간다의 경우 영구적 식물이라는 말이 더 적합한 용어일 것이다. 바나나밭은 잘 관리하면 30여년 동안이나 좋은 작물을 생산하며 50~60년 된 밭에서 여전히 많은 수확을 올리는 사례도 있다.

곡식이나 괴경과 달리 바나나는 가루로 만들어 조리할 필요가 없다. 바나나 나무는 어지간한 가뭄에도 잘 견디지만 토양이 건조하면 열매를 맺지 않는다. 바나나를 연중 주식으로 삼을 수 있는 곳은 강우량이 어느 정도 지속적이고 기온이 늘 다소 높은 지역이다. 적도의 환경, 특히 빅토리아호의 북쪽과 서쪽 연안에서 동아프리카 지구대의 서쪽 단층과 루웬조리 산맥의 기슭 아래쪽 호수들까지 뻗은 넓은 초승달 모양의 지역이 적합하다. 바로 우간다다. 우간다인들은 20세기 중반 바나나의 변종을 약 60가지나 재배하고 있었다. 그 변종들은 전부 아프리카 말고는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370-371)


이런 평화로운(?) 이야기들은 이제 비극으로 접어들기 시작했으니... 포르투갈의 무역활동과 함께 대서양 노예무역의 시대가 도래한다. 유럽인들이 처음부터 노예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나 인구가 부족했던(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가난한데 애들을 드글드글 낳아서 굶고 있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아주아주 최근의 것일 뿐이며 아프리카는 늘 노동력이 부족했던 곳이었다) 아프리카 부족(국가)들은 무역을 하면서 유럽인들과 거래를 텄고, 때론 이쪽이 때론 저쪽이 노예를 원했던 까닭에 결국 노예무역으로 귀착됐다는 얘기. 다호메이처럼 주변 부족들에게서 노예를 사냥해 번성한 노예왕국들이 생겨났지만 결국은 몽땅 유럽의 식민지가 됐다.


대체로 적대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환경은 대단히 보수적인 생활방식을 요구했다. 기존의 인구 규모를 유지하는 것 자체도 매우 어려웠다. 장기적으로 존속한 공동체는 가용 에너지를 활용할 때 보상을 극대화하기보다는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식을 취했다. 혁신과 변화는 받아들일 수 없는 위험이었다. 그러나 보수주의라고 해서 반드시 정체를 의미하는 않는다.

... 그 주요한 특징은 끊임없는 움직임이었다. 계절의 변화는 떠돌이 채집자와 목축민을 계속 움직이게 했다. 아프리카 전역에 농사, 목축, 철기 제작 단지를 확산시킨 많은 공동체들은 기존의 공동체에서 벗어나 비교적 인구가 적은 변방으로 이주한 작은 집단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새 집단의 사회질서를 형성한 것은 두 가지 요인이다. 하나는 그들이 이주하면서 가져간 전통이고 또 하나는 아프리카 여러 사회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하는 우선권의 원리다. 새 이주민들이 전부터 그곳에 살던 집단을 추종하는 자세를 자발적으로 취할 경우에는 서열 체계가 발달했다. 위계의 발달과 더불어 혈통도 생겨났다. 여기서 추장제도가 탄생했다. 추장은 지위가 높지만 일상생활에서나 존경을 받을 뿐 공동체 전반에 권위나 권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326-327쪽)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내륙에 본격 진출한 것은 남미에서 키니네라는 말라리아 약이 전파돼 온 뒤였고, 그 전까지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잡아다가 유럽인들에게 판 것은 결국 아프리카인이었다. 이제는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불편한 진실'을 직시하게 하는 이들이 많지만 칼 폴라니가 다호메이 왕국 얘기를 썼을 때만 해도 식민지 착취와 노예무역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존 리더는 이 책에서 그런 불편한 역사를 가감없이 전하지만, 아프리카인들을 그런 분쟁과 노예사냥으로 몰아간 동력이 결국 유럽이었음을 강조한다.


"지금 이 책도 아프리카 공동체들 간에 분쟁이 격렬해진 이유는 15세기 후반부터 유럽이 아프리카에 무역을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특정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1만2000~1만4000년 전 제벨 사하바 학살을 제외하면 아프리카에서 인간이 인간을 대량으로 죽인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아프리카에서 대규모 분쟁이 발생한 것은 인간이 소 목축의 형태로 본격적으로 잉여를 축적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 아프리카가 반드시 평화와 조화 속에서 살아갔다는 의미는 아니다. 분산, 인력부족, 싸울 만한 대상의 부족으로 인해 갈등의 성향이 표출되지 않았을 뿐 실은 고난이 만연했다." (450-452쪽)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공동체들은 작고 분산되어 있었다. 에티오피아 제국 내의 공동체들도 규모가 크지 않았다. 외부 영향과 접촉하기 전까지 아프리카 전역의 공동체들은 강력한 친족 관계와 폭넓은 교역 관계를 유지했다. 다른 지역의 초기 국가 형성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중앙집권 체제는 아프리카 사회 발전의 특징과 무관했다.

하지만 800년 경 아라비아 문헌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사하라 횡단무역을 언급하기 시작할 무렵, 수요와 공급의 외부 압력이 체제에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토착 교역망을 유지해준 상호 호혜성이 서서히 무너졌다. 1500년대 초, 문헌 증거가 중요한 정보의 원천이 될 무렵이면 아프리카에서는 장차 중앙집권적 국가, 군주제, 위계적 사회구조 등을 따르게 되리라는 조짐이 역력했다. 말리, 콩고, 베냉, 요루바, 아산테, 짐바브웨, 줄루, 부간다 등 대륙 전역에 걸쳐 국가로서 규정되는 모든 민족집단의 기원은 외부 무역이나 접촉의 영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20세기 말 아프리카에는 유럽과의 연계로부터 어떤 면에서든 영향을 받지 않는 집단은 없었다. 아프리카는 과연 다르게 발전할 수 없었던 걸까?

유럽이 간섭하지 않았더라도 아프리카는 토착 역량에 기반해 성장할 수 있었을 테고, 독자적인 경로를 걸어 현재까지 왔을 것이다. 안으로부터의 동력을 바탕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15세기에 그 계기를 놓쳐버렸고 그때부터 아프리카의 역사는 고대의 대륙과 그 주민들이 현대인의 자만을 수용하는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현대인의 조상은 10만 년 전 고향을 떠났으나 500년 전에 고향으로 돌아와 마치 그곳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다. (457-458)

 

콩고 강 하류의 말레보 풀 pool은 에덴동산이나 다름없었다. 숲과 사바나 삼림의 가장자리는 토질이 비옥하고 강우량도 충분했다. 콩고 강과 지류들은 어업 발전도 촉진했다. 구리, , 소금의 산지도 무역 가능한 거리에 위치해 있어 말레보 풀은 그 자체로 육상과 하상 무역의 요충지였다.

1400년대 중반에 바콩고족이라고 불리는 이주민들이 이 일대의 지배집단이 되어 느슨한 동맹체를 구성했다. 경제활동의 중심지는 음반자콩고였는데 포르투갈은 15세기 후반부터 이곳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은징가 음벰바는 1491년 아폰소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1506년 콩고의 왕 아폰소1세로 즉위했다. 그리스도교는 아폰소의 치세 이후에 콩고 왕국에서 전폭적으로 수용되었다. 포르투갈의 용병과 화기에 힘입어 아폰소는 세력을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포르투갈은 상투메 섬의 설탕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많은 노예를 얻었다.

포르투갈은 1490년대에 상투메에 설탕을 도입하고 섬 인구를 늘렸다. 이주민 가운데는 1496년 포르투갈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의 자식 2000여 명도 포함되었다. 1500년대 초에 상투메는 유럽 시장에 설탕을 공급하는 최대 산지가 되었다. (463-465)

 

쫓겨난 유대인들이 상투메까지 갔구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노예무역의 시작은 1441년으로 간주된다. 그해에 안탐 곤사우베스와 선원들은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노예를 잡아 해로로 수송했다. 이후 400년 동안 노예는 아프리카와 거래하는 유럽인들에게 합법적인 상품이었다. 필립 커틴은 1451년부터 1870년까지 남북아메리카로 보내진 노예가 9391100명이라고 말했다. 폴 러브조이는 아프리카에서 11863000명이 배로 수송됐으며 그 가운데 960~1080만 명이 남북아메리카에 상륙했고 나머지는 대서양 항해 도중 죽었다고 추정한다. 1300만 명이 아프리카를 떠나 대서양을 떠났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 1550년대에 이르러 콩고족은 노예공급원으로서 신뢰성이 떨어졌으므로 포르투갈은 다시 남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현대 앙골라 해안의 후배지인 루안다가 새로운 공급처로 떠올랐다. 노예는 마치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노예항구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470-471)

 

유럽의 노예상들은 아프리카 상인들이 거절하지 않을 만한 유인을 제공했다. 하지만 노예만 판 것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상인들은 노예가 아프리카 토착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마저 팔아넘겼다. 수세기 동안 아프리카는 1100만 명의 노동력을 잃었다. 그 대가로 얻은 수입 물자는 상인, 추장, 왕의 부와 권력을 늘려주었다.  

영원히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아프리카인들은 결과적으로 유럽 침략자들을 위해 노예 습격을 대신해준 셈이었다처음에는 무력이 동원되지 않고 관습과 정치적 권위에 의해 전개되었다(487쪽)


책에 따르면 "포르투갈은 1500년부터 1535년까지 노예해안에서 황금해안으로 노예 12000명을 수송"했다. "역설적이지만 이 해안 구역에서 인간 매매에 처음으로 참여한 유럽인은 서아프리카 내부 노예무역의 공급자였던 것"이다


"포르투갈은 베냉의 지배자들에게서 처음 노예를 구입했다. 그곳이 바닥을 드러내자 노예공급선은 나이저 삼각주 일대, 이그보족의 영토, 크로스 강 어귀, 카메룬 해안, 콩고, 나중에는 남쪽 멀리 앙골라까지 이르렀다. 포르투갈은 황금해안의 아칸족 공동체들에 노예를 팔고 금을 받았으며, 유럽의 다양한 물자를 주고 노예를 구입했다." (487-489)

 

서아프리카 지도에서 18세기에 카우리가 노예무역에서 화폐로 사용된 지역은 해안에서 내륙으로 1000km나 뻗었고, 거기서 더 안쪽으로는 사헬의 위도 주변에 보기 싫은 얼룩처럼 번지고 있었다. 서쪽으로 볼타 강 상류와 말리에서 세네갈 국경까지 1500km, 나이지리아와 카메룬 북부를 가로질러 차드까지 다시 1500km에 달하는 면적이었다. 각종 무역품, 직물, 구리, , , 화약은 더 멀리까지 퍼졌다. 노예무역은 이런 식으로 직접 관련되지 않은 토착경제까지 상업화시켰으며, 결국 노예를 수출해야만 공급받을 수 있는 수입품의 수요를 창출했다. (506쪽)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이를 부인하지는 않더라도, 아프리카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큰 해를 가하 것은 사실이더라도, "노예무역의 파급력이 총체적으로 대단한 것이었으나 수백 년에 걸쳐 방대한 지역에 서서히 확산되었으므로 아프리카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저자는 둘 다 일면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본다. 분명한 것은, 노예가 된 이들의 '숫자'만 가지고 피해를 평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노예무역이 절정에 달했던 1700년대에 매년 평균 6만여 명의 노예들이 대서양 건너편으로 수송되었으나 그것은 아프리카 인구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100명의 공동체를 기준으로 볼 때 한두 차례의 농업철에 건장한 남자 한 명을 잃는 정도의 인력 손실이었다. 통계로 보면 18세기 아프리카 중서부의 촌락 주민이 노예로 잡힐 확률은 현대 미국 시민이 고속도로에서 피살될 확률보다 작다

그러나 도로에서의 죽음은 위험이지만 노예로 잡히는 것은 위협이다. 도로에서의 죽음은 범인에게 이득을 주지 않는다. 반면 아프리카인에게 노예로 잡힌다는 것은 생존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는 위협이며 마음 깊이 도사린 공포다. 그 아픔은 사회를 옥죄는 숙명론이 되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유괴, 납치, 노예화는 400년 간이나 서아프리카 여러 지역의 주민들을 위협했다.

공포와 현실은 파도처럼 퍼졌고 가는 곳마다 모든 공동체의 상태와 구조를 변형시켰다. 예를 들어 도곤족의 경우, 말리 중부 반디아가라 단층의 암석지대에 자리잡은 데다 촌락들이 절벽에 면해 있어 주변 저지대를 습격한 노예 원정으로부터 안전했으므로 독특하고 폐쇄적인 정체성을 유지했다. 위험한 곳은 사헬의 농업공동체들이었다. (509-510)

조셉 밀러는 특히 1800년대 후반부터 포르투갈의 브라질 플랜테이션에 공급되는 노예수요가 많았던 아프리카 중서부의 경우를 사례로 들어노예무역이 유발한 변화가 폭력적인 혁명에 못지않았다고 말한다추장과 엘리트가 백성들에게서 존중을 요구하고 이따금 공물을 거두던 기존의 정치경제체제는 군벌과 부유한 상인이 장악한 새로운 체제로 변모했다. 이들에게 빚을 진 추장과 엘리트는 노예를 팔아야 했다. (516)

시간은 흘렀고, 지구 반대편 아이티에서 식민지 최초의 성공한 혁명이 일어났다. “생도미니크의 노예들은 해방되었지만 얄궂게도 다른 곳의 노예제는 오히려 강화되었다. 브라질 플랜테이션에 공급된 노예의 대부분은 아프리카 중서부의 대서양 연안에서 선적되었다. 하지만 갈수록 아프리카 남동 해안에서 선적되는 노예들이 브라질의 설탕과 커피 생산에 많이 투입되었다. 노예 공급지는 점차 앙골라, 케이프 주변, 아프리카 남부와 남동부 해안으로 이동했다.

프랑스 노예들은 19세기 초부터 아프리카 남동부의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인도양의 모리셔스와 레위니옹 같은 섬들에 세워진 설탕, 커피, 인디고 플랜테이션에 노동력으로 공급되었다. (594-595)

 

이어지는 것은 언제나 흥미진진한 샤카 줄루 이야기.


역사학자 존 오머-쿠퍼는 <줄루의 영향>이라는 책에서, 음페카네(줄루의 영향으로 발생한 여러 부족의 분산과 이동)아프리카 역사를 형성한 대사건들 중 하나라고 썼다. 그 기원은 19세기 초 아프리카 남서부의 응구니족 인구가 자원을 놓고 벌인 분쟁에 기인한다. 이 분쟁에서 독재적이고 전제적인 샤카가 이끄는 줄루족이 승리했다. 줄루족이 사방에서 승리를 거두는 동안 패배한 부족들은 사방으로 쫓겨났다.

하나는 북동쪽으로 밀려났다. 그곳의 추장인 소부자는 현대 스와지 국가의 토대를 마련했다. 응구니족과 샹가나족은 북쪽으로 달아나 나중에는 말라위까지 세력권으로 삼고 빅토리아호로 가는 길을 통제했다.

현재의 트란스발에서 줄루족의 한 갈래는 앞서 살았던 수많은 부족들의 잔해 위에직접 왕국을 세웠다. 이후 그들은 다시 북쪽으로 이동해 현재 짐바브웨의 마타벨레랜드에 사는 은데벨레족을 이루었다. 응그와네족과 흘루비족은 서쪽 내륙의 고원으로 달아났고, 쫓겨난 많은 집단들은 모셰시의 영도 아래 남서부에 모여 현재 레소토의 산악지역에서 바수토족을 이루었다. 또 다른 강력한 집단인 콜롤로족은 고지 초원을 버리고 북쪽 멀리 보츠와나를 가로질러 잠베지강 상류까지 이동했으며 훗날 로지족의 고향인 바로체랜드에 제국을 세웠다.

나탈은 줄루족을 피해 도망쳐오는 난민들에 유린되었고 이후 줄루 군대에게도 약탈을 당했다. 나탈에 살던 사람들은 국경 지대로 내몰렸다. 국경지대에서 코사족은 그들대로 식민지의 진출에 맞서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거주가 허용된 사람들은 음펭구족이라고 알려졌다.

줄루족이 오고 있다는 말은 유럽의 수많은 독자와 영화팬들을 흥분시켰다.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의 남아프리카에서 그것은 코사족에게도 엄청난 공포를 안겨줬다.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줄루족은 강한 자만 존중하는 아프리카 전사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샤카는 연령에 입각한 조직의 관념을 만들어낸 사회적 혁신가, ‘소뿔전투 대형으로 적을 포위하는 구상을 창안한 군사전략가, 던지는 장창보다 단창 아세가이를 더 효율적인 살상무기로 개발한 군사 전술가로 간주된다. 줄루 전설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586-588)

 

환경 압박에 몰린 줄루족이 들고 일어나 거대한 제국을 만들었고, 결국은 남아프리카의 백인들과 싸워야 했다는 것이 흔히 알려진 스토리다. 저자의 설명은 약간 다르다. 고고학적 증거로 봐서 갑자기 줄루가 살던 땅에 환경 압박이 거세진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그랬듯이 그 원인은 바로 대외무역이었다. 통념과 달리 줄루 국가는 예전에 국가가 없던 상태에서 자연적으로 등장한 게 아니라 대외무역이 그 일대에 가져온 경제, 정치적 격변의 결과로 발전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교역품이 대량으로 유입되자 가축 교환과 결혼 동맹으로 유지해왔던 종전의 정치, 경제적 안정이 약화됐다. 야망을 품은 사람들은 혈통적 원로의 권력에서 벗어나 추종자를 모으고 공물을 거두고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했다. 그 과정에서 규모와 힘을 갖춘 왕국이 수십 개나 출현했다.”(590


그러다가 1796년 프랑스 함대가 포르투갈 요새를 함락시키면서 상아 무역이 중단됐고, 가뭄과 기근이 심해지면서 집단들 간 적대가 격화됐다. 그 시기에 줄루족은 본거지 환경여건이 유리했기 때문에 지배적인 지위로 상승할 기회를 포착할 수 있었다. 샤카의 영도 아래 줄루족은 정치공작과 군사력을 적절히 조합해 1820년대 초 인근 집단들을 복속시켰다.”


영국 상인과 사냥꾼들이 나탈(더반)에서 내륙으로 진출했을 때 샤카는 오히려 환영했다고 책은 설명한다. ‘공산품의 원천이자 정치적 책략의 잠재적 동맹자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줄루랜드는 식민지의 역사에 합류하게 됐다. 줄루 때문에 음페카네가 일어난 것은 맞지만 줄루족은 이 시기에 자체 통합을 이룬 몇 개 집단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들은 상투적으로 기록된 야만적인 전쟁 기계가 아니었으며 그들의 진출도 역동적이고 대담한 국가 건설의 결과는 아니었다.”(591)

 

샤카와 줄루는 백인들을 떨게 하는 공포와 야만의 상징으로 묘사됐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아프리카인들의 반격을 보여주는 영웅담으로 포장됐다. 저자는 폭군 샤카, 피에 굶주린 줄루족, 흑인에 대한 흑인의 무자비한 폭력, 인구이동, 내륙의 인구감소 등은 전부 남아프리카 소수 백인의 분리주의 이데올로기에 아주 잘 맞는 이미지”(593)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남아프리카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금광과 다이아몬드 광산이다.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 러시가 일어난 뒤 광물기업들이 어떻게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는가, 어떻게 노예처럼 부려먹기 위한 제도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뒷날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의 틀을 만드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1872년부터 킴벌리에 인력보급소를 설치해 광산에 오는 모든 노동자들을 등록시키고 고용허가증을 발급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의무 고용계약 기간을 만들고, 광산을 떠나기 위해서는 또 허가를 받게 하고, 신원증명이 없으면 멋대로 벌금을 매기거나 구금을 하거나 태형을 가할 수 있게 하는 조치들로 이어졌다. “영국 정부가 케이프 식민지에 도입한 이런 규제는 이후 아프리카 남부의 노동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인종차별의 법적 선례가 되었다. 정부 공고는 흑인 노동자를 통제하려는 의도가 명백했으나 차별적 언어를 용의주도하게 피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기원은 합법적인 정책에 있었던 것이다.”(638)

 

그래도 노동력은 부족했고, 광구제한법이 1876년 폐지되면서 대자본이 산업적 생산을 시작했고, 알다시피 이는 세실 로즈의 드비어스라는 거대 기업의 장악으로 이어졌다. “18833월 드비어스통합광산회사가 설립돼 최대 소유주로 떠올랐다. 세실로즈는 드비어스를 위해 작성한 신탁증서를 이용해 모든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아프리카 어느 곳이든 병합할 수 있었으며, 외국 영토를 지배하고 피료하다면 그 영토에서 상비군도 운영할 수 있었다. 로즈의 경영방침은 팽창주의, 나아가 제국주의적이었다.” (640)

 

1879년에는 남아프리카에서 인종분리가 재개됐고 개방형 수용소라고 불리는 광산 지역의 숙박시설이 생겼다. 흑인들이 다이아몬드를 훔쳐가지 못하게 막는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통제가 이뤄졌고 통행법만 어겨도 노동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1884년에 드비어스는 정부와 협상을 통해 회사 차원에서 죄수 수용소를 설치하고 죄수를 광산 노동자로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드비어스는 1932년까지 죄수 노동력을 이용했다.” (646) 1885년에는 비트바터르스란트에서 금이 발견됐고 10년 뒤에는이 곳에서 전 세계 금 생산량의 4분의 1이 생산됐다. 이곳의 노동관리 또한 킴벌리의 전례를 따랐다.

 

이 두 곳은 아프리카 노동관리의 전례가 되었다. 그것은 고용이 아니라 필수 자원의 착취였다. 광산의 고용방식은 남부 아프리카 사회에 심히 유해한 영향을 미쳤다. 1936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15~50세 남성 170만 명 가운데 393000(23%)이 지역 광산이나 관련 산업에서 일했다. 대다수는 한번에 몇 개월씩 집을 떠나온 이주민이었으며, 주변 사회와 격리된 채 전원이 수용소에서 지냈다. 농장, 공장, 정부기관은 물론 가사노동 고용주들도 남아프리카와 대륙 전역에서 그런 방식을 영속화시켰다. 모든 도심은 자본을 자원 수탈에 이용하기 위해 발달했고, 도심 주변에는 노동력을 수용하는 거주 지정구역, 수용소, 여관 등이 자리 잡았다.이런 과정을 거쳐 이제 아프리카에서는 경제적 차별 이외에 피부색도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되었으며, 흑인은 외모 하나만으로도 저열한 지위를 감내해야 하는 처지였다.” (650)

 

8년 전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 민속촌 비슷한 곳에서 광부들의 고통을 그린 다소간 해학적인 춤을 본 적 있다. 그 안에 담긴 역사는 얼마나 슬픈지. 그들은 지금 그런 과거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고 돈을 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아프리카 서부에서 무역을 하고 노예를 사고판 지는 500년이 됐지만 사실 유럽의 '아프리카 쟁탈전'이 본격화된 것은 19세기 중후반부터였다. 벨기에의 레오폴1세가 터키에 크레타를 팔지 않겠느냐고 떠보고, 쿠바를 사려 하고, 무려 51세나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려고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655쪽)는 처음 들었다. 그 아들 레오폴2세의 악명 높은 콩고 착취는 그 아버지의 꿈을 이룬 것이었다고. 


죽은 사람만이 아니라 산 사람도 손이 잘렸다. 레오폴과 그의 동료들은 잔인하고 가혹한 징벌을 '원주민의 관습'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카메라가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공기 타이어의 대량생산이 레오폴의 재산을 불려주었다면 조지 이스트먼이 발명한 코닥 두루마리 필름은 그것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결의에 찬 개혁가들은 카메라를 가지고 콩고에 가서 천 마디 말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사진을 찍어 가져왔다. 그 가운데 한 끔찍한 사진은 은살라라는 남자가 선교사 집의 현관에 앉아 슬픈 기색으로 앞에 놓은 작은 손과 발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바로 그의 다섯 살짜리 딸의 손과 발이었다. 그의 아내와 아들, 딸은 함께 초병들에게 살해되고 사지가 잘리고 조리되어 먹혔다. (685쪽)


숱한 고발이 뒤따랐지만 유럽 열강들은 1894년 베를린 회의에서 온갖 음모와 협잡을 거쳐 아프리카를 '분할'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럽인들을 나서서 부른 사람들도 있었다. 잠베지강 일대의 로지족 '군주'인 레와니카가 유럽인들을 끌어들여 노예 노동력 시스템을 만들고 부를 측적하고 권력을 쌓아 국가 체계를 갖추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길게 나온다.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묘사한 잠베지 강의 풍경이 참 아름답다. 


"단층지대에서 바라보는 홍수의 출발은 매혹적이다. 먼 목초지에서 한 덩어리의 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홍수가 수은처럼 빛나며 부풀어 오르면 촌락 언덜들이 섬으로 변한다. 며칠이면 평원은 방대한 석호가 되고 여기에 깊고 푸른 열대의 하늘빛이 반사되어 아름다운 남해의 전원 풍경을 이룬다. 며칠 더 지나면 푸른 석호가 선명한 녹색으로 바뀌는데, 갑작스러운 범람으로 수위가 상승하면서 풀과 수초가 급속히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 독특하게 적응한 식물들은 수위가 정점에 달할 무렵 물 위를 두웅 떠다닌다. 아무것도 없이 트인 물은 석호와 영구적 수로에만 있다. 그래도 카누는 자유로이 이동한다. 카누가 지나가면 뒤쪽으로 부드러운 녹새의 흔적이 남는다." (691쪽)


아프리카의 불운은 유럽에 약탈당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관념이 역사 과정에서 주요한 결정 요소로 확고히 뿌리내릴 무렵 식민화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아프리카 대륙에는 국가가 무려 46개나 된다. 그 밖에 섬나라 5개국도 있다. 국가 수는 아시아의 3배가 넘고 남아메리카의 4배에 가깝다.

아프리카 46개국을 가르는 경계선의 총 연장은 46000km에 달한다. 인접국이 4개 이상인 국가도 20개국이나 된다. 탄자니아와 잠비아는 각각 8개국, 콩고(민주공화국)와 수단은 9개국이다. 완전한 내륙 국가는 15(남수단을 포함하면 16)로 다른 세계를 다 합친 것보다도 많다. (717)

 

1901년 동아프리카 철도가 우간다에까지 이어지자 면화를 해안까지 운송하는 비용은 1톤 당 200파운드에서 2.4파운드로 대폭 하락했다. ... 철도는 아프리카의 분열도 가속화시켰다. 아프리카의 철도는 국경을 넘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국경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예컨대 서아프리카 국경의 90% 이상이 국내 철도로부터 80km 이상 떨어져 있다. 예를 들어 가나 동부의 넓은 구역-다른 지역과 볼타 강과 댐으로 격리돼 있다-은 만약 영국과 독일의 식민 정부가 그 지역에 강요한 구분선이 없었다면 토고 철도를 잘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이지리아는 베냉과 국경을 800km나 맞대고 있지만 두 나라를 잇는 포장도로는 단 하나뿐이다. 국경의 53%는 제대로 측량도 되지 않았고 표지도 없다. 이 지역 주민들은 자신이 어느 나라 국민인지도 확실히 알지 못한다.

정작 촌락 주민들은 국적이 불분명한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어느 추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국경이란 요루바족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인을 구분하는 것일 뿐이다.” 

아프리카에서는 177개의 민족적 문화 지역이 국경선으로 갈라져 있다. 모든 육상 국경선이 적어도 하나 이상의 문화 지역을 가른다. 나이지리아-카메룬 국경선은 14개를, 부르키나파소의 국경선은 21개를 가른다. 식민지 열강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국가들은 물이 줄줄 새는 배와 같았다. (719-720)


피해갈 수 없는 질문. 아프리카인들은 저항하지 않았을까? 식민지를 옹호하던 이들의 시대가 지나간 뒤, 어떤 학자들은 '저항'을 좀 과장하는 경향도 있다. 


아프리카인들은 힘없지도 않았고 야만인도 아니었으나 제국주의 침략에 전면적으로 저항하지는 않았다. 식민지 시대 초기를 정복과 저항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보다는 자생적이고 불가피한 역학이 아프리카인과 이주민의 운명을 결정하고, 나아가 인간 진화, 인간 생태의 전체 과정도 결정하는데 더 큰 역할을 했다. 

20세기 벽두에 아프리카 인구 12900만 명 가운데 제국주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인구는 기록에 남은 사건들을 전부 합쳐도 0.5%가 되지 않았다. 기나긴 기간과 방대한 면적이 저항운동의 무풍지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저항은 식민화 과정의 결정 요소라고 보기 어렵고, 그보다는 아프리카 현대 정치사에 더 큰 관련성을 가지는 요소라고 봐야 한다. (733)

 

공교롭게도 저항운동이 전개됐던 1885~1914년까지 30년의 기간에 아프리카는 자연재해에 시달렸다. 마치 유럽이 아프리카를 정복하려 할 즈음에 때맞춰 자연이 일부러 아프리카의 힘을 약화시키려 한 것처럼.

1890년대 초를 정점으로 기후 여건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강우량이 풍부했던 시기 동안) 수십 년간 인구과잉 상태가 끝나고 20세기 벽두에 아프리카 인구는 심한 가뭄을 맞아 크게 감소했다. (735)


아프리카인들은 두 차례 세계대전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동원됐다. "황금해안의 영국군은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기 4일 전에 이미 기동을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의 첫 총성은 그 바로 직후 영국-프랑스와 토고 침공에서 울렸으며 1914년 8월 26일 독일군의 항복은 연합군의 첫 전과였다. 1918년 11월 종전까지 200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병사, 짐꾼, 노동자 등으로 유럽의 전쟁에 직접 기여했고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바쳤다. 토고의 로메, 카메룬의 두알라, 남서아프리카의 스와콥먼트와 뤼데리츠 등 독일의 항구들은 전쟁이 발발한 뒤 곧바로 점령되었다."(757쪽)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아프리카 인간 사냥이 다시 벌어졌다.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이 의미를 갖는 것은 유럽 식민 지배가 끝난 포스트콜로니얼 시대, 국가 수립 과정에서다. '독립 영웅'들은 각국을 꿰찼지만 이후 역사 또한 냉전의 와중에 심하게 굴절됐다. 사실 그 이전에 아프리카에서 ‘부족’들의 ‘불변의 전통’은 없었고, 유럽인들이 만들어내 고착화한 이미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코사어와 줄루어는 70%가 이치하고, 줄루가 특정 민족집단이라는 관념은 1870년대에야 생겨났으며 케냐의 키쿠유와 마사이가 원수지간이라는 것도 식민지 행정당국이 편의적으로 꾸며낸 허구였다는 것이다.(769쪽)


독립 이후, 파트리스 루뭄바와 조모 케냐타와 은크루마와 건국 영웅들의 이야기는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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