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섬들
마셜 살린스. 최대희 옮김. 뿌리와이파리
쿡 선장은 하와이에 가서 신(神) 대접을 받았으나, 신 대접을 받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하와이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하와이 사람들의 신화의 흐름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콕 집어 '어긋나는 행동'은 아니었고, 떠나야 할 신이 (하필이면 태풍으로 배가 고장나는 바람에) 다시 바닷가로 돌아온 것에 불과했지만 아무튼 하와이 사람들은 그를 죽였다.
저자는 쿡의 얄궂은 운명과 하와이의 신화를 바탕으로, 서구의 잣대로 기록된 역사의 힘만을 믿어온 역사학자들에 무시당했던 섬들의 역사를 찾아다닌다. 삶과 신화가 만나고 겹치며 함께 만들어내는, 서구식 역사관 속에서 가려진 사람들의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라나지트 구하의 <역사 없는 사람들> 이래로 살짜쿵 나의 관심사가 된 '역사 없는 사람들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는 알쏭달쏭 어지럽고 재미있다. 알다가도 모를 호기심에 덜커덕 구입해 읽었는데, 이 사람 저 사람 하도 많이 인용해 읽기가 힘들었다. 모두 듣도보도 못한 인류학자들의 저술을 인용한 것이니 생소한 내게는 까다로울 수밖에. 하지만 참아내고! 다 읽고 나니, 그리 두꺼운 책은 아닌데도 뿌듯하다.
하와이 사회는 고역과 고통이 쾌락의 선험적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와 다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하와이 사회는 마치 보이지 않은 손이 작용하듯 행동하는 주체의 실용적인 관심들(이해관계들)로 층층이 쌓인 것처럼 보이고, 그리하여 역사적 형태로서 끊임없이 생성되거나 사라지는 중이다. 이와 유사한 사회로는 북극의 에스키모(이누이트), 남아프리카의 츠와나족, 스리랑카의 풀 엘리야 Pul Eliya 마을, 또는 이른바 느슨한 구조의 뉴기니 사회를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부족은 또 다른 공통점, 즉 인류학적 설명을 거부한다는 특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류학적 상상력의 실패, 나아가 서구 사회사상의 한계를 보여주는 기념비이다. 우리는 그들을 뿌연 안경을 쓰고 사후적인 ‘통계적 모델’을 통해 관찰한다.
데이비드 포콕의 저명한 논문 <시간 인식의 인류학>(p.964)에 따르면, 이와 같은 상이한 역사의식은 위계의 형식논리의 한 측면이다. 그렇기 때문에 왕권은 가문의 전승이나 개인적인 추억거리에 관련된 사건들-그 것들 자체로는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고 일시적으로 밖에 지속되지 않는디-의 시간척도를 제공히는 것이다. 딱 그렇게, 위계 안에 담아내는 표현의 좋은 예로서, 옛 하와이인들은 지신의 일생을 왕의 행위에 맞추어 말한다. “나는 카메하메하가 오아후섬을 정복했을 때 태어났다,” “카메하메하가 키홀로에 연못을 지었을 때 돌을 나를 수 있을 만큼 자랐다” 등둥 그들의 삶은 왕의 삶을 기준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 평민들은 무역사성의 상태로 근접해간다. 투아레그족의 유사한 상황에 대해 연구한 피에르 봉트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린 평민은 주류의 문화적 범주를 역사적으로 음미하지 못한다. 평민에게 문화란 대부분 ‘삶을 통해 체험한 것’이다. ‘아무개 씨의 막내아들인 아무아무개가 당신도 잘 아는 케알로하 사람들의 총애받는 수양딸인 누구누구와 혼인하여, 육지로 가서 농사를 짓는다.’ 이 이야기 속에 표현된 무미건조한 일상에는 육지와 바다, 농사와 어업, 장남과 차남, 출생과 입양 간의 일련의 차이와 관계가 스며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민중 사이의 소문도 곧잘 신화만큼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사건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일상생활의 신화이다.
주요한 문화적 관계들은 기원 신화로부터 부족 혹은 씨족의 설화로, 씨족의 설화로부터 가족의 역사로, 현존재의 질서가 만들어질 때까지- 속담, 고유명사, 혹은 ‘나’라는 대명사에 선조를 덧붙이는 방식으로- 아래로 이전된다. 우주 신화의 최종 형태는 현재의 사건이다. 서구의 역사의식에서 기록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궁극목적론의 이데올로기로 빠지게 되고, 사건을 ‘독특하고 새로운 무엇이 시간의 사슬 속으로’ 급작스럽게 난입한 것으로 인지하는 것 외에는 이해 가능한 형태로 만들 수가 없다. 마오리족은 그러한 사건을 독특하거나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원전과 동일한 사건으로서, 전승된 구조의 질서 속에서 즉각적으로 이해한다.
인류학자들은 추상적 구조에서부터 출발해 구체적 사건의 설명에 도달하고, 역사학자는 유일무이한 사건의 의미를 평가절하하면서 근저에 깔린 장기구조를 선호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역설적이게도 인류학자들은 자주 외견상 통시적인 데에 반해,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공시적이다. 오늘의 과제는 인류학적 문화경험의 힘을 빌려 역사 개념을 혁파하는 것이다. 이제껏 베일에 감춰져 있던 머나먼 섬들의 역사는 유럽의 과거, 혹은 ‘문명’의 역사에 대한 자기반성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 그렇게 되면 섬들의 역사는 역사 이해에 놀라운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하여 구조의 다양성을 통해 우리의 역사의 개념을 증폭시킨다. 갑자기, 온갖 종류의 새로운 것들이 고려의 대상으로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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