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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머시 미첼, '탄소민주주의'

딸기21 2018. 8. 19.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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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민주주의 CARBON DEMOCRACY

티머시 미첼.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옮김. 생각비행



재미있었다. 며칠 만에 금방 읽었다. 지금 세계가 누리는 민주주의 체제가 석유라는 에너지원 덕에 굴러가고 있음을 지적한 것, 석탄과 석유 생산과정에서 노동자의 힘이 어떻게 조직화됐고 또한 어떻게 해체됐나... 다만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게 석유 지정학에서는 어떤 측면이 있었다, 이런 정도로 얘기해도 되는 걸 모두 '석유 때문이야'로 규정해버리니 앞부분 읽으면서 살짝 억지스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석유나 중동에 대해 처음 읽는 이들에게는 유익하고 흥미로울 것 같다. 석유정치와 석유경제를 초창기부터 큰 틀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 패권국가들이나 독재자들이나 거대기업들의 다툼 속에 가려졌던 중동 노동자들의 투쟁을 소개한 것이 특히 눈에 띈다. 석유가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학의 재구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짚은 부분도 재미있다.



석유로서의 민주주의


민주주의 전문가에게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것이다. 민주주의란 민주화에 성공한 모든 사례에서 동일하게 복제되는 일련의 절차와 정치 형태로 이뤄진다. ... 하나의 사상은 장소와 상관없이 동일한 무엇이다. 그것은 지역의 역사, 환경, 물리적 조건을 초월해 여기저기서 반복될 수 있는 것으로,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이 된다. 

민주주의가 하나의 사상이라면, 국민들의 머릿속에 그 사상을 주입함으로써 국가는 민주화된다. 민주주의는 그 사상에 헌신하는 새로운 형태의 시민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된다. 

중동의 민주주의 문제를 다룬 미국의 문헌들은 자본주의적 지구화 그리고 사람들을 서구의 경제 위기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유순한 노동자와 자발적 소비자로 바꿔놓는 작업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생산, 그리고 새로운 통치 방식에 사람들을 종속시키는 것과 관련한 공학 프로젝트engineering project라는 관점 말이다. (13-15쪽)


‘석유로서의 민주주의 democracy as oil’는 탄소 에너지를 생산하고 사용하는 과정을 수반하는 다층위적 기제들을 가진 하나의 정치형태다. 

석유가 돈의 흐름으로 바뀐 뒤에 산유국들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송유관 건설, 정유소 위치, 로열티 협상 둥에 관한 처리 방식은 조직화된 노동력의 요구를 피하려 한다는 점에서 탄소 민주주의의 질문과 관련된다. 석유가 정부의 막대한 소득원으로 바뀌는 것은 민주주의와 석유라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에너지의 흐름으로부터 정치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특정 방식의 결과이다. (17-18쪽)



1909년 에밀 푸제 Émile Pouget는 《사보타주》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때부터 이 방해 전술의 이름이 대중화되었다. 

사보타주의 새로운 효과는 거대한 운동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는 메커니즘에서 비롯되었다. 단 한명의 작업자라도 시스템을 마비시킬 수 있었다. 20세기가 되자 이러한 메커니즘의 취약성과 에너지의 집중된 흐름은 노동자들에게 더 큰 정치적 힘을 안겨주었다. 가장 공통적인 패턴은 탄광, 철도, 항만, 해운으로, 파업이 서로 연관된 산업을 통해 확산되었다는 데 있었다. 파업과 태업 그리고 다른 사보타주 수단들의 결합은 새로운 정치 수단의 창출을 가능케 했다. 바로 총파업이었다. (43-44쪽)


록펠러가는 1914년의 러들로 대학살 Ludlow Massacre에 대한 보고서 작성을 의뢰했다. 1913~1914년의 콜로라도 석탄전쟁 Great Coalfield War 당시 록펠러 소유 광산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려는 광산노동조합 United Mine Workers의 시도가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기관총으로 무장한 콜로라도 주방위군이 파업 광부들을 살해했던 사건은 거대 산업 자본을 위협하는 정치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 

록펠러가는 광산 노동지들을 몰아내는 덜 폭력적인 방법을 고안하고자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 William Lyon Mackenzie King을 고용했다. 캐나다 노동부 장관이었던 매켄지는 40여 곳의 석탄, 철도, 해운 및 기타 산업에서의 파업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 인물이었다. 전간기에 널리 전파된 록펠러 계획 Rockefeller Plan은 노동자들의 독립 노조 가입을 막으면서 임금과 노동조건 협상에 참여를 허용하는 어용 노조를 만드는 전략이었다.

매켄지 킹은 록펠러를 비롯한 기업에서 노사관계 컨설턴트로 일한 뒤 캐나다 정계에 복귀해 22년간 총리를지내면서 뉴딜정책 성격의 노동자 보호프로그램을 도입하려는시도에 반대했으며, 캐나다의 복지 체계를 설계했다. (46-47쪽)



마셜플랜 관리자들은 국제 유가를 결정하는 계획을 고안했다. 정부의 생산 쿼터로 보호받는 미국의 석유 생산비용과 미국에서 유럽으로의 수출비용에 비해 중동에서는 석유가 더 저렴하게 생산되었고 유럽으로의 수송도 더 저렴했다. 그러나 가격 계획에 의해 중동에서 공급된 석유도 미국에서 수입한 석유만큼 높은 가격에 판매되었기 때문에 유럽은 저렴한 중동산 석유의 이점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러한 가격 계획은 미국의 석유 생산자들과 국제 석유기업들의 독점 이익을 보호했지만, 유럽이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었다. ... 그래서 유럽부홍계획의 달러 기금은 유럽이 석유를 구매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석유를 얻기 위한 달러 수요를 기반으로 이 제도는 국제 금융시스템에서 달러의 역할을 공고히 했다. 유럽부홍계획 기금의 10퍼센트 이상이 석유조달에 쓰였는데, 마셜플랜 자금 중 단일 용도로는 가장 큰 금액이었다. (53쪽) 


바쿠의 기술자들은 배와 철도의 종기 기관에 연료를 주입하는 과정에서 석유를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연소용 가압 분무기를 개발했다. 러시아 카스피해 함대는 1870년대에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꿨고, 러시아 철도는 1880년대에 연료를 바꾸기 시작했다. 1890년경 러시아의 모든 기차는 도네츠강 유역과 시베리아의 석탄지대를제외하고는 모두 석유를 사용했다.

... 비숙련노동은 토착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일부를 맡고, 이란에서 오거나 페르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를 모두 쓰는 지역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일부를 맡았다. 석유 기업과 여타 기업의 관리자와 소유주는 대개 아르메니아인들이었는데 ... 석유생산에서 인종적 분리를 이용하는 것은 보편화되었으며, 이 전략은 훗날 중동 전역에서 도입되었다. 생산자들은 여러 곳에서 노동자를 수입하여 인종적 분리의 형태를 영속화했다. (59-60쪽)



석유회사들


1880년대 이전에 세계적으로 의미 있는 석유 수출 지역이라고는 펜실베이니아 북서부의 석유 지대뿐이었다. 19세기 말 유럽 기업들은 북아메리카 비깥의 다섯 지역 -바쿠, 버마와 수마트라, 중부유럽의 오스트리아 갈리시아와 루마니아에서 상업적 가치가 큰 유전을 개발했다.

20세기 초에는 수백 개의 기업이 세계 곳곳에서 석유 탐사, 생산, 운송 유통에 관여했다. 이들 중 소수 기업이 장거리 석유 공급을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수마트라의 로열 더치Royal Dutch. 랑군의 버마 오일Burmah Oil 그리고 바쿠의 노벨 브라더스Nobel Brothers 세 기업이 원거리의 석유공급지를 지배하게 되었다. 

한편에는 금융 기업들이 있었는데, 베를린의 도이체방크, 파리의 로스차일드 은행, 걸프오일을 창립한 피츠버그의 멜런Mellon가 금융사들은 석유 해운을 독점할 수 있는 철도와 송유관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투자 자본의 흐름을 통제했다. 

또 다른 기업인 셸 운송무역회사는 벌크 유조선으로 석유를 해상 운송하는 다른 기술들을 적용·발전시켜 1890년대에 사세를 확장했다. 록펠러가 이끈 스탠더드 오일은 먼저 정유산업을 독점하고, 그 다음에는 송유관과 해상 운송로를 통제하고, 마지막으로 유통 사업에 진출했다.

... 두 가지 동맹이 결성되었는데, 하나는 아시아 거래를 관리하고, 다른 하나는 유럽 시장의 거래를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1902년 로열더치는 셸, 로스차일드와 힘을 합쳤는데, 이들은 바쿠와 루마니아의 석유에 이해관계가 있었고, 훗날 로열더치셸이 되는 하나의 동맹을 형성했다. (76-78쪽)



혁명과 석유


멕시코는 대형 유전 발견으로 1914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석유를 많이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다. 영국 기업인 멕시칸 이글Mexican Eagle은 생산량의 60퍼센트를 차지하며 ... 스탠더드 오일과 멕시코 석유 생산을 두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스탠더드 오일은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iaz 정부의 전복을 돕기 위해 자금을 댔고, 이로써 1910-1920년의 혁명이 촉발되었다. (102쪽) 


페르시아 역시 1905~1911년 입헌 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1년 내내 계속되는 파업과 저항, 농성은 1906년 샤가 헌법과 의회 (마즐리스)를 수용하게 만들었다.

바쿠에서 고향으로 돌아간 석유노동자들은 혁명의 경험을나누었다. 비쿠에 기반을 두고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연계되어 있던 이란사회민주주의자조직은 전국적으로 벌어진 대중집회에 적극적이었으며, 무자헤딘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여 1907년 약 8만 6000명의 당원을 확보했다. 

진보 운동의 지도자 사이드 하산 타키자데는 이란에서 추방당한 뒤 런던을 방문, 하원 연설에서 샤를 복위시키려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고 있는 이란 혁명에 대한 영국의 지지를 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러시아가 이란 혁명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것을 묵인했다. 나중에는 군 사령관 레자 칸을 지원했는데, 그는 1921년에 정권을 잡고 1979년 이슬람 혁명까지 이란을 지배한 새로운 독재 정권을 세웠다. (103쪽)


오지의 텅 빈 고원을 배경으로 하는 영웅적 선구자들의 역사가 아니라 철도와 송유관을 건설하거나 봉쇄한, 석유 공급을 발전시키기보다 방해하려고 한, 절대적 권력을 추구하는 경쟁 기업들의 역사... 그 싸움들은 테헤란과 이스탄불의 혁명적 투쟁 한가운데서 벌어졌고, 영국과 다른 열강의 정치적 격변과도 연관되었다. 대중 정당을 대표하기 시작한 의회의 간섭을 받게 된 석유회사, 그리고 금융권과 정부 내부에 있던 그들의 동맹 세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국가의 제국주의적 필요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국주의적 정치인들은 취약한 에너지 공급 구조의 대변인이 되었는데, 그 구조는 더 평등한 집합 생활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힘에 대적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104쪽) 



이라크 석유 쟁탈전


1917년 멕시코의 혁명 정부는 석유자원의 소유권이 지상의 토지 소유자가 아니라 국가에 있다는 원칙을 재확립하고, 해외 석유 기업이 주장한 소유권을 정부가 허가하는 채굴권으로 바꿔버렸다. 같은 해 발생한 러시아 혁명은 캅카스 석유 생산의 국유화로 이어졌다. 1920년 소비에트 세력은 영국의 지원을 받는 유전을 탈환한 뒤 국유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몇 년간 세계 석유 네트워크를 관리하려는 경쟁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한 곳에 집중됐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바로 이라크 유전이었다. (110쪽)


영국은 ‘원주민 통치자’가 필요했는데, 해법은 ‘에미르의 창출’이었다. 가장 강력한 지방 인사인 바스라의 전쟁 전 통치자 사이드 탈리브는 너무 독자적인 성향이라서 이용하기에는 어렵겠다고 판단했다. 영국은 처음에 네지드의 이븐 사우드를 고려했으나 결국 헤자즈의 통치자 하삼의 아들인 에미르 파이살을 택했다. (145쪽) 


프랑스는 시리아(남부 지방은 영국이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을 구성하기 위해 여전히 확보하고 있었다)를 침공한 뒤 여섯 개 지역으로 분할했다. 각 지역의 다양한 정치적 배경은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으로 단순화되었다. 알라위파 지역, 드루즈파 지역, 기독교도가 압도적인 지역(레바논), 터키와 알라위와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혼합된 지역인 알레산드레타, 그리고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의 아랍지역들. 마지막 두 국가는 1924년에 ‘시리아’로 재결합되었고, 드루즈파와 알라위파 지역도 1936년과 1937년 통합되었다. 알레산드레타는 1939년에 터키에 넘겨졌고, 레바논만이 독립 국가로 남았다. (155쪽) 


키르쿠크에서 지중해로 이어지는 한 쌍의 송유관이 1932~1934년 건설되었는데 , 하나는 영국이 통제하는 하이파의 터미널로 이어졌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뻗어서 프랑스가 통제하는 트리폴리의 터미널로 연결되었다. (158쪽) 



저항


영국은 이라크의 형식적 독립을 인정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1941년 재점령했다. 전쟁 뒤 1948년의 민중 봉기와 학생 및 노동자 파업으로 저항이 정점에 이르렀다. 이 지역에서 가장 잘 조직된 정치 운동이었던 이라크공산당은 "힘의 무게를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 거대 기업들에 집중시켰다." 즉 철도, 바스라 항구 그리고 유전이었다. (159쪽)


아람코는 인종 분리와 그에 상응하는 급여, 노동조건과 주택에서의 불평등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이는 미국의 석유산업의 특징으로, 비용을 낮추고 노등자의 조직화와 정치적 행동을 막기 위해 활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유전이 개발되면서 사우디아라비아의 노동자들은 보다 나은 처우와 급여 그리고 인종 차별 종식을 요구하면서 일련의 파업을 전개했다. 이라크 출신의 유명한 ‘말썽꾼들’은 추방되었고, 1949년 저항이 확산된 이후에는 파키스탄에서 온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1953년 10일간의 파업은 개혁 약속과 유전에서의 계엄령 선포로 이어졌고, 1956년 6월의 총파업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노동자들은 헌정 도입, 노동조합과 정당 및 전국적 조직을 만들 권리, 아람코의 내정 간섭 종식, 미군 기지 폐쇄, 수감된 노동자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아람코의 보안부서는 파업 지도자들의 신원을 치안부대에 넘겼고, 조직가들은 갇히거나 추방되었다. (164쪽)


이란에서도 석유 산업에서 임금 인상과 노동 조건 개선 그리고 노동자 관리와 처우에서의 인종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투쟁들이 1945~1946년 일련의 파업으로 이어졌는데, 아바단의 정유소와 유전 전역에서 벌어진 사흘간의 총파업도 여기에 해당한다.

1949~1951년에 노동조합과 투데당(이란 공산당) 내의 동맹 세력이 다시 나타났다. 1937년의 멕시코에서처럼 개혁주의 정부는, 노동조합과 공산당이 요구한 것보다는 외국 석유 기업에 유리한 조건이지만, 석유 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석유 노동자들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석유 노동자들과 모사데크 정부 사이에 격렬한 대립이 이어졌고, 정부는 노조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1953년 미국 중앙정보국 CIA과 영국 정보기관은 쿠데타를 도모했고, 모사데크를 제거하고 샤에게 민족주의 운동을 패퇴시키고 노동 운동과 좌파를 분쇄할 권력을 주었다. (165쪽)



화폐의 리사이클링과 무기 거래


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체제는 20여년 동안 통화 투기꾼들의 파괴적 권력을 어느 정도 제한했다. 하지만 이는 통화의 가치를 인간의 노동이 만들어낸 재화의 일반적 흐름이 아니라 주로 석유의 흐름과 연결함으로써 이뤄낸 것이었다. 유럽 동맹국들이 석탄, 석유 및 다른 전쟁 물자의 수입대금으로 미국에 금괴를 보내야만 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은 세계 금 보유고의 80%를 축적했다.

달러의 유통은 곧 미국의 금 보유고를 넘어서게 되었는데, 부분적으로 이는 석탄보다 이동이 쉬운 석유의 흐름에 따라 가속화되기 시작한 세계 교역의 성장속도를 따라갈 만큼 남아프리카의 금광들이 금 생산을 늘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달러의 가치를 유지시킨 것은 각국이 국제 교역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필수자재, 무엇보다 석유를 구매하는 데 미국의 통화를 이용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1945년 미국은 전 세계 석유의 3분의2를 생산했고, 나머지 3분의 1 중 절반 이상이 라틴아메리카와 카리브해 지역에서 생산됐다. 주로 이란에서 온 '스털링 오일'은 영국 파운드로 거래됐지만 많은 양이 달러로 거래됐다. 국제 금융의 기반으로서 달러의 가치는 석유의 흐름에 의존했다. (172-173쪽)


애초에 워싱턴은 정부기구가 신탁관리의 역할을 할 의도였다. 1943년에 전시미국석유국은 정부 석유기업인 석유비축기업 Petroleum Reserves Corporation을 설립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비축 관리를 맡도록 했고 사우디에서 지중해로 석유를 수송할 송유관 건설도 계획했다.

사우디 채굴권을 가진 캘리포니아스탠더드오일(이후의 셰브론)과 텍사코(지금은 셰브론과 합병)는 워싱턴의 인수 시도를 가로막았다. 아랍국과 미국의 공식적인 파트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그들은 합작 투자회사의 이름을 '캘리포니아-아라비안'에서 아라비안-아메리칸 오일 컴퍼니(아람코)로 바꾸었다. (177쪽)


아람코와 이븐 사우드는 다란에 미국의 공군 기지 역할을 할 공항을 건설하기로 했다. 아람코는 군사적 취약성에 대한 우려를 활용해야 워싱턴으로부터 지속적인 보조금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알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란에서의 석유 채굴권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분쟁이 다시 발생했다. 미국 관료들은 이란을 중동에서 미국의 석유정책 그리고 미국의 권력 확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맥락이 배양되는 장소로 만들 기회를 얻었다. 

(냉전 덕에) 중동에서 위임통치와 신탁관리 같은 장치, 그리고 개발에 대한 거창한 계획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다. 미국 관료들과 석유 실무자들은 기업 이윤이나 중동 석유공급을 제한할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고도 영구적인 전쟁 상황 속에서 그 '전략적 중요성'을 언급함으로써 미국 석유기업들이 이 지역의 생산을 통제할 필요성을 설명할 수 있었다. (186-187쪽)


산유국들의 압력으로 중동으로 흘러드는 파운드와 달러의 양도 늘어났다. 영국과 미국은 이러한 통화의 흐름을 되돌릴 메커니즘이 필요했다. 무기는 이러한 금융 리사이클링에 특히 잘 맞았다. 석유 생산과 무기 제조가 딱 들어맞으면서 석유와 군사주의는 상호의존성을 더하게 되었다.

무기는 창고에 보관할 수 있었고, 적당한 안보 독트린 아래에서는 더 많은 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무기를 사용할 필요성을 줄여줄 것이라는 논리로 합리화될 수 있었다. 결국 무기는 실제 필요나 소비 가능성 따위에 제한받지 않고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었다.

1945년 이후로 미국은 잉여 자본을 흡수하고 몇몇 제조기업들의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평시 국내 군비지출이라는 '제도화된 낭비'에 의존해왔다. 미국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전비지출로 이 낭비의 메커니즘을 강화했다. 

한편 중동의 독재자와 군사정권에게 무기 구매는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국가의 기술적 우월성을 확인해주는 길을 열어줬다. 더 중요한 점은, 서구가 무기 공급을 정부 대 정부 형태의 원조에서 상업적 사업으로 전환하면서 현지 국가와 외국기업 사이에서 활동하는 브로커를 위한 공간이 열렸다는 점이다. 통치자의 가족과 인척, 정치적 동맹자들은 이런 역할을 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었고, 석유로부터 나오는 수입의 일부가 무기 구매로 환류되어 개인 재산을 엄청난 수준으로 축적할 수 있었다. 영국과 미국에 있어 달러 리사이클링의 중심점은 1967년 이후 이라크보다 거의 세 배의 무기를 수입한 이란이었다. (236-238쪽)



석유는 경제를 무한히 성장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새로운 구상에 몇 가지 기여를 했다. 첫째, 유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둘째, 석유는 비교적 풍부했고 해상 운송이 용이했기 때문에 고갈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할 수 있었다. 유가에는 자원의 고갈에 대한 계산이 포함되지 않았다.

1950-60년대 성장의 경제학은 장기 성장을 에너지의 이용 가능성에 제한되지 않는 무언가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대기오염, 환경 재앙, 기후변화 등 화석연료 사용에 따른 부정적 결과의 비용은 국민총생산에서 공제되지 않았다.

탄화수소 에너지의 풍부함은 새로운 형태의 계산에 더 깊이 기여하게 되었는데, 두 가지 측면이 특히 중요했다. 하나는 농업의 공업화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천연가스로 제조한 합성 비료의 도입, 2차 세계대전 이후 화학 제초제와 살충제의 도입은 성장에 대한 자연적 한계를 제거한 듯이 보였다. 다른 하나는 탄화수소로 제조한 합성물질의 증가로, 이는 자원 소모에 대한 직접적 해답으로 여겨졌다. (212-213쪽)



민족주의와 국유화


모사데크 정부가 1951년 앵글로-이라니언 오일 컴퍼니의 자산을 국유화했을 때 이란은 석유 생산은 장악했지만 석유를 판매할 수는 없었다. 영국은 유조선단과 주요 석유기업들을 설득해 이란 석유 취급을 거부하도록 함으로써 아바단의 정유소로부터의 수출을 봉쇄했다. 앵글로-이라니언(지금의 BP)은 쿠웨이트의 유전들에서 생산량을 배가하여 공급 손실분을 만회했다. 이 봉쇄는 이란을 경제적 위기에 빠뜨렸고, 정부는 1953년 8월 영국과 미국이 조직한 군사 쿠데타의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석유기업들과 산유국들 사이에 벌어진 투쟁의 다음 지역은 이라크였다. 이라크는 여전히 농촌 인구가 많긴 했지만 도시도 성장하고 있었다. 영국 통치 하에서 대지주들에게 토지가 집중됨에 따라 시골을 떠난 빈민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있었다. 유전, 철도 조차장, 직물공장에서 노동자들은 활동적인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좌파는 일자리 확충, 주택문제 해결과 복지 증진, 대토지의 사적 통제 종식, 정치적 억압이 아닌 민주적 권리, 석유산업에 대한 외국의 통제 중단을 요구하는 운동을 펼쳤다.

1958년 영국이 지원하는 군주정을 무너뜨린, 압드 알 카림 카심이 이끄는 민족주의자 장교들은 처음에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에게 의지하면서 석유 통제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통해 나라를 단결시키고자 했다. (221-222쪽)


당시 중동의 네 거대 산유국(이란 이라크 사우디 쿠웨이트) 중에서 이라크의 사정은 특별했다. 세계 주요 유전을 통제하던 기업들은 이라크에서 석유를 더 많이 생산하지 않기를 바랐다. 1920년대 이라크 석유사업이 시작될 때부터 BP는 주변국보다 이라크의 석유를 더 천천히 개발하려 했다. 1950-60년대에 이라크의 석유 생산량은 다른 나라의 절반 이하로 유지됐다. BP와 그 파트너들은 이라크를, 예외적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서만 생산량을 증대시키는 미개발 매장량을 가진 생산조정국으로 활용했다.

이라크의 석유 재고는 송유관을 통해 시리아를 거쳐 지중해로 수출됐기에 이라크는 선적 지점에 대한 통제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주요 정유소는 지중해 쪽 말단에 위치해 있었고, 이라크는 수출을 위해 석유를 처리할 아무런 독립적 수단을 갖지 못했다. (223-224쪽)


1960년 12월 이라크는 80호 법안을 통과시켜서 1931년의 채굴권 협정을 취소하고 채굴권 지역의 99.5%를 수용했는데... 미국과 영국은 이미 카심을 축출하기로 결정했던 것같다. 결국 카심은 1963년 2월 군사쿠데타로 쫓겨나고 살해당했다. 미국은 새 정부에 암살단이 처단해야 할 100여명의 좌파 명단을 주었는데 다수는 저명한 지식인이었다. 이라크의 대중 정치운동 지도자들과 활동가 다수가 살해당했고 수천 명 넘게 투옥되었다. (227쪽)


1967년 전쟁의 여파로 지연전략도 끝이 났다. 이라크 정부는 1964년 설립된 이라크국영석유회사가 석유 거물들이나 미국 정부의 압력에 종속되지 않는 파트너들과 국가의 석유자원을 개발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라크는 이제 카심이 1959년 시도했던, 석유 정제와 수출의 독립적 역량을 구축할 수 있게 됐다. 

7대 거대 석유기업들의 관할권 밖에서 석유산업을 개발해온 아랍국들은 이미 국가적 통제력을 확보했다. 시리아는 1964년 소규모 석유산업을 국유화했고 알제리는 1971년 2월 프랑스가 건설한 산업의 소유권을 대부분 획득했으며 리비아는 1971년 12월 외국인 소유 석유생산을 국유화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이라크는 영국-미국 카르텔과 석유 통제력을 다투는 최초의 중동 산유국이 됐다. 긴축조치를 준비하고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두 명의 공산당 지도자를 내각에 포함시킨 뒤 바트당 정부는 1972년 6월 1일 이라크석유회사를 국유화했다. (229-230쪽)


1969년 9월 1일 일군의 장교들이 리비아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국왕을 몰아냈다. 그들은 1967년 석유 파업을 이끌었던 마흐무드 술라이만 알 마그리비를 석방했다. 처음에는 그를 수상으로 지명했다가 다음 해 4월 카다피가 자리를 넘겨받은 뒤 알 마그리비를 외국 석유 기업들과 계약조건을 재협상하는 팀의 책임자로 지명했다. 

리비아는 매일 50만 배럴씩 유럽으로 가던 사우디의 석유공급을 가로막고서, 다른 석유공급원을 갖지 못한 캘리포니아의 옥시덴탈 페트롤리엄을 압박해 석유기업들 사이의 공동전선을 깨고 새로운 세율에 합의하게 했다. 리비아는 공급 금수를 활용해 석유 생산에 대한 과세 증대를 얻어낸 최초의 산유국이 되었다. (250-251쪽)



가까운 미래를 위해 정부는 자신의 역할을 시장의 계산 방식을 개선하는 것으로 한정해야 다. 두 가지 특별 조치가 시장 기구가 석유 산업을 더 잘 조절하도록 해줄 터인데, 더 가까운 미래를 계산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선물시장을 창출하는 것, 그리고 선물시장이 더 효과적으로 작동하게끔 미래의 기술동향, 석유매장량, 에너지 수요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석유와 관련한 두 가지 형태로 발전했다. 하나는 석유관련 지식에 대한 정부 간 협력이다. 미국 정부는 에너지부를 설립하고 산하에 에너지정보국을 만들었다. 같은 시기 산업 국가들은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를 통해 파리에 국제에너지기구를 신속하게 설립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싱크탱크들은 탄소 거래라는 또 다른 도구를 획책하기 시작했다 유가의 가파른 상승은 이러한 과정을 도왔다. 미국의 석유재벌들은 벌어들인 재산으로 신자유주의 운동을 위한 횡재 기금windfall funds을 만들었다. 멜런 가의 걸프 오일  자산을 상속한 리처드 멜런 스카이프는 헤리티지재단, 미국기업연구소, 후버연구소, 맨해튼연구소, 국제전략문제연구소 같은 조직들에 최소3억 4000만 달러를 제공했다. 미국의 최대 비상장 석유 기업인 코크 인더스트리를 소유한 찰스 코크와 데이비드 코크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찰스 코크는 1977년 카토연구소를 공동설립했다. (295-297쪽) 



사우디와 이슬람

이븐 사우드의 성공은 아라비아에 새로운 정치 질서를 구축하려는 두 개의 다른 세력에 의존했다. 아람코는 기술적, 물적 지원과 더불어 자금을 지원했다. 이 회시는 새로운 도시, 도로망, 철도, 전기 통신망, 향구, 공항을 건설했다. 아람코는 석유로열티를 정부가 아닌 이븐 사우드 가문에 지불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람코의 인종 차별과 불평등 방식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시위는 1956년 6월 총파업으로 절정에 달했다. 정부는 1950년대에 이크완 민병대를 재창설하여 국가방위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노동자들을 견제했다. 

내부의 반대가 잠잠해짐에 따라 이제 주요 위협은 외국으로부터, 즉 이집트와 이라크 같은 민족주의 정부로부터 왔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오일 머니를 사용하여 종교 기관이 그들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보수주의를 해외로 확산하는 사업을 도왔다. (317-319쪽) 


이븐 사우드의 뒤를 이은 사우드 왕이 아랍 민족주의자들 및 개혁가들 편에 서길 선호하자 미국은 경쟁자 파이살 왕자를 지원하는 방향으로 선회했고, 이살은 1964년 형을 왕좌에서 축출했다. 파이살은 석유수출국기구의 설립을 도왔던 압둘라 타리키 석유부 장관을 포함한 개혁주의자들과 근대화론자들을 정부에서 제거했다. 

압둘라 타라키는 점진적으로 아람코를 인수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성문법과 선출 의회 그리고 공업화 프로그램을 위한 계획을 작성하던 지식인 그룹의 일원이었다. 반동적인 파이살은 나세르주의에 반대하는 캠페인과 해외 이슬람주의 운동에 대한 지원을재개했다. (320쪽) 


사우디아라비아의 중요성은 단지 이 나라에 석유가 풍부하다는 사실뿐 아니라 이 나라가 희소성 체제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다는 데 있었다. 당시 인구가 러시아의 10분의 1, 미국의 16분의 1 수준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의 국내 석유 수요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러한 초과생산 능력은 잉여량을 조절해 생산쿼터를 초과하여 생산하는 다른 산유국들을 규율함으로써 희소성 체제를 유지하는 (석유수출국기구 이전 시기에는 BP의 통제하에서 이라크가, 그다음에는 쿠웨이트가 담당했던) ‘생산 조정국’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물론 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군사적 보호를 의존하고 있던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진행되었다. 

비탄력적 수요, 풍부한 매장량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잉여량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인해 20세기 후반 세계 어디에서든 막대한 석유 지대를 거둘 가능성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대한 정치적 통제에 좌우되었다. (311쪽) 


이슬람 운동 세력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석유의 정치 경제학의 내재적 요소가 되었다. '지하드’는 단순히 ‘맥월드’의 발전에 대립하는 현지 세력이 아니었다. 맥월드는 실제로 다양한 사회적 논리와 세력의 필수적 결합인 맥지하드로 나타났다. 그들은 자본주의 외부에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어떤 전前자본주의적인, ‘문화적’인 요소가 아니었다. 역사적 기원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은 석유의 개발에 따라 그 역할이 발전한, 20세기의 역동적 세력이었다. 그러나 석유 경제에서 그들의 역할은 분절적이었다. 석유 수익을 만드는 데 핵심적이기는 했으나 정치적 이슬람은 그 자체가 이러한 목표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었다. (321-322쪽) 



장기전, 이라크전


미국은 중동의 전 지역에서 폭력 사용에 폭넓게 관여했고, 이러한 관여의 수단으로 막대한 재정 지원을 했으며, 정상적인 정치적 수단으로 분쟁의 장기화에 대한 의존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정책들은 20세기의 마지막 25년을 중동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시기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갈등의 영속화는 미국의 상대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후였다. 중동 지역의 여러 곳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하고, 무력으로도 통제할 수 없게 된 탓에 미국의 권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현지 권력들을 약화시키는 차선책으로서 장기전에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329-330쪽) 


이라크 전쟁에 연관된 상업적 동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군수업체, 보안회사, 무기상들의 이해관계에 있었다. 오히려 석유 기업들은 제국 권력과 다국적 기업으로는 더 이상 석유의 공급을 ‘통제’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334쪽) 


종파적 형태의 정체성이 아니라 다양하고, 부분적으로 중첩되기도 하며, 종종 정치적 소속감이라는 세속적인 형태를 띠었던, 그리고 복지, 평등, 또는 개인적 열망이나 국가적 열망과 연관된 참여 방식들을 가졌던 이라크의 실질적인 다양성은 미국에 의해 고안된 종교와 종족이라는 단순한 정체성의 정치로 대체되었다.

이라크의 주요 유전과 정유소 그리고 다른 산업에서 노동자들은 독립적인 노동조합을조직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점령 당국은 공공부문에서 독립적인 노동조합을 금지하는 이전 정부의 법률 150호를 그대로 유지했고, 2006년 새로 정권을 잡은 이라크 정부는 이 금지 조치의 삭제를 거부했다. 2010~2011년에 저항은 더욱 거세졌지만, 석유부는 조합 지도부를 색출하여 다른 곳으로 내쫓았다.

2010년 6월에는 항만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금지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번에도지도자들은 다른 곳으로 전출되었다. 2010년 7월 하시미야 무흐신이라는 여성이 이끈최초의 독립 전국노동조합인 전력노동조합은 여전히 전력 공급 시스템의 재구축 비용으로 할당된 130억 달러의 유용을 규탄하며 바스라에서 집회를 조직했다. 석유부는 노동조합 폐쇄와 사무실 퇴거를 명령했다. (336-337쪽)



화석연료의 고갈이 임박하지는 않았으나 두 가지 당혹스러운 상황이 벌어져 화석연료로 만들어진 세계에 예상치 못한 불안정을 초래하고 있다. 첫 번째 상황은 150년간 지속적으로 공급이 증가했던 풍요로운 석유의 시대가 끝난것이다. 세계는 새로운 유전을 발견하고 개발하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석유를 소비하고 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약 7만 개의 유전 중 단 110개의 대형 유전에서 전 세계 석유의 절반을 생산한다. 이 대형 유전 중 상당수는 반세기도 전인 1930년대에서 1960년대 초반에 발견된 것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을 비롯한 최대 석유수출국 중 일부는 자국에서 사용하는 석유의 양이 늘어남에 따라 수출 가능한 양이 이전보다 감소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수출 가능한 양 중에서도 중국과 인도가 소비하는 양이 늘고 있다. (348-349쪽) 


기후변화가 인간에 의해 발생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나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고갈에 대한 논쟁 등은 정치적 불확실성을 낳는데, 논쟁이 기술적 한계나 과학적 지식의 한계에 도달하기 때문이 아니라 논쟁 방식이 사회와 자연 사이의 관습적 구별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기술적 논쟁은 첫 번째 구별이 낳은 두 번째 구별, 즉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분리에도 문제를 제기한다. 기술적 전문지식의 구성에 점점 더 많은 방식으로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360쪽)



투기


셰일 석유와 가스 생산자들은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더 나은 기술에 의존했는데, 그것은 에너지를 추출하는 기술이 아니라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추출하기 위해 개발된 수단이었다. (388쪽) 


투기 자본의 과잉으로 생긴 금융 붕괴와 국제 불황에서 미국을 구원해낸 것처럼 보인 2009년 이후의 에너지 붐은 그러한 과잉과 투기의 세상에 대한 해독제가 아니다. 셰일 혁명이 "미국의 잠재적인 재산업화”로 가는 길을 나타낸다는 주장은 시티그룹의 국제 상품 조사 수장이 월스트리트저널에 실은 내용이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소비자 부채와 그 부채 위에 세워져 과대평가된 파생 상품의 시스템을 체계화하는 데 도움을 주고 거기서 이익을 본 같은 은행들과 신문들이 이제는 탄소를 동력으로 하는 미래라는 지속불가능한 기대를 창조하고 있다. (399쪽) 


모든 가정과 산업이 에너지의 생산자와 소규모 잉여 전력의 생산자로 전환하는 방식에 토대를 두는 유럽의 분산 네트워크 재생가능 에너지 생산 모델이 , 대형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재생가능 에너지가 전통적인 장거리 전력망을 통해 송전되는 미국의 계획보다 더 민주적인 잠재력을 갖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책의 교훈은 누구도 사회-기술적 시스템의 구상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민주주의의 기능성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점은 민주주의를 위한 가능성의 성패가 미래 에너지 시스템의 형성을 둘러싼 전투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민주주의 투쟁은 현재의 사회-기술적 시스템에서 그 취약성의 지점을 밝히는 데 달려 있다. (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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