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적 정의란 무엇인가 GLOBAL JUSTICE
존 맨들. 정승현 옮김. 까치 7/27
딱 봐도 까치에서 나온 책답다. 실은 그래서 이 출판사를 좀 더 좋아하는 면도 있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스튜어트 화이트의 <평등이란 무엇인가>를 읽다가 결국 못 버티고 -_-;; 존 롤스의 <정의론>을 사서 읽었다. 둘 다 스크랩도 하지 못했지만. 실은 존 맨들의 이 책도 1월에 읽기 시작해서 7월에야 끝냈다. 그 사이에 이 책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으려나.
이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만 사놓으면 될 것 같음. 이토록 일관된 디자인과 편집 컨셉트란 정말이지... 울집에 대체 이 출판사 책만 몇 권이 있는지 모르겠다. 몇년 새 나온 까치의 과학책들만 모아놨는데도 얼추 책꽂이 한 칸이 차던데 ㅎㅎㅎ
<지구적 정의란 무엇인가>는 롤스가 정의론에서 뼈대를 세운 개념들에 기대어, 그것을 글로벌 확장판으로 만든 것이다. 분량은 물론 이 책이 훨씬 적다! 롤스의 정의론은 '한 나라 안에서' 정의의 기반이 되는 '원초적 입장'을 설정하고 꼼꼼 면밀히 정의의 이모저모를 따진 것인데, 그 바탕 위에서 존 맨들은 어떻게 글로벌한 정의를 규정하고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를 짚는다. 뉴욕주립대 철학과 교수라고 하는데, 저서가 <롤스의 정의론>, <롤스 길라잡이>, <케임브리지 롤스 개념사전> 이런 것들이라고 한다. '롤스빠'인 모양이다.
내가 여기에서 전개하는 지구적 정의의 이론은 두 가지 의미에서 보편적인 기본인권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이 기본인권들을 향유할 자격이 있다. 둘째, 모든 사람은 이 권리들을 존중해야 하는 정의의 의무를 가지고 있다. 즉 인권은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의무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10쪽)
이어지는 구절은 롤스의 정의개념을 지구적으로 확장하는 데에 핵심적인 이슈다. 가까이에도 굶는 아이들이 있는데 왜 멀리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가? 이런 종류의 질문에 살면서 숱하게 부딪친다. 아이들 인권을 생각한다면서 하는 얘기가 이런 식이다. 왜 북한 동포들을 돕지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을 돕는가? 이것은 '친족부터 돕기(굳이 이렇게 이름붙인다면)'의 민족주의 버전이다. 근래에는 이런 논리가 난민을 배제하기 위해, 외국인노동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이용된다.
맨들은 그런 사고방식을 함부로 비난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런 사고체계가 나름 합리적일 수 있게 하는 배경으로 '국가'를 든다. 내 민족, 내 이웃이라는 감정적인 사고방식이라고만 보기엔 삶의 기본조건 자체가 국경을 기준으로 나뉘어지는 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내 세금 들여 난민들 집 마련해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얼핏 유용할 수도 있겠다.
특별히 기본인권의 보호에는 정당성을 갖춘 정치제도의 창설과 유지가 필요하다. 이 제도들이 존재하게 되면, 동료 시민과 외국인이 나누어진다. 동료 시민과 외국인의 구분은 정의의 문제에 직접적 중요성을 가진다.
국가가 세계 무대의 유일한 행위자가 아니며, 국가가 행동할 때는 (시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상황 아래에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분명히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리고 예측할 수 있는 장래에 개인과 단체 행위자들은 국가에 의해서 창설된 규칙과 제도를 배경으로 자기의 목적을 추구한다. 우리의 현재 세계에서 국가는 강제적인 실정법이 형성되는 중심지이며, 정의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이 점이 국가를 독특하게 만든다. (11쪽)
국가란, 민족이란 중요한 게 아니야! 국경을 넘어 인권은 보편적이야! 이렇게만 주장해서는 정의론의 빈틈이 생긴다. 롤스는 그 빈틈을 해석하는 작업을 <정의론> 이후로 넘겼다. 맨들은 전 세계인의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는 이들이 이 빈틈을 애써 무시하는 것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나의 주장은 지구화의 압력에 직면하여 국가의 중요성과 능력을 덜 중요시하는 최근의 경향과 몇몇 방식에서 반대되는 입장"(11쪽)이라고 말한다. "국가와 정당한 법 사이의 핵심적 연계 관계를 올바로 고려하려는 동시에 기본 인권 그리고 기본 인권이 발생시키는 세계시민주의적인 정의의 의무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며 두 가지 요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논리적인 해법을 찾아보자고 한다.
롤스가 대충 때우고 넘어갔던 이 빈틈이 몹시 큰 이슈가 된 것은 '지구화의 압력' 때문이다. 머나먼 곳 사람들의 안위와 기본인권에 대해 어느 때보다 많은 이들이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알게 되었고, 책임과 의무의 구분선을 명확히 긋기도 힘들어졌다. 그들의 삶이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버렸으니까. 두 번째 이유도 있다. "지구적 정의의 문제가 최근 이렇게 활발해진 데에는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가 한 가지 중요한 원인"이다. "미국 정책분석가들의 지배적인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도덕적 고려는 국제관계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이론, 즉 현실주의였다. 그러나 소련 공산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철학자들은 동서 진영논리에서 벗어나 외국과 외국인에 대해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규율하는 보다 정밀한 원칙들을 다듬기 시작했다. 고려하고 가려내야 할 새로운 선택지와 사고방식들이 갑자기 많이 생기게 되었다." (16쪽)
맨들이 정리한 순서대로 쓴다면 첫번째가 냉전 붕괴, 두번째가 지구화라는 요인이 되겠다. 하지만 그가 언급했듯 구체적으로 세계의 시민들에게 지구적 윤리를 고민하게 만든 사건들이 있었으니, 냉전이 끝나고 곳곳에서 벌어진 분쟁에 대한 개입 문제- 즉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목의 군사행위들이 많아진 것이다.
한국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파병을 했지만, 누구도 지구적인 윤리라는 잣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어떤 군사행동을 해야 하는가 혹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일본 학자 모가미 도시키의 <인도적 개입>은 국제법적인 논리를 꼼꼼히 따져 요건을 구분하면서 사례들을 분석하는데, 그것에 비해 맨들의 책은 좀 더 포괄적이고 철학적이다. 어떤 이들, 예를 들면 노엄 촘스키같은 이들은 어떤 명분을 붙였든 그 명분만으로 움직여지지 않는 군사개입의 문제점과 '미국의 못된 의도'를 비판하면서 극렬히 반대한다. '부수적인 피해'를 거론하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해 작은 피해를 내는 것에까지 반대하는 것이 옳으냐는 반론도 나올 수 있다. 피터 싱어는 <세계화의 윤리>에서 구체적인 피해, 유엔의 승인 같은 훨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기준을 거론하는데 정치철학 관점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맨들의 입장도 결국 그 비슷하게 수렴되는 것 같다.
더 큰 피해를 막으려는 의도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조차도 도덕적으로 절대 용인될 수 없는가? 때때로 용인될 수 있다고 한다면, 민간인 살해가 도덕적으로 용인되는 대가인지 우리가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우리는 기존의 국제법에 어느 정도의 무게를 주어야 하는가?
특정 군사행동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고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도덕원칙들, 국제법의 의미의 중요성, 각 나라가 외부의 다른 사회들과 관계를 맺을 때 설정하는 적절한 목표 등에 관한 보다 추상적인 논쟁들에 직면하게 된다. 이 책에서 관심을 가지게 되는 질문들도 그 성격상 기본적으로 규범적이다. 규범적 질문들은 행동, 특성, 정책 혹은 제도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작업을 수반한다. (21쪽)
책의 앞부분은 정의의 개념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종교개혁 이후부터 마이클 샌델까지 변천사를 훑는다.
고대 이래 윤리이론의 전형적인 관심사는 인간에게 선한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종교전쟁 이후에 새로운 질문이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선한 삶의 본질에 관해서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 정의로우면서도 안정된 사회를 이루는 것이 가능한가? 구원이나 선한 삶의 명확한 원칙 같은 특정 목표를 성취하기보다는, 철학자들은 새로운 지향점 즉 좋은 사회란 그 시민을 공정하게 대우하려는 데에 목표를 두는 사회일 것이라는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자유주의적인 접근법은 사회적 정의의 덕목(virtue)에 초점을 두었다. (42-43쪽)
이후 자유주의는 점차 두 개의 요소들을 발전시키고 다듬었다. 첫째, 관용, 개인적인 자유, 평등을 보장하는 실질적인 원칙들이다. 여기에는 모든 시민의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원칙과 제도들이 포함된다. 둘째 요소는 우리가 자유주의적인 정당화의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그 원칙에 있다. 이 접근법에 따르면 사회의 조직 원리들은 그 속에서 살게 될 인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으로 옹호되고 정당화돼야 한다. 이런 정당화의 접근법이 가장 생생하게 나타난 사례는 사회계약 사상이다. (46쪽)
롤스는 한 사회의 기본적인 사회정의의 원칙들을 개발하려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그 자신이 '정의의 정치적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을 우리가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기본 생각은 선한 삶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그 어떤 특정한 포괄적 윤리이론이나 종교의 진리성에 의거해서 정의의 원칙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우리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에 의견을 달리 하는 사려 깊은 사람들이 납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당화의 원칙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47쪽)
정의의 정치적 개념은 롤스가 '사회의 기본 구조'라고 부르는 것, 즉 한 사회의 근본적인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제도들에 의해서 형성된 시스템을 평가하려고 고안되었다. 이것을 평가의 기본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두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첫째 한 사회의 기본 구조는 우리 삶의 실제 모든 측면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두번째로 사회의 기본 구조는 모든 구성원에게 강제로 부과된다는 점이다. (49쪽)
이제 롤스를 넘어가야 한다. "일국 차원에서 정의의 원칙을 세울 때 적절한 정당화의 방법은 지구적 정의의 원칙을 세우는 경우에도 역시 적절한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57쪽) 단호하다. 특정 윤리나 종교에 기반을 두고 정의의 틀을 정하는 게 아니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도 합의할 수 있는 포괄적인 원칙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세계야말로(!) 생각이 다른 사람/집단들로 이뤄져 있다. "일국차원에서나 세계 차원에서나 모두 정의의 원칙들은 심층부에서부터 다른 여러 다양한 윤리와 믿음이 존재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지구적 정의의 원칙들은 국제적 제도를 설계하고 국가들 상호 간의 잠재적인 강제적 행위를 지도하는 데에 이용된다."
그러므로 한 사회의 기본 구조를 평가하기 위한 정의의 원칙들은 '지구적인 제도와 정책들을 평가'하는 데에도 쓰여야 하며, 한 사회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구적인 차원에서도 "단일 종교 혹은 포괄적 윤리 이론에 기대지 않은 원칙들을 정당화하는 데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 (58쪽)
이렇게 정의론은 둥글게 둥글게 확장된다. 지구적 정의의 원칙들을 정리하기 앞서 저자는 현실주의, 민족주의, 세계시민주의를 각각 짚어본다. 정의에 관한 견해로 보자면 현실주의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들 및 외국인을 상대할 때에는 도덕적 고려 사항이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59쪽)한다. 외교적 현실주의가 그대로 도덕관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다. 맨들의 생각은? "정치적 결사체와 무관한 도덕의 핵심이 계속 존재하며, 따라서 세계국가가 부재하는 상황에서조차도 정의의 원칙은 세계 차원에서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도덕의 한 부분은 우리가 모든 인간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의 문제에 깊이 관련되어 있으며, 정의의 원칙은 세계 차원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70쪽).
민족주의자들의 논리는 현실주의자들의 논리보다도 더 쉽게 들을 수 있는(혹은 더 쉽게 속내를 포장할 수 있는) 것이다. "동료 민족구성원에 대한 우리의 도덕적 의무는 외국인에 대한 도덕적 의무보다 우선권을 가진다고 추론하는 것이 민족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논리"이다. 그는 이런 것을 '효율성 논변'이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이 모든 타인에게 일반적인 의무들을 이행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특정 개인들에게 특정 책임들을 할당하는 시스템이 보다 효율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동료 동포들'에게 '특별 의무'가 있다는 논변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79쪽).
세계시민주의자들에게 도덕 원칙에서 '내 동포의 우선권'은 없다. 이들 중에 어떤 이들은 아예 민족 같은 것은 인종주의적이니 생각조차 하지 말자고 하고, 또 다른 이들은 "민족적 애착과 충성을 없애지 않으면서도 국제적인 정치제도들을 강화하는 방안을 지지"한다. 롤스 식의 논리구조를 빌자면, "동료 민족구성원에 대한 추가적인 의무들은 세계시민주의적 정의 원칙에 의해 부과된 한계 내에서 머물러야 한다"(82쪽)고 주장할 수도 있다. 즉 세계인의 보편적인 인권에 장애가 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민족을 먼저 생각할 우선권'을 인정해주자는 것이다.
이런 지적이 중요한 것은, 민족이라는 것이 '도덕'이나 '정의'가 아닌 무언가의 원천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 생각엔 거의 늘 그렇다. 오히려 도덕이나 정의의 장애가 되면 됐지... 더군다나 민족주의는 종종 선민의식이나 특정 종교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기 마련이다.
개별 민족주의의 원리, 즉 어떤 특정한 개별 민족의 구성원에게 도덕적 관점으로부터의 특전이 주어져야 한다는 가정에 의거한 원칙은 거부해야 한다. 또 일반 민족주의의 원리, 즉 모든 사람은 자기의 민족에게 도덕적으로 더 무거운 일체감을 가진다는 가정에 입각한 정의의 원칙 역시 거부해야 한다. 일부 사람들은 민족정체성이 근본적이라고 여기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83쪽)
그렇다! 한국 사람이라고, 몽땅 다 "예멘인보다 한국인을 우선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난민의 문제에서는 의견이 갈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한국 정부를 향해, 저런 걸 원칙으로 삼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맨들이 소개하는 세계인권선언 작성 과정의 일화는 의미심장하다.
자크 마리탱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각국 유네스코위원회의 대표들이 모인 회의들 중에 있었던 일이다. 격렬하게 대립하는 이데올로기의 챔피언들이 인권 목록에 합의했다는 사실에 어떤 사람이 큰 놀라움을 표현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이죠. 우리는 권리에는 동의했죠. 단 그 이유에 대해서 누구도 묻지 않는다는 조건에서요'." 이것은 잭 도널리가 롤스의 용어를 빌려 '국제인권의 상호중첩적 합의'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이다.
마이클 이그나티에프가 지적하듯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인민들은 선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는 의견이 계속 일치하지 않을 수 있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논란의 여지 없이 나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97-98쪽)
아프리카 빈국 아이와 한국의 가난한 아이들 중 누구를 먼저, 혹은 '더' 도와야 하는가에 대해 답하는 방법은 어찌 보면 간단하다. 더 심각하게 고통받고 있는, 더 심하게 굶고 아픈 아이를 먼저 도와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맨들은 이런 접근법에 따라 기본인권의 항목을 제시한다(98-99쪽).
1. 신체적인 안전과 관련된 권리들. 살해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을 권리 그리고 신체를 보전할 권리가 포함된다.
2. 법치와 정당한 법절차의 기본권들. 자의적인 구금이나 체포의 금지, 기소됐을 경우에 공정한 발언 기회를 보장받을 권리, 법 앞에서의 형식적인 평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3. 정치참여의 권리.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과 결사의 권리가 수반된다.
4. 양심, 표현, 결사의 기본적 자유. 종교의 권리, 이주의 자유도 수반된다.
5. 최소한 적절한 몫의 자원을 확보할 권리. 식품, 물, 의료서비스를 확보할 권리가 포함된다.
6. 기본 교육의 권리.
이런 걸 말과 생각으로 제시하는 게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갖느냐고? 해결하기 어려워보이는 일이 벌어졌을 때 "유엔은 무능해" "미국을 누가 막을 수 있겠어"라고 하는 이들을 자주 본다. 그렇지 않다! 일전에 한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해변에 떠밀려온 물고기를 한마리 한마리 바닷물에 다시 집어넣어주는 소녀 이야기를 했었다. 행인이 소녀에게 묻는다. 이렇게 죽어가는 물고기들이 많은데 그 한마리 구한들 무슨 소용이냐고. 소녀가 답한다. "얘한테는 소용이 있어요." 이젤딘 아부엘아이시의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에서 본 얘기다.
세계인이 나서서 시위를 했지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지 W 부시의 미국조차도 감시받고 있다는, 비난받고 있다는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이라크 침공은 그 자체로는 전면전치고는 직접적인 민간인 피해가 매우 적었던 전쟁이 됐다(그 이후 벌어진 유혈사태들과 구분지어 말한다면). 인권을 '이야기'하고 '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이들은 세계인권선언이 모호하고 구속력이 없다고 비난하지만 맨들의 생각은 다르다.
법적인 집행의 메커니즘이 없었다는 것이 "뜻밖의 좋은 결과를 가져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권선언은 모든 지역적, 토착적 개별성과 우연성을 초월하는 다소 추상적인 도덕적 권리와 원칙의 천명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인권선언은 그밖의 보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수단들의...탄생에 산파 역할을 했다(Morsink 1999 19-20)." (135쪽)
맨들의 책에 따르면 "인권선언은 약 90개에 달하는 헌정의 권리조항의 모델로서 기여했거나 혹은 그 기본정신을 불어넣었"으며 "오늘날에는 세계의 어떤 나라도 자신이 기본인권을 침해한다거나 혹은 자기 시민의 이익에 반대되는 것을 용인한다고 공개적으로 내세우지는 않는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도덕적 이상에 관한 현재의 거의 만장일치 합의는 정말 놀랄 일"이다. 발언만으로는 기본인권을 보호할 수 없음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중요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 (138쪽)
하지만 그가 인정하듯, 겉으로는 기본인권을 아무도 부인하지 않지만 자국민을 공격하고 핍박하는 정권은 많다. 문제는 이들이 대량학살이나 침략처럼 눈에 띄는 일을 자행한 게 아니라, 나름 '정당성 있는 국가의 틀'을 갖추고 있을 때다. 롤스는 '무법국가'가 아닌 이런 나라들은 국제사회가 용인해줘야 한다고 했다. 이 문제에서 맨들은 롤스가 말한 '적정 수준의 위계사회들'에 대해서는 용인해야 한다고 했던 것에 동의한다.
분리독립을 하려는 집단에 대해서는? "분리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는 앞으로 생길 새로운 국가가 기본인권을 보호하는 정당한 정치구조를 설립할 수 있을 가능성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한 가지 핵심적인 문제는 새로운 분리독립국가에서 소수자들의 잠재적 처우에 관한 것이다. 이그나티에프가 지적하듯이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분리주의 운동의 주장은 인종적 다수의 지배를 요구하고 있으며, 인종적 소수에 대한 독재의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다." 또다른 문제는 분리된 이후에 남게 되는 기존 국가의 경제적 전망에 관한 것이다. 기존 국가에서 자원이 풍부한 모든 지역은 자신들이 차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따로 떨어져 남게 될 국가를 빈곤의 상태로 몰아넣는 분리독립운동은 정의롭지 못할 것이다. (160-161쪽)
우리 민족이 다수인 곳은 우리끼리 독립하겠다면서 나라를 만들어놓고 새 나라의 큰 소수자가 자기네들 안의 작은 소수자들을 억압하면 안 된다, 부자 지역/민족이 자기들끼리 잘 살겠다면서 가난한 나머지를 남겨놓고 독립해 떨어져나가면 정의롭지 않다는 얘기. 전자를 보면서는 우크라이나의 소수집단에서 떨어져나가 러시아로 간 크림반도의 러시아인들과 그 속에 남게 된 '소수 속의 소수' 타타르인들이, 후자를 읽으면서는 카탈루냐가 떠오른다.
마지막 부분은 직접적이면서도 포괄적이고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문제, 즉 지구화와 빈곤에 대한 것이다. 지구화는 우리가 지구적 윤리를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부자 나라 가난한 나라의 분배 불평등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우리는 지구화와 함께 어떤 의무를 더 짊어지게 되는 것일까? 부자 나라는 가난한 나라에 '부를 이전시킴'으로써 정의를 실천할 의무가 있을까?
롤스와 맨들이 계속 얘기하듯, 그런 의무가 강제적인 것이라고 말하려면 그걸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한다. 맨들이 보기에 "정치적, 법적 질서는 모든 시민에게 강제적으로 부과되기 때문에 정당화 논리에 평등주의적 요소를 포함할 때에만 정당화의 그 무거운 부담에 대응할 수 있다. 국제적 정의의 원칙들에는 대응해야 할 그렇게 높은 부담이 없으며, 따라서 그와 같은 평등주의적인 분배의 정의의 요구조건이 포함되지 않는다." (199쪽)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적극적 의무'이고 나쁜 일은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 의무'라는 식으로 저자는 구분을 한다. '정치구조가 공유되는 경우'가 아닐 때에 기본인권에 포함되는 것들이 아닌 문제에서까지 정의의 두 가지 의무가 모두 생긴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결론은 '온건한 세계시민주의자'의 시각을 향해 간다. 미국이 이스라엘과 이집트에 편파적으로 '(군사를 포함한) 원조'를 하는 것은 전략적 고려에 따른 것이지 정의의 의무를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없으며, "부유한 나라들이 자신들의 생활 방식에 기껏해야 아주 미미한 영향만 받으면서 극심한 빈곤의 구호에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216쪽)고. 미국과 유럽의 과도한 농업보조금에서 보이듯, 부자 나라들이 가난한 나라들에 장벽을 세우면서 동시에 자기네가 잘 하는 금융시장 같은 것에는 개방을 강요해왔다고. 힘들여 번 돈을 가난한 나라에 주라는 게 아니라, 최소한의 의무만 해도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이라고.
복잡한 철학적 논의를 거쳐 내린 결론은 너무나도 '상식적'이다.
경제발전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정의에 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은 우리에게 현재 수준보다 더 많은 것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정의가 정확하게 어떤 형태의 요구를 제기하는지를 둘러싼 복잡한 논의가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히 학문적인 논의에 불과하다고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정치적 의지의 실패, 아마도 우리의 행동과 방관이 초래할 결과르 주의 깊게 보려고 하지 않는 도덕적 상상력의 실패에서 비롯된 정치적 의지의 실패일 뿐이다. 개발도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해도 되는 시절은 영원히 지나갔다. (217쪽)
'딸기네 책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 (0) | 2018.08.21 |
---|---|
티머시 미첼, '탄소민주주의' (1) | 2018.08.19 |
에릭 리우, '시민권력' (0) | 2018.07.02 |
앤서니 스미스, '민족의 인종적 기원' (2) | 2018.06.17 |
리처드 하스, '혼돈의 세계' (0) | 2018.06.03 |